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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는 몇 번을 보았어도 더 보고 싶다.
또 찾아서 보게 된다.
그래서 '명화'다.
내겐 '실미도'가 그런 명화 중 하나다.
지난 주에 한 번 더 보았다.
감동도 역시 그대로 였다.
10년 전인 2004년.
당시 대한민국의 극장가는 이 한 편의 영화로 인해 전대미문의 흥행과 성공을 기록했다.
파죽지세였고 놀라운 반응이었다.
그때 기록해 두었던 나의 영화후기.
10년 만에 그 노트를 펼쳐보았다.
또 하나의 작은 대화상자가 그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상자를 조심스레 열었다.
이런 내용이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영화 실미도.
대박이 터졌다.
그 영화를 보고 나는 며칠째 마음이 아파 남모르게 속앓이를 앓았다.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거렸다.
먹먹하고 애잔한 가슴을 홀로 쓸어내렸다.
밑바닥 인생들.
무기수, 사형수, 깡패 그리고 세상의 끄트머리, 그 막다른 골목을 서성이면서 갈 데까지 가버린 빈 들의 인간들.
서슬퍼런 '중앙정보부'(이하 중정)가 그들을 불러 모았다.
일명, '김일성 암살 특공대'였다.
늑대 같이 길러진 31명의 거친 사내들.
그때가 1968년 4월이었다.
상대의 절대 권력자를 제거하기 위해 먼저 선수를 친 건 북한이었다.
북한은, 1968년 1월 21일 매우 추운 겨울날,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강인하게 훈련된 특공대를 남파했다.
북한의 '124부대' 31명의 특공대원들은 3.8선을 넘어 단숨에 서울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청와대를 급습하기 직전에 정체가 발각되었다.
치열한 교전끝에 북한군 29명이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김신조'는 투항했으며 한 명은 살아서 북으로 넘어갔다.
그가 바로 '박재경'이었다.
훗날 그는 북한군 대장까지 지냈다.
'김신조 사건'이 있은 지 3개월 뒤 '중정'은 특별 지령을 내렸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다.
"우리도 김일성을 치자"
중정의 특별 지시로 비밀스럽게 창설된 특임대가 바로 '684 부대'였다.
일명 '실미도 부대'로 통했다.
'북한 124 부대' 사건 후 곧바로 중정이 기획하고 청와대의 재가를 받았다.
북한을 향해 동일한 피와 죽음을 겨냥했다.
그렇게 냉혹한 복수의 서막이 비밀리에 올랐다.
'김일성 제거 작전'이었다.
그 당시 국정의 요직을 장악했던 자들은 대부분 군대 출신들이었다.
뼛속까지 군인의 기질을 갖고 있던 자들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공군 예하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부대가 그렇게 창설되었다.
이 영화는 그 역사적인 史實을 바탕으로 짜임새 있고 탄탄하게 재구성된 밀리터리 블록버스터였다.
2003년 12월 24일에 개봉했다.
상영 2주만에 전국 관객 370만 명을 동원했다.
태풍급 대박이었다.
방화 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최단 기간의 최대 기록이었다.
역시 '강우석 감독'의 천재적인 영감과 치밀한 구성이 빛을 발했다.
중간 중간 가슴 뭉클한 감성터치가 숨가쁘게 이어졌고 강렬한 임팩트가 관객들의 허를 찔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야생에서 처절하게 조련된 숫컷들의 피와 눈물이 질펀하게 훌렀다.
그들만의 원초적인 땀이 뚝뚝뚝 내 심장 위로 떨어져 내렸다.
스크린에 투영된 강도 높은 훈련들, 척박한 환경속에서의 지옥 같은 삶, 병사들의 살기어린 눈빛과 거친 호흡들.
3년 간 거의 비슷한 훈련들로 이골이 났던 나는 군대시절 날것 그대로의 기억들이 아스라히 떠올라 더욱 울컥거렸다.
남 일 같지 않았다.
영화 시작부터 예기치 못한 '전율'과 '감정이입'이 곳곳에 매복되어 있었다.
각 길목마다, 각 장면마다 때론 놀라움과 처절함으로, 때론 분노와 서글픔으로 관객들의 감성이 사정없이 출렁거렸다.
놀라움, 생경함, 탄성, 아픔이 밀물과 썰물처럼 단박에 모두의 영혼을 훑고 지나갔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었던 서슬퍼런 정권의 홍위병, '중정'.
견제받지 않았던 막강 파워는 하늘을 찔렀다.
