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는 인구 4백만명, 면적은 56천 평방키로로 한국의 50% 정도 되는 발칸 반도 중서부에 있는 국가이다.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루던 공화국이었으나, 1980년대말 개혁의 흐름 속에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했다. 수도는 자그레브, 화폐는 유로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크로아티아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변모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온 것은 7세기였다. 803년에 샤를마뉴의 종주권을 인정했으며, 곧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후 크로아티아인들의 로마 가톨릭교에 대한 충성심은 정교회를 믿는 이웃 세르비아와의 관계에 계속 영향을 끼쳐왔다. 10세기에 크로아티아 왕국이 수립되었고 1091년에 헝가리의 라슬로 1세가 왕국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크로아티아는 8세기 동안 헝가리에 합병되어 있었다.
헝가리와의 합병 기간 동안에도 크로아티아는 자체의 의회인 사보르를 유지했으며, 법률상으로는 독립 왕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526년 헝가리가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패배하면서 크로아티아의 대부분 지역이 투르크로 넘어가 1699년까지 그들의 통치를 받았다. 나머지 지역은 뚜렷한 통치자 없이 남겨져 있다가 1527년 사보르 의회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를 왕으로 선출했다. 오스트리아는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지역들을 군사적인 국경지대로 삼았으며, 터키와의 전쟁 때 국경 주민으로 징발돼간 세르비아인들을 식민지화했다. 1809∼13년에 일리리아 지방의 일부로서 나폴레옹의 통치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중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들에게 점령·분할당하자 1941년 4월 10일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가 독립국가임을 선포했고, 4일 후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승인을 받았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크로아티아는 처음에는 유례없는 발전을 이룩했지만 연방 내에서 자치권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주의가 붕괴하자 선거를 통해 비공산주의계 정부가 탄생했으며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자극을 받은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세르비아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군의 도움으로 크로아티아 내의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 이들이 크로아티아 동부 크라이나 지방에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설립을 선포함에 따라 1995년까지 크로아티아 정부군과 전투 상황이 지속되었다.
세르비아와의 전쟁이 종료된 이후 사회적 안정이 회복되었고, 2000년대 이후 유럽연합을 포함한 서방세계로 경제 통합을 추진했다. 그 결과 2013년 유럽연합 가입에 성공했으나 불안정한 물가와 불건전한 공공지출 등으로 재정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함에 따라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이후 지속적인 경제 안정화 정책을 추진, 2023년 12월 8일 유럽연합에서 솅겐조약 가입을 승인함에 따라 2024년 1월부터 화폐를 유로화로 전환했다.
1992년 4월 15일 한국이 크로아티아를 승인한 뒤, 1992년 11월 18일에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북한과는 1992년 5월 12일 승인이 이루어지고 1992년 11월 30일에 수교를 했다. 공관장은 주헝가리 대사가 겸하고 있으며, 진출업체로 삼성전자·엘지전자·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 등이 있다. 한국은 의약품·승용차·선박·합성수지·전기강판 등을 수출하며, 크로아티아에서는 선박·축전기·박류·어육 등을 수입한다. 교역 규모는 2016년 4억 6천만 달러 규모로 정점을 기록한 후 점차 감소하여 2021년 1억 8천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2023년 기준 한국의 대 크로아티아 수출액이 6,361만 달러, 수입이 1억 939만 달러이다. 2023년 기준 크로아티아 재외동포는 142명이며,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크로아티아인은 85명이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자그레브(Zagreb)과 자다르(Zadar),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국립공원이다.
