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모습
조 동 란
요새는 어머니라는 호칭은 시어머니나 장모에게 쓰고 대개는 엄마라고 한다.
엄마라고 하다가 나이 들면 어머니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릴 때는 누구나 엄마라고 부른다. 우리 집에서는 언니 오빠가 어머니라고 불렀기 때문에 나도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라고 했지만, 친구들처럼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다. 한 번도 엄마 소리를 못 해서, 그렇게 부르면서 응석을 부려보고 싶었지만 끝내 그래 보지 못했다. 그 점이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어머니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앞치마를 두르고 가족을 위해서 음식을 만드는 모습이 아닐까 싶은데,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안경 쓰고 책을 읽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되는 어머니 모습이 자랑스럽다.
나의 어머니는 평안감사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외할아버지 장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해서 서당에도 안 나갔지만 어깨너머로 글을 깨쳐서, 외할아버지는 재주가 아깝다고 학교에 보내셨다고 한다. 어찌나 책을 좋아했는지 삼국지를 아홉 번을 읽었고 끝내는 안질이 생겨 외할아버지는 책을 감추기까지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 있는 책은 안 읽은 것이 없었다. 우리가 사다 놓고 미처 못 읽으면 먼저 읽었다. 우리가 책 이야기를 하다가 미처 주인공이나 작가가 생각나지 않으면 가르쳐 주실 정도였다. 한 번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얘기를 하다가 작가가 생각나지 않았는데 작가 마가렛 미첼,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며 렛드 버틀러, 스토리를 줄줄이 꿰셔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연세 드신 뒤 주로 읽은 책은 성경이었다. 오빠가 병원에 입원해서 병간호하러 갔을 때도 환자가 아픈지는 잘 살피지도 않고 성경만 읽었다는 후일담을 들었을 정도이다.
그렇게 독서량이 풍부해서인지 박학다식해서 동서양을 넘나드는 산 지식은 따를 자식들이 없었다. 우리는 '어머니가 조금만 더 공부했더라면 정말 큰 인물이 되었을 텐데' 하고 늘 어머니 재능을 아까워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이걸 아셨을 텐데 이제는 여쭈어볼 분이 안 계시는구나'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사람은 무엇이든 다 잘할 수는 없는 법이라 앞치마보다 책을 더 즐겨 잡은 어머니는 음식은 잘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라고 시집올 때도 찬모에 침모까지 함께 올 정도였으니 음식을 직접 할 기회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바뀌어 모든 살림을 직접 하게 되었을 때는 큰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큰 언니가 들려주는 일화는 어머니의 이런 면을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언니가 시집간 뒤 한 번은 떡 먹으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쌀만 담가 놓은 채였고 결국은 언니가 떡을 해서 먹었다는 얘기. 그 후로는 뭐 먹으러 오라고 하면 그게 '네가 와서 해 먹자' 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보고 배운다고, 이런 어머니 모습이 우리 여덟 남매에게 영향을 미쳐서 누구나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되어 일생 큰 힘이 되었다. 특히 팔 남매 막내인 나는 언니·오빠들이 읽던 책이 서가에 그득한 것을 수준도 맞지 않으면서 어렸을 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어 잡학박사가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했는데…. 음식을 잘 못 하고 집안 살림을 두려워하는 것까지는 안 닮아도 좋을 텐데 외모부터 그런 것까지 내가 어머니를 제일 많이 닮았다고 한다.
물론 딸은 어머니를 많이 닮는다지만, 며칠 전 머리 손질을 하고 거울을 보다가 거울 속에서 어머니가 빙그레 웃고 계셔서 깜짝 놀랐다. 어머니를 제일 많이 닮았으니.
그리운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다 보니, ‘어머니 모습은 자녀의 미래다.’라고 하는데, 훗날 나의 아이는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게 될까 궁금해진다.
- 조동란 수필가
수필춘추 신인문학상 등단, 한국문인협회, 선농문학회, 강릉사랑문인회, 창작수필문학회 회원
서울대학교 간호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보건학박사,
前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교수
現 금아피천득선생기념사업회 이사
* 행간을 뗀 것은 인터넷상에서 눈의 피로를 덜기 위함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