독재정권을 유지하고, 백성 위에 군림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정이 남북 화해무드가 조성되자 일거에 손바닥을 뒤집었다.
차마 글로 쓰기에도 역겨운 철면피들의 오리발이었다.
"실미도 부대를 해체하라"
파렴치하고 몰상식한 중정의 명령은 비정하고 단호했다.
통치자 한 사람에 대한 아부와 복종만이 최고의 가치였다.
그랬던 그들에게 '인권'이나 '양심'은 애시당초 개뼉따귀 같은 노이즈나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부귀영화'와 '정권보위'만이 유일한 가치요 신봉하는 매뉴얼이었다.
그들에게 '위민'과 '애족'이란 개념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6-70년대 위정자들의 머릿속에도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의 복리와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자리잡기 전, 권력자들의 무모함과 무도함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용도폐기된 684부대, 비밀리에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과연 이것이 국가가 내린 결정이란 말인가?
나의 가슴이 시시각각 조여들었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답답하고 애통했다.
80년대 중반.
혹독한 부대에 자원입대하여 치열하게 군생활을 했던 나는, 체험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실미도 대원들'을 이백프로 삼백프로 이해하고 있었다.
'동병상련'이었다.
중정의 그런 저열한 처사는 곧바로 내 심장을 도려내는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억울했다.
죽음보다 더 뼈아픈 질식이었다.
원래 사람은 '슬픔의 크기'보다 '절망의 깊이' 때문에 죽는 법인데 바로 내 체험적 느낌과 아픔이 실미도 대원들의 절규에 오버랩되면서 그랬다.
"김일성의 목을 따오라"
이 하나의 미션으로 3년 4개월 간 지옥 같은 세월을 견뎌왔던 386부대 대원들.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하루 아침에 자신들이 '제거와 살육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았을 때 대원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그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룩한 분노가 바위를 뚫었고 그 노도는 강력한 폭발로 이어졌다.
잔인한 운명이었다.
'실미도 부대'는 맨 처음 31명으로 출발했으나 처절하고 혹독한 훈련 중 7명이 죽어 나갔다.
'살인병기'로 단금질된 24명은 그들을 감독하며 훈육했던 기간병 18명을 사살하고 부대를 접수했다.
기간병 몇 명은 재래식 화장실의 똥통에 뛰어들어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설마 설마 악취가 진동하고 더러운 똥통 속으로 피신할 자가 있을까 싶겠지만 목숨은 모든 것에 우선했다.
고도로 훈련된 실미도 대원들이 그들을 감시하며 핍박했던 기간병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죽은 시체 하나 하나까지 확인사살을 해대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그까짓 똥통이 무슨 상관이랴.
살고 싶었다.
아니 살아야 했다.
몇 명은 극적으로 생존했고 나머지는 모두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렇게 부대 곳곳엔 사살된 기간병들의 선혈이 낭자했다.
완전한 피바다였다.
권력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던 이들.
존재의 증거마저 무참하게 삭제당했던 실미도 대원들.
그들은 스스로의 뜨거운 핏물로써 이 개같은 세상에 진실과 실상을 알리고 싶었다.
북파공작원들의 총구는 끝내 정권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가자, 청와대로"
섬을 탈출했다.
버스를 2번씩이나 탈취해 서울의 심장부로 향했다.
지금의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국가가 대기시켰던 대항군과 치열하게 교전했다.
제 아무리 '특임대'라도 어쩔 수 없었다.
'중과부적'이었다.
대원들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들이 받았던 개같은 인권유린의 실상과 독재정권의 압제와 폭거로 찍소리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지옥을 경험해야만 했던
'실미도 부대'의 존재를 어떤 방법으로든 세상에 까발리고 싶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죽음보다 더 거룩한 분노일 터였고 피를 토하는 최후의 외침일 터였다.
자신들이 몰상당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결단코 물러설 수 없었다.
죽음 너머의 자신들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목숨 건 항거였다.
그들이 선택한 최후의 수단은 '자폭'이었다.
각자가 소지하고 있던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그리고 그 위로 각자의 몸을 던졌다.
참혹한 '산화'였다.
그렇게나마 자신들을 '무장공비'라고 호도하며 백성들의 눈과 귀를 철저하게 가리려했던, 피도 눈물도 없었던 냉혈한 같은 이 독재정권에 경종을 울려주고 싶었다.
