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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장 13-14절. 마가 요한이 선교여행에서 탈락해버림
설교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 전도여행에 이어서 비시디아에 있는 안디옥 전도여행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3절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Paul and his companions put out to sea from Paphos and came to Perga in Pamphylia; but John left them and returned to Jerusalem.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Ἀναχθέντες δὲ ἀπὸ τῆς Πάφου οἱ περὶ, Παῦλον ἦλθον εἰς Πέργην τῆς Παμφυλίας·
having sailed then from the Paphos (with) those around (him), Paul came to Perga of the Pamphylia
직역하면 ‘동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바울이 비시디아의 버가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배타고’(Ἀναχθέ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ailed) 바보에서 배타고 떠난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르니’(ἦλθον)는 부정과거로서(came) ‘이르렀다’는 뜻이고,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버가’는 소아시아 지역의 해변가에 있는 밤빌리아 지방의 수도였고, 바다에서 8킬로 내륙에 있고, 서쪽으로 해안에는 앗달리아라는 중요한 항구가 있었습니다.
이 버가는 높은 타우르스 산맥(1500-2700m)으로 둘러싸인 가마솥 같은 곳으로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말라리아 열병에 쉽게 걸리곤 했습니다.
램지(Ramsay) 교수는 바울이 이 버가를 지나면서, 틀림없이 말라리아 열병에 걸렸을 것이고, 그래서 이 열병이 만성화해서 육체의 가시(고후12:7)가 되었을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St Paul the traveller. 34)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Ἰωάνης δὲ ἀποχωρήσας ἀπ’ αὐτῶν, ὑπέστρεψε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John but having departed from them, returned to Jerusalem
직역하면 ‘그러나 요한은 그들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떠나’(ἀποχωρήσα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departed) 요한이 매정하게 바울과 바나바를 확 떠나간 모습을 가리키고, ‘돌아가고’(ὑπέστρεψεν)는 부정과거로서(returned) 요한이 매정하게 혼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린 사실을 가리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1. 이전에는 1절이나 7절에서 <바나바와 바울>로 소개되었는데, 여기서는 바울을 중심인물로 소개하고 바나바와 마가 등은 그냥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브로 전도에서 바울이 무당 엘루마를 장님이 되게 하고, 총독을 믿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바울이 설교하고 기적을 행하지만, 바나바는 그냥 동행하는 사람으로 동참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2. 이 구절 이전에는 언제나 <바나바와 바울>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와서는 <바울과 바나바>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먼저 예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바울을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예수님을 믿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에 바울을 소개해주고, 자기의 공동체에서 보호해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연륜적으로 신앙적으로나 성숙한 인격과 인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로서 순서상 바나바가 먼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전도 여행이 시작되면서부터 그 위치가 바뀝니다.
바울이 이 선교여행을 이끌고 가는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해도 바나바가 설교하지 않고 언제나 바울이 설교합니다.
그리고 선교여행을 끌고 가는 것도 바울이 끌고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선교여행부터는 <바울과 바나바>로 순서상 바울이 먼저 나옵니다.
3.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리더쉽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리더쉽과 바나바의 리더쉽입니다.
교회는 이 두 가지 리더쉽이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일을 만드는 사람, 비전을 세워가는 사람, 역사를 끌고 가는 사람, 이런 지도자적인 형태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나바는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협력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선봉자가 아니라 내조자입니다.
교회는 이 두 가지 리더쉽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가서 설교를 하고 외치고 모든 일을 조직하고 끌고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만 있다고 교회가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뒤에서 정리해주고 도와주고 협력해주고 내조해주는 그런 리더쉽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리더쉽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4. 구약에 이런 비슷한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야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들은 모세 밑에서 잘 자랐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따라서 하나님의 일들을 잘 감당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나이가 들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여호수아나 갈렙 중 한 사람을 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모세의 리더쉽을 승계합니다.
문제는 갈렙일 것입니다.
갈렙이 얼마나 갈등이 많았겠습니까?
모세를 섬길 때는 갈등이 없었어요.
그것은 아예 격이 다른 지도자이니까.
그러나 여호수아는 동기입니다.
같은 동료인데 여호수아를 리더로 세우려니까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습니까?
여호수아를 보면 갈렙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언제나 여호수아가 나타나서 지휘를 합니다.
그러나, 갈렙이 나타난 때가 있습니다.
