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15,16 주와 결을 같이하여 기도가 주가 되게 하라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2)라고 엎드려 구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13)라고 말씀하셨는데 온몸에 퍼진 나병이 순식간에 떠났다. 이 병 고침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졌고, 그 소문을 듣고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예수님께로 몰려왔다.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당연히 그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모두 치료해 주시고,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들을 사랑하시어 적극적으로 환영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기대에 찬물이라도 끼얹듯이 그들을 외면하고 한적한 곳으로 가버리셨다. 왜 예수님은 그들을 환영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이 모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예수님 앞으로 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가 훨씬 쉽다. 그런데 왜 피하셨을까? 무리를 사랑하지 않으신 것일까? 피곤하신 것일까? 뭔가 못마땅하셨던 것일까?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가신 이유는 다름 아닌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시간에 기도해도 되는데 왜 지금 이 타임에 기도하러 가셨을까? 말씀 전하고 고쳐주는 일정을 다 소화한 후 기도해도 늦지 않는데 왜 오는 사람들을 거부하고 기도하러 가셨을까? 한창 일해야 할 바쁜 대낮에 한 직원이 기도하러 가야 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없는 거야?’라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믿음이 좋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일을 회피하고 싶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직원의 제안이 과연 정상적일까? 해야 할 일을 끝내고 기도하든지 그 전에 기도해야지 일하던 중에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직업윤리에 어긋난다. 사장과 동료는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수님의 행동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에겐 다 이유가 있었다. 예수님은 일[가르침과 치료]보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바쁜 업무 중에 기도해도 된다는 것인가? 그런 뜻이 아니라 기도에 절대가치를 두라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기도는 상대가치가 아니라 절대가치였다. “기도하시니라”[προσευχομενος;프로슈코메노스]는 미완료 시제이다. 과거의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오던 시간이 예수님이 평소 기도하던 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맞물렸다. 보통 맞물리면 기도 먼저 하는가? 아니면 그들의 필요를 해결해 준 다음에 기도하는가? 대부분 필요를 채워준 후 기도한다. 급한 불부터 끈 다음에 기도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에게 기도는 차선이 아니었다. 스케줄과 상황과 감정과 몸 상태에 따라 기도의 시간과 분량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고정해 놓고 일정과 상황과 컨디션을 조율하셨다.
그래서 사람들과 환자들을 뒤로한 채 기도하러 가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사랑이 없거나 매정한 것이 아니다. 피곤하여 회피한 것도 아니다. 기도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면서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진지하게 묻기 위해 기도하러 가셨다. 하나님 아버지와 끊임없는 교제가 수반되어야만 가르치고 치료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는데 몸소 실천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으셨다. 예수님에게 기도가 주(主)고 일[가르침과 치료]은 객이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하는 일이 주가 되고 기도가 객이다. 우리는 하루의 일과, 감정과 몸 상태에 따라 기도의 시간과 분량이 결정된다. 너무 바쁘고 몸이 피곤하고 기분이 나쁘면 기도하지 않고, 시간이 허락되면 기도하고, 기도를 하더라도 그리 길게 하지 않는다. 왜? 나와 내 일정과 내 욕구가 중심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가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는 내가 좋아하는 게임보다 앞설 수 없다. 스포츠, 취미, 유튜브, TV, 여행보다. 이 모든 것을 즐긴 후 할 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기도이다. 또한 일의 성공을 위해 기도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 일이 잘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교회 일도 그렇다. 열심히 봉사하고, 가르치고, 섬기는 데는 심혈을 기울이지만 정작 기도는 등한시(等閒視)한다. 우리에게 기도는 보조일 뿐 주가 아니다. 기도를 절대가치로 두었던 예수님과 너무나 대조된다. 기도를 통해 하루의 일과를 결정하셨던 예수님과 사뭇 다르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잘나가던 예루살렘 교회에 문제가 생긴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 빠졌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주객이 전도된 것을 깨달았다. 기도하고 말씀에 힘을 써야 할 제자들이 접대하는 일 즉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식량과 생활용품을 나누는 구제 사업에 힘을 쏟다 보니 주 업무였던 기도와 말씀에 문제가 생겼음(행 6:2)을 알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 6:3,4) 주객이 전도된 것을 바로 잡았다.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방해를 주는 구제 사업을 집사들에게 일임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도로 부른 목적 즉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오로지 힘쓰기로 했다. 기도는 제자들의 사역에 핵심 가치였다, 말씀 사역보다 앞선 것이 기도였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인가? 전도? 구제? 제자 훈련? 사랑? 오로지 기도였다. 무능했던 제자들이 많은 기적과 표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던 언어로 기도하고, 전도 폭발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제자들의 능력 있는 가르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오로지 기도에 힘쓰다가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이 입혀 졌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과 결/궤를 같이한다. 예수님의 능력 있는 가르침은 기도의 열매였다. 예수님에게 기도는 말씀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우선순위였고, 사역의 핵심이었고, 주였다. 예수님은 사역 중심이 아닌 기도 중심으로 사역하셨다.
여러분이 열정을 내는 일이 잘 풀리고 있는가? 그래서 기도할 시간이 없는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열정만큼, 잘 풀리고 있는 만큼 기도를 더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이다. 잘 풀리든 안 풀리든 기도가 줄어든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마귀의 뜻이다. 잘 풀리든 안 풀리든 기도가 점점 더 잘 되고 분량이 늘어나고 있는가? 이것은 100% 하나님의 뜻이다.
마가복음 1장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난다. 회당에서 돌아오신 예수님은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해 주신다. 해가 질 무렵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로 데려왔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5장에서처럼 외면하지 않고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을 청한 후 다음 날 새벽 아직 날이 밝기 전에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왜 한적한 곳으로 가셨을까? 아버지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기 위함이었다[προσηυχετο프로세우케토; 3인칭 단수중간태 미완료].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서 “모든 사람이 주를 [애타게] 찾나이다”(막 1:37)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환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은 예수님께 거는 기대가 컸다. 예수님만 보고 온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병을 모두 고칠 수 있고, 귀신을 쫓아내실 수 있다. 능력도 되시고 긍휼도 많으시니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또한 그들의 딱한 처지를 해결해 주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가 그들을 치료해 주셔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일거에 거절하고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서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1:38)라고 말씀하셨다. 매정해 보인다. 왜 환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거부해 버리셨을까? 어제의 피로가 쌓여 오늘은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하기 때문일까? 너무 버거우신 것일까? 자신이 없으셨던 것일까? 오늘은 기분이 내키지 않으셨던 것일까? 사람들을 계속 받아주니까 한계를 모르는 것 같아서 선을 긋는 것일까? 왜 예수님을 목 놓아 기다리는 그들을 외면하셨을까? 다른 마을에 가서 전도하면 마음이 편하실까? 이들이 눈에 밟히지 않을까?
예수님은 긍휼과 사랑이 넘친 분이시다. 군중을 살리기도 하고, 치료하기도 하시고, 귀신도 쫓아내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분이시지 군중의 필요를 따라 움직이는 분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어제 아무리 피곤하고 바빠도 새벽이 되면 늘 가던 장소로 가서 기도하셨다. 왜? 예수님은 기도 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로 교제하셨고, 기도 중에 다른 마을로 가서 전도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고, 이를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음을 다시 확인하셨다.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요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결론 - 주와 결을 같이하여 기도가 주가 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