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없으니, 제 뜻은 당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아버지, 당신 아들이 스스로를 고통받게 할 수 있다고 믿다니,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그가 스스로를 단죄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해방을 위한 확실한 방법 없이 버려질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당신께서는 저를 사랑하십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고적하게 버려두시고, 고통스럽고 잔인한 세상에서 죽도록 하실 수 없습니다.
어떻게 참사랑이 스스로를 떠났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참사랑의 참뜻 외에 다른 뜻은 없습니다.
두려움은 꿈이며, 당신의 참뜻과 갈등할 수 있는 어떤 뜻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갈등은 잠듦이며, 평화는 깨어남입니다.
죽음은 환상이며, 생명은 영원한 참진리입니다.
당신의 참뜻엔 반대가 없습니다.
아무런 갈등도 없으니, 제 뜻이 당신의 참뜻이기 때문입니다.
2.
용서는 신의 참뜻은 하나이며, 우리는 그것을 공유함을 보여준다.
신의 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오늘 용서가 보여주는 거룩한 모습을 바라보자.
아멘!
...
[예수의 추가 설명]
갈등은 그대가 신과 논쟁하는 것이다.
논쟁이 갈등의 핵심이다.
갈등은 세상에 대한 그대의 판단으로서, “지금 내가 보는 대로, 혹은 듣는 대로의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허락했다.
그것은 일어나고 있으며, 거기에 있다.
지금 있는 것을 수용함은,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는 아주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에고는 어느 것도 용서하고자 원치 않는다.
에고는 판단을 거두려 하지 않으니, 분리의 세상을 유지하는 것은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판단이 분리의 세상을 유지한다.
그대가 생각하기에 악하거나, 잔인하거나, 끔찍한 것을 보더라도, 그런 것을 판단하는 바로 그 판단이 그것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재난을 보거나 어떤 부정적인 것을 볼 때, 용서한다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다시는 이런 일을 보고 싶지 않다.
이런 일을 판단하는 것은, 그것을 살아있게 유지하는 것이므로 이 일을 용서하겠다.”
그렇다고 유쾌하지 않은 것을 용인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오늘 그대가 정말로 이해해야 할 아주 중요한 것이다.
오히려 불쾌함을 용서함으로써 사라지게 하는 것이니, 다시는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분리의 세상을 살아있게 유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과 고통이 아니라면, 무엇이 분리의 세상인가?
그러므로 무엇이 보이든 용서하라.
그 용서 안에서 그대는 전쟁터 위로 올라가는 것이며, 분리를 종식시키는 것임을 알라.
...
[알렌의 설명]
최근에 어떤 스터디 그룹에서, 저는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우리 자신이 끔찍한 사람이라고 실제로 믿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 모임의 어떤 남자가, 기적수업의 내용이 우리의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현했습니다.
“저는 술집에 가서 강도짓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환상이고, 환상 속에서가 아니라면 누구도 다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어떤 행위도, 신과 저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은, 오직 당신이 세상이 실재라고 생각할 때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세상이 환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을 것이며, 또한 그런 일을 할 욕구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면, 자기가 끔찍한 일들을 할 지도 모른다고 두려워 한다는 사실은 그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과 어긋납니다.
기적수업은 우리가 자신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바로 선(善)임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혼란 상태에 있고 환상에 마음을 빼앗기고는 있지만, 우리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죄책감의 압박을 내려놓아도 안전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신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괴물을 억제하기 위해 죄책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적수업은 죄책감에는 아무런 기능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실 죄책감은 우리가 죄 있다는 환상에 우리를 묶어둡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런 환상은 근본적인 오류입니다.
수업은 이어서 자아가 신의 왕좌를 찬탈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이 거룩하게 창조하신 그분의 아들의 가치를 평가하려 하지 마라.
그것은, 그의 아버지를 평가하고 그분을 거스르는 판단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너는 반드시 이 세상이나 천국의 어느 누구도 저지를 수 없는, 이 상상 속의 범죄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신의 영은 다만, 신의 왕좌에 자기를 앉힌 죄는 죄책감의 근원이 아니라고 가르칠 뿐이다."
그것은 단지 “사소한 실수”입니다.
사랑은 그 자신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랑으로서의 신의 본성을 공유합니다.
나는 신을 떠날 수 없으며, 신은 나를 떠나실 수 없습니다.
내가 실제로 신의 뜻을 반대하고, 나 자신을 타락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겉보기의 타락이나, 나와 신 사이의 갈등은 환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잠들었으며 불가능한 것을 꿈꾸고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실재를 아는 것은 에고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에고를 간과하기 위해서는 먼저 에고를 봐야 합니다.
에고는 은밀한 방식으로 비밀스럽게 작동합니다.
에고는 온갖 종류의 위장 뒤에 숨습니다.
우리는 에고의 정체를 드러내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간과하고 무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상해 낸 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 우리는 두려움의 조종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위치에 가야 합니다.
“와! 이건 단지 에고일 뿐이야.
이건 단지 내가 분리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에고를 보내 버립니다.
"네가 움츠리지 않고 마침내 에고의 토대를 볼 때,
너는 우리의 토대 또한 보게 될 것이다."
움츠리지 말고, 두려워 말고, 우리의 에고를 직시합시다.
그리고 에고는 단지 “사소한 실수”임을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