약 19.5Ha에 해당하는 면적의 숲으로 이루어진 이 국립공원은 곳곳에 16개의 청록색 호수가 크고 작은 폭포로 연결되어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약 18km 길이의 인도교는 개울 위를 지나기도 하고, 개울이 인도교 위를 지나 얕게 흐르기도 하여 매우 상쾌한 산책로를 형성하고 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보존을 위해 내부의 모든 인도교, 쓰레기통, 안내표지판 등을 나무로 만들었고, 수영, 취사, 채집, 낚시가 금지되어 있으며 애완동물의 출입도 막고 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그 크기가 매우 커 구석구석을 자세히 보려면 3일 정도가 소요되는 공원이다. 하지만 근처의 대도시 자다르나 자그레브에서 하룻동안 들러서 보아도 그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봄철에는 풍부한 수량의 폭포의 웅장함을 볼 수 있고,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진 울창한 숲 속의 신비로운 호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가을철에는 사람이 적어 고요한 분위기와 단풍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 사시사철 매력 있는 곳이다.
이 국립공원의 호수는 상류부분과 하류부분으로 나뉜다. 상류부분에 위치한 백운암 계곡의 호수들의 신비로운 색과 울창한 숲의 조화가 가장 신비로운 장관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하류부분에 위치한 호수와 계곡들은 그 크기가 조금 더 작고 얕으며, 나무도 작아 아기자기한 느낌을 준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대부분의 물은 Bijela와 Crna (하얀과 검다는 뜻을 갖는다.) 강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며, 모든 물줄기는 사스타비치(Sastavici) 폭포 근처에 있는 코라나(Korana) 강으로 흘러 나간다.
국립공원 내부의 방대한 양의 물은 물에 포함된 광물, 무기물과 유기물의 종류, 양에 따라 하늘색, 밝은 초록색, 청록색, 진한 파란색, 또는 회색을 띠기도 한다. 물의 색은 날씨에 따라서도 달라지는데, 비가 오면 땅의 흙이 일어나 탁한 색을 띠기도 하고, 맑은 날에는 햇살에 의해 반짝거리고 투명한 물빛이 연출되기도 한다. 여행을 할 때 강하게 추천하는 장소이다.
이 지역은 약 400년 전 까지만 해도 공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다가,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터키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경 문제로 군대의 조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사람의 접근이 매우 어려워 ‘악마의 정원’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때문에 많은 전설을 갖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1893년에 이 지역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가 생긴 이후, 1896년에 처음으로 근처에 호텔이 지어지면서 관광지역으로서의 잠재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1951년에는 지형의 침식이나 훼손을 최소화하고, 관광 산업은 극대화 할 수 있는 국립공원의 적합한 범위가 구체적으로 지정되었다. 1893년 기준으로는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 중 한 곳으로, 매년 약 900,000명이 이 아름다운 지역을 방문하고 있다.
스플리트는 제2의 도시로 반도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에 수심이 깊은 보호항이 있다. 이 항구와 중앙에 자리잡은 지리적 위치 및 북쪽으로 연결되는 훌륭한 철도·도로 교통망이 결합되어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 되었다. 스플리트 항에는 대규모 조선소가 있다. 그밖에 이 도시에서는 플라스틱·화학제품·알루미늄·시멘트 제조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와 섬들을 연결해주는 여러 척의 연락선이 운항되고 있으며, 1962년 이후 국제공항을 확장시켰다. 대학교(1974)와 해양학연구소가 있다. 항도인 리예카(이탈리아어로는 피우메)를 이탈리아에 일시적으로 빼앗긴(1945 반환) 1924년부터 이곳의 항만시설이 개발되었다.
옛 시가지의 중심 부분은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안에 자리잡고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5년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313년 사망하기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거대한 이 궁전(295~305 세움)에는 바다를 향하는 두께 2m, 높이 22m의 벽과 북쪽을 향하는 높이 15m의 벽이 있다. 원래 이 궁전에는 4개의 성문과 16개의 탑이 있었는데, 그중 3개의 탑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옛날에는 아드리아 해의 파도가 남쪽 벽까지 밀려왔으나 이제는 가로수가 줄지어 심겨진 산책로로 인해 성벽까지 이르지 못한다.