그의 나이 85세입니다.
40년을 숨어서 삽니다.
여호수아 그늘 밑에서 조력자로 협력자로 존재합니다.
85세 되었을 때 여호수아에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겉으로 나타난 여호수아보다도 안으로 숨어있는 갈렙의 인격과 신앙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 두 가지 리더쉽이 존재합니다.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바보는 구브로 서쪽 해안에 있는 항구 도시였는데, 이곳에 총독 서기오 바울의 관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은 구브로 전도를 마치고, 이 바보 항구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항해하여 육지인 밤빌리아 지방의 버가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 선교 행에 동참했던 마가 요한은 육지인 버가에 도착하자 자기 집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 요한이 바나바와 사울을 떠나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유는 여러 가지가 합성되었을 것입니다.
천성이 유약해서 전도 여행에 겁을 먹었고, 바울이 외삼촌 바나바보다 더 우세해지고, 특히 바울의 신학이 예루살렘 교회의 신학보다 이방인 중심의 자유주의인 것에 불만이 있었고, 1500-2700미터의 타우루스 산맥을 지나서 전도 여행하는 것이 못마땅하고, 예루살렘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Baker
이처럼 마가 요한이 이방인 신자가 유대인처럼 할례받고 절기를 지키고, 음식에 관한 성결법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것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 요한이 바울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바울의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비판하자,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 신자들이 갈라디아 지방 교회에 가서 이방인들이 예수님 믿어서는 참된 신자가 아니고, 유대인의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에 물들자 바울 사도가 대단히 화가 나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하면서, 율법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공격을 했습니다.
2. 이전에는 1절이나 7절에서 <바나바와 바울>로 소개되었는데, 여기서는 바울을 중심인물로 소개하고 바나바와 마가 등은 그냥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브로 전도에서 바울이 무당 엘루마를 장님이 되게 하고, 총독을 믿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바울이 설교하고 기적을 행하지만 바나바는 그냥 동행하는 사람으로 동참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마가 요한은 자기 집이 예루살렘 교회로 사용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귀공자와 같은 사람이고, 바나바는 마가의 외삼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구브로에 있는 밭을 팔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함으로써 유명하게 된 사람이고, 특히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했을 때 사도들이 상대해주지 않았지만 바나바가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10년이나 묻혀 지내고 있을 때, 바나바가 바울을 데려다가 안디옥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게 해주고, 더구나 선교여행에 동참하도록 주선을 해주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으로 바나바는 바울의 은인이기 때문에, 마가의 생각에는 바울이 아무리 성령의 은사가 강할지라도 외삼촌인 바나바를 중심인물로 대접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브로 전도 이후에 바울이 중심인물로 주도권을 잡자 마가 요한은 젊은 혈기에 화가 나서 선교여행을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기적을 행하고 총독을 믿게 한 것은 바울이 인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시고 바울을 들어 쓰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는 인간적인 서운함을 버리고,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할 줄 알았어야 합니다.
3. 그런데 이 때 마가 요한이 중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리자 바울도 굉장한 심적인 타격을 입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 36-40절을 보면, 2차 선교여행을 떠나려고 했을 때, 바나바가 마가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하자 바울은 절대 반대를 했습니다.
즉 마가 요한의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은 심히 다투어 피차 서로 갈라져서,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 지방으로 각각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아직 젊을 때라서 신앙은 굉장히 좋은데, 아직도 신앙 인격이 성숙되지 못해서 마가 요한을 포용하지 못했습니다.
4. 그 후로 마가 요한도 성숙해졌고, 더욱이 바울은 많이 성숙해져서 서로 좋은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즉 골로새서 4장 10-11절에는 바울이 로마에 1차 투옥되었을 때, 바나바의 생질 마가가 골로새 교회에 이르거든 내가 명한 대로 마가를 잘 영접하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감옥에 2차 투옥되었을 때는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디모데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내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가도 성숙해져서 소위 베드로 복음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마가복음을 기록했고, 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나 가정에서 성숙한 신앙 인격자가 되어서 포용하고 감싸 안아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 여기서 마가 요한이 선교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실을 좀 더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 교회 마리아의 아들이고, 바나바와 생질이고, 베드로의 영적 아들로서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마가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서 전도 여행의 수종자로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바보에서 버가로 가는 길목에서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전도 여행을 하다가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마가가 시험이 든 것이 분명합니다.