국가가 일방적으로 하달한 미션 때문에 몇 년 간 지옥 같은 개고생을 했던 대원들 중 20명은 그날 그곳에서 뜨거운 핏물을 쏟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졌다.
'무장공비의 침투'와 '격렬한 시가전'이란 기삿거리에 묻힌 채로 말이다.
부상을 입고 체포된 4명도 곧바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세상에 하소연 한 마디 남기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이 물린 채 통한의 눈물을 쏟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극장문을 나서며 나는 소리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게 국가냐?"
"과연 국가란 무엇이란 말인가"
몇 날이 가고, 몇 달이 흘렀어도 그 질문은 좀처럼 사그라들지도 가시지도 않은 채 계속 내 뇌리 속을 맴돌고 있었다.
참혹했던 그들의 삶과 처절하게 유린당한 인권,
깡그리 지워져 버린 그들의 존재와 증거들,
국가가 폐기하고 묻어 버린 실미도 부대 사건의 진상들,
막히고 가려진 백성들의 눈과 귀,
봉합하고 결박해 버린 관계자들의 입과 손발,
33년이란 긴 세월을 돌고 돌아 스크린을 통해 이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드디어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런 뒤로도 '국정원'은 여전히 벙어리와 귀머거리 역할에 극도로 충실하고 있다.
역겹다.
아직도 숱한 왜곡과 거짓으로 얼룩져 있는 한국의 근,현대사.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이장폐천'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 아니던가.
세상사는 언제나 '사필귀정'이니까 말이다.
진실과 정의만이 역사의 채로 걸러져 올곧게 기록될 것이며 계승될 것을 믿는다.
"684 부대원들이여."
"너무 억울해 저승에도 가지 못하고 외롭게 영천을 떠돌고 있을 혼령들이여, 이제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셨습니까?
이 영화는 당신들을 위한 위대한 '위령제'였습니다.
예술로 승화된 이 뜻깊은 진혼곡은 33년이 흐른 지금, '실미도'란 이름으로 역사 앞에 다시 섰습니다.
당신들을 추모하고 은폐되었던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평가하고자 하는 수백만 명의 간절한 염원과 열망이 보이십니까?
방화 사상 전인미답, 관객 1000만명 시대의 서막을 열어가고 있는 뜨거운 열기는 바로 그런 소망과 애틋한 비원의 발로입니다.
이젠 저승에서 편히 쉬소서.
더욱 살기 좋고,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 일.
바로 우리 후세들의 몫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정진하겠습니다."
강인찬(설경구 분) 대원을 비롯한 여러 부대원들께 빛바랜 어머니의 흑백사진을 되돌려 드리고 싶다.
무참하게 찢겨졌던 어머니 사진 만큼이나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졌던 암울한 시대의 모습이 아니라 늘 포근하고 아름다웠던
어머니처럼 반듯하고 따듯한 우리 조국의 모습을 '실미도 대원들'께 보여드리고 싶다.
그 소망 하나 뿐이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과 역할을 절대로 잊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새벽마다 늘 깨어 기도하며 살고 있다.
"실미도 대원들이여. 부디 편안한 영생을 누리소서"
"당신들께 진심어린 용서를 구하는 심정으로, 제 마음을 담아 거수경례를 올립니다."
"필~~승"
2004년 봄 어느 날.
부끄러운 역사 앞에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쓴 '영화 실미도' 후기 초고를 간직하고 있다가,
2014년 6월 13일 심야에 이 영화를 재 감상하고, 14일 새벽에 재필하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 당시 청와대 뒷산에서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
소나무 한 그루에 무려 15군데 총탄이 박힐 정도였다.
숱한 풍상 속에서도 지금까지 건강한 생육으로 역사의 실증을 대변해 주고 있는 꼿꼿한 소나무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2014년 6월 14일,
중학교 동창생들과 '서울 성곽길'을 트레킹하다 이 사진을 찍었다.
마침 그날 새벽에 '영화 실미도'의 후기를 기록해 둔 채 친구들을 만나러 갔던 거였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성곽길을 따라 걷던 중에 이 소나무를 만났으니 나의 감동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소나무 앞에서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약간의 설명을 들려주었다.
북한의 '124부대'와 남한의 '684부대'.
그 아픈 역사와 같은 민족끼리의 相殘에 대한 단상이었다.
친구들도 깊게 공감했고 나의 설명이 끝나자 박수를 보내주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기를, 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기도했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고 역사의 아픈 흔적과 교훈만이 이 소나무와 함께 '서울 성곽길'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