615년에 살로나이를 약탈한 아바르족이 이 궁전에도 피해를 입혔다. 당시 주민들은 처음에 섬들로 피했으나 그후 620년경에 다시 돌아와 이 궁전을 피신처로 삼고 주거지를 스팔라툼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성벽과 기둥들까지 포함하여 면적이 3ha인 궁전 안에 자신들의 집을 지었다. 이 궁전은 로마 시대의 궁전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잘 보존된 것이며, 그리스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반씩 섞인 과도기적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 궁전의 평면은 로마 시대의 야영지처럼 직4각형이고 4개의 길이 중앙에서 만나도록 설계되었으며, 길마다 거대한 아케이드가 늘어서 있다. 북쪽 끝에는 다수의 노예·하인·수비대를 위한 숙소가 있었으며 남쪽 끝에는 웅장한 아치형의 황실 거처와 집무실들이 있었다.
653년 이 시 최초의 주교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영묘를 대성당으로 바꾸었는데 이 성당은 훌륭한 프레스코, 대리석으로 만든 설교단, 로마네스크 양식의 조각물로 유명하다. 주피터 신전은 오래전에 세례당으로 바뀌었으며, 14, 15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종탑이 추가로 건설되었다.
이 궁전이 세워진 이래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주해왔으며, 로마 시대뿐만 아니라 중세·르네상스·바로크 시대의 건축물과 장식물들이 있다. 크로아티아 당국은 로마 시대의 유적들을 더 발굴하고 중세 초기의 유물들을 밝혀내기 위해서, 절충적인 양식의 건축물들과 현대적인 특색들을 보존하기 위해 힘써왔다. 지금도 주민들은 이 궁전을 박물관으로서가 아니라 시의 중심으로 여긴다.
대성당과 세례당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기둥이 늘어선 중정(中庭)에는 카페가 있다. 로마 시대 양식의 아케이드에는 가게들이 즐비하며 궁전의 동문 바로 바깥쪽에는 이 시의 주요시장이 있다. 그러므로 관광객들은 시민들의 빨랫줄 아래를 거닐면서 로마 시대 및 그 이후 모든 시대의 건축유적을 보게 된다. 박물관으로는 크로아티아의 조각가인 이반 메슈트로비치의 작품들을 전문적으로 소장한 박물관과 무기 박물관이 있다.
베네치아풍의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시청사는 민속학 박물관으로 쓰인다. 주(主)광장의 서쪽과 남쪽에는 중세에 옛 시가지가 확대되면서 생긴, 미로처럼 얽힌 좁은 가로망이 있다. 벨프리 교회의 성모 마리아 종각(1100경)은 달마치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812년부터 이 도시는 비잔틴 제국의 주요도시로 발전했다. 베네치아(998)와 크로아티아(1069)에게 잠시 점령당한 후 1105년에 헝가리-크로아티아의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했으며, 경쟁관계에 있는 트로기르와 가끔 싸웠다. 1420~1797년에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고 1797~1918년에는 오스트리아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오스트리아의 통치기간중 1808~13년에는 잠시 프랑스에 넘어가기도 했다. 1918년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항만시설이 독일군과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옛 도시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80년의 지중해 연안 경기대회를 위해 새 종합경기장이 건설되었다.
심 산
동화 속 세상같은 한적한 시골 마을
'강이 나뉘어지는 곳(라스토케, rastoke)'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코로나 강이 세갈레로 갈라지는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당시 마을 전체가 심각하게 훼손되었지만, 정부의 도움을 받아 재건되었고, 지금까지 물레방아를 활용한 수력 발전 기법으로 마을을 유지해오고 있다. 마을 중앙에는 예쁜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는 에메랄드빛 아름다운 호수가 있고 인근 하천에서는 여러 개의 자연 폭포를 구경할 수 있다. 사진속 남자의 긴 머리는 여러 갈래로 떨어지는 폭포를 연상케 한다.
플리트비체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국립공원▼
송어▼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
스플리트 디오클레트아누스궁전▼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