이전에 안디옥 교회에서는 외삼촌 바나바가 주도적으로 일 해왔는데, 선교여행을 하다보니까, 외삼촌 바나바는 조수밖에 안 되고, 바울이 주도권을 행사하니, 기분이 나쁘고 자기도 대접을 받지 못해서 시험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마가 요한은 시험에 들어서 도중에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교회에서 일하다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다 보면 없어집니다.
‘내가 뭐 월급을 받나’, 이러고 가버립니다.
마가와 같은 케이스입니다.
여러분들은 처음도 잘하지만 끝에도 잘하기 바랍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감정적으로 일을 결정하면 그렇습니다.
실제 문제에 부딪히니까 당황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중에 일을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6. 이 문제는 초대교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등장합니다.
2차 전도여행이 시작될 무렵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됩니다.
사도행전 15장 36-40절에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온 바울은 전도하고 온 사람들이 궁금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결신한 신자들이 잘 믿고 있는지 시험이 들지 않았는지 다시 심방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에게 다시 가자고 말을 했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마가도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가 자기들을 배신하고 도중에 포기한 사람이지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주 싫어합니다.
그 사람을 데리고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문제 때문에 논쟁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 싸운 줄 알았는데 싸운 것을 보니까 그런 성령 충만한 분들도 싸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서로 다툰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갈라섰습니다.
이 마가 사건 때문에 선교사들 간에 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7. 바나바가 옳습니까, 바울이 옳습니까?
둘 다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사람을 봅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중요하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상처 나면 일을 포기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바나바는 교회를 세웠다는 말이 없습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돕는 사람입니다.
한편 바울은 사람은 좀 손해를 보아도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2차 전도 여행을 했고,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는 전도를 했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이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는 것보다는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이런 역할을 보게 될 때 상호 보완하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서 결혼을 하게 되면 놀랍게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치약을 써도 중간을 눌러서 짜 쓰는 사람이 있고, 뒤에서부터 말아서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에서 시시한 것을 무조건 버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시시한 것도 모으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부가 같이 살 때 사랑한다는 것 이외에는 공통점이 별로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부부들도 잘 살아갑니다.
다르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서로 보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서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의 약점이 보였다면 내가 비판하라고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보완하라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그 다양성 속에서 하나의 일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때 교회는 능력을 갖게 되고 사랑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8. 바나바와 바울이 초창기에는 이렇게 흩어지지만 이 두 가지 요소들이 필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메시지를 통해서 몇 가지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아무리 훌륭한 주의 종들이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도 역시 인간은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바나바나 바울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서로 싸울 때도 있고 헤어질 때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하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하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극단적으로 흘러가서 싸울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서로 은사가 다르다고 하는 것은 서로 비판하라는 뜻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라는 뜻임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셋째 역시 사람은 헤어질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부딪히는 현실은 서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헤어짐이 비극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창조적인 축복이 될 수 있으며, 그 헤어짐은 오히려 축복의 계기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고통과 아픔과 그런 사건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위하여 더 영광스러운 사건으로 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을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다 좋은 사람과만 일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 나를 비판하는 사람도 끼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는 다 좋은 사람만 있지 않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변덕이 많은 사람도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이 살다 보면 그들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9. 바울과 마가는 나중에 어떤 관계가 될까요?
바울은 마가를 영원히 잊어버렸을까요?
바울은 마가를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골로새서 4장 10-11절에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라고 나옵니다.
'(이 마가에 대하여서는 너희가 명을 받았으며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도 마가에 대한 언급이 또 나타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었느니라. 그리고 네가 올 때 마가를 꼭 데리고 와라. 그는 나의 일에 유익이 되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후에 바울이 마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가는 신앙이 어렸을 때는 그런 변덕이 있었지만, 그러한 실수를 통하여 신앙이 성숙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유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혹시 부딪힌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의 관계가 마가처럼 변하도록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고, 여러분에게 배신을 주고, 여러분에게 아픔을 주었지만, 그 성도도 하나님을 위해서 크게 일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결론이 좋아야 합니다.
마지막이 좋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처럼 주의 일을 진취적으로 잘 성취해가시고, 바나바처럼 사람을 잘 포용하시고, 마가 요한처럼 일시적으로 잘못을 했더라도, 다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아름다운 주님의 나라가 되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4절.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going on from Perga, they arrived at Pisidian Antioch, and on the Sabbath day they went into the synagogue and sat down.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Αὐτοὶ δὲ διελθόντες ἀπὸ τῆς Πέργης, παρεγένοντο εἰς Ἀντιόχειαν τὴν Πισιδίαν,
they now having passed through from the Perga, arrived to Antioch of the Pisidia
직역하면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서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도착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Αὐτοὶ they)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διελθ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passed through) 단호하게 버가에서 더 지나 나아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르러’(παρεγένοντο)는 부정과거로서(arrived) ‘도착했다’는 뜻입니다.
‘비시디아’ 지방은 밤빌리아 지방의 북쪽에 있는 행정 관할 구역이었습니다.
‘안디옥’은 선교여행의 출발지인 수리아 지방의 안디옥이 아니라, 비시디아 지방의 안디옥으로서,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후에 수리아 지방의 왕이 된 안디오쿠스 왕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된 도성입니다.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버가에서 안디옥까지 여행은 일주일 정도 걸리며, 안디옥은 버가에서 북쪽에 있고, 안디옥은 소아시아 중앙고원 지대에 있고, 세스트루스(Cestrus) 강의 상류에 있고, 번영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καὶ ἐλθόντες εἰς τὴν συναγωγὴν τῇ ἡμέρᾳ τῶν σαββάτων, ἐκάθισαν.
and having gone to the synagogue on th day of the sabbaths, they sat down
‘들어가’(ἐλθ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gone) 바나바와 바울이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회당에 들어간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키고, ‘앉으니라’(ἐκάθισαν)는 부정과거로서(they sat down)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앉아있는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안디옥에는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어서 회당이 있었고, 바울은 구약성경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상대로 전도 설교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바울과 같이 랍비 자격을 갖춘 방문자에게 설교 초청을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NIV-SB
‘안식일’은 유대인이 토요일에 지켰으나 기독교에서는 주일에 지키는데, 공통적인 것은 육체를 쉬고, 영혼이 소생하는 날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육체를 쉬지 않고 지치도록 예배하는 것도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고, 예배를 드리지 않고 육체만 쉬는 것도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회당’은 나지막하고 네모난 건물인데, 내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습니다.
제일 앞에는 성경을 낭독하고 설교하는 강단이 있었고, 랍비와 바리새인들은 앞의 상좌에 따로 앉았고, 한쪽에는 너울을 쓴 여자들이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회당’에서의 유대인 예배는 남자들이 ‘탈리트’라는 보자기 같은 것을 머리와 어께에 두르고 들어가 앉으면, ‘ 셀리악’이라는 사람이 기도문을 대표로 낭독하고, ‘파라샤’라는 율법이 낭독되고 해설되고, ‘카짠’이라는 회당 서기가 법궤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주면, 셀리악이 구약 선지서인 ‘하프타라’를 세 절씩 읽고 해석합니다.
그 뒤에 설교자가 구약성경을 주석하고 강해하는 ‘미드라쉬’를 하거나 설교를 합니다.
이 마지막 성경 강해나 설교는 회당 소속원이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Farrar, the life and work St Paul. 367).
사회자격인 셀리악이 자기 순서를 마치고, 방문자에게 ‘회중에게 권할 말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예수님이나 바울 같은 사람이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 ‘안디옥’는 선교여행의 출발지인 수리아 지방의 안디옥이 아니라, 비시디아 지방의 안디옥으로서,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후에 수리아 지방의 왕이 된 안디오쿠스 왕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된 도성입니다.
이 안디옥에는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어서 회당이 있었고, 바울은 구약성경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상대로 전도 설교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바울과 같이 랍비 자격을 갖춘 방문자에게 설교 초청을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NIV-SB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이 선교 사역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이 보겠습니다.
2. 오늘은 바울 사도가 바나바나 마가 요한을 제치고, 이방인 선교의 선두 주자로 나선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선한 성품을 가진 바나바나 예루살렘 교회의 귀공자 같은 마가가 탈락하고, 바울이 이방인 선교의 핵심 주자가 된 것을 예수님이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 선교의 책임자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선교 사역에서 주님이 바울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게 해주시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해서 이방인 교회들이 설립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일은 좋은 성품이나 열심만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사용해주셔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기도하여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여러분을 크게 사용하시고, 복된 열매들이 여러분의 삶속에 풍성히 맺혀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