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9.연중 제2주간 화요일 강론>
<마르2,23-28>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디즈니랜드에는 카스토디알(Custodial)이라고 하는 청소 스태프가 600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각자 맡은 구역을 15분 간격으로 돌면서 깨끗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꿈의 세계에 쓰레기는 없습니다. 쓰레기로부터는 쓰레기 파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정리하는 습관 역시 필요합니다. “공간과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정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스페이스 클리어링(Space-Clearing)’ 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에너지 충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삶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은 나날이 커집니다. 이런 시대에 내면의 ‘스페이스 클리어링’ 은 진정 필요한 기술입니다.
어떤 기준으로 해야할까요?
오늘 복음의 핵심은 그것을 잘 이야기해줍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2,27-28)
우리의 삶의 모든 분란은 사람이 중심이 안 되고, 사람의 아들이 주인이 안 되어서 생기는 일입니다.
율법중심에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7,1) 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7,5)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인간이 어떤 규칙과 규정에 매여 살면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규정과 규칙을 붙잡고 살면 살수록 의식적으로 인간의 힘으로 무엇을 지키겠다는 것인데, 무의식적으로는 반대급부에 시달려 그것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의식은 10이고, 무의식은 90이라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중심에서 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인식하게 됩니다.
거부반응이 올라오는 것은 내 무의식 안에 그 사람의 부정적인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처럼 실행하지 않지만 억누르고 있는 센서가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내 자신의 단점과 부족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부족한 모습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모습은 예수님 보시기에 위선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5,44).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2,28)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 제도에까지 당신의 권위가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하십니다. 그분 행동의 원칙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십계명과 규정 규칙 대신에 예수님을 모시면 됩니다.
<Mark2,23-28>
23 As he was passing through a field of grain on the sabbath, his disciples began to make a path while picking the heads of grain
24 At this the Pharisees said to him, "Look, why are they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25 He said to them, "Have you never read what David did when he was in need and he and his companions were hungry?
26 How he went into the house of God when Abiathar was high priest and ate the bread of offering that only the priests could lawfully eat, and shared it with his companions?"
27 Then he said to them, "The sabbath was made for man, not man for the sabbath.
28 That is why the Son of Man is lord even of the sabb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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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영혼의 청소
자아의 영혼을 충전시키기에 앞서 먼저 영혼을 청소하는 것이 순서다.
80년대, 연간 60만 건 이상의 범죄 사건이 일어났던 뉴욕 시에서 90년대에 급속히 범죄 건수가 격감했다.
신임 교통국 국장 데이빗 칸은 지하철 역사와 주변의 낙서를 지우고 청소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자 지하철의 범죄 사건이 75%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환경이 흐트러지게 되면 기운이 흐트러지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공명(共鳴)이 되어서 흐트러진 행동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는 것을 신임 교통국 국장은 간파한 것이다.
디즈니랜드도 그것을 간파했다.
디즈니랜드에는 카스토디알(Custodial)이라고 하는 청소 스태프가 600명이나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각자 맡은 구역을 15분 간격으로 돌면서 깨끗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꿈의 세계에 쓰레기는 없다. 쓰레기로부터는 쓰레기 파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정리하는 습관 역시 필요하다. “공간과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정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스페이스 클리어링(Space-Clearing)’ 이란 말이 있다. 이는 에너지 충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삶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은 나날이 커진다. 이런 시대에 내면의 ‘스페이스 클리어링’ 은 진정 필요한 기술이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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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나의 신앙은 교회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아무도 혼자서는 살 수 없듯이, 아무도 혼자서는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이고,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뤄 신앙생활을 합니다.[166-169, 181]
신앙은 개인의 가장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만의 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믿고자 하는 사람은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유하고 전파할 수 없는 신앙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 각 개인은 “우리는 믿나이다” 라는 교회의 신앙 고백에 자발적으로 동의합니다. 신자들은 교회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교회는 2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신앙을 신자 각 개인에게 전해 주고 신앙을 이단으로부터 보호하여 빛을 발하게 해 왔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공동의 신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 신앙의 불꽃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고 그들을 고무하듯이, 다른 사람들의 신앙이 나를 지탱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전례에서 “저는 믿나이다.”(크레도 Credo)로 시작하는 사도 신경과, 본래 “저희는 믿나이다.”(크레디무스 Credimus)로 시작했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모두 사용함으로써 믿음의 주체인 ‘나’와 ‘우리’를 강조합니다.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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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절 저희는 믿나이다
->166 신앙은 인격적인 행위이다. 곧, 먼저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게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다. 그러나 신앙은 고립된 행위가 아니다. 누구도 홀로 믿거나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구도 스스로에게 생명을 줄 수 없듯이 스스로에게 신앙을 줄 수 없다. 신앙인은 다른 이로부터 신앙을 받으며, 그 받은 신앙을 또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예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신앙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우리를 재촉한다. 각 신앙인은 마치 신앙인들이 이루는 커다란 사슬의 고리 하나하나와 같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으며, 또한 나의 신앙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지탱하는 데 이바지한다.
->167 “저는 믿나이다”(사도 신경: DS 30) 이는 주로 세례 때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교회의 신앙이다. “저희는 믿나이다.”(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그리스어 원본)). 이는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이, 더 일반적으로는 신자들의 전례 모임이 고백하는 교회의 신앙이다. “저는 믿나이다.”. 이는 교회가 자신의 신앙으로 하느님게께 응답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저는 믿나이다.”, “저희는 믿나이다” 하고 말하도록 가르치는 것 또한 우리 어머니인 교회이다.
I.”주님, 당신 교회의 믿음을 보십시오.”
->168 교회가 먼저 믿고, 이로써 나에게 그 신앙을 전해 주고, 키워 주고, 지탱해 준다. 어디에서나 먼저 주님을 고백하는 것은 교회이며(“땅에서는 어디서나 거룩한 교회가 당신을 찬미-고백-하나이다” 하고(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6)/
우리는 사은 찬미가(謝恩讚美歌) 에서 노래한다),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우리는 “저는 믿나이다.”, “저희는 믿나이다.” 라고 고백하도록 인도된다. 우리가 세례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과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교회를 통해서이다. ‘로마 예식서’ 에서 세례 집전 사제가 예비신자에게 “당신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하고 물으면 그는 “신앙을 청합니다.”(‘어른 입교 예식서’, 75, 표준판(바티칸1972), 24면; 같은 책, 247, 91면) 하고 응답한다.
->169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온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생명을 교회를 통하여 받게 되므로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교회를 새로운 생명의 어머니로 믿는 것이지, 교회를 우리 구원의 창시자로 믿지는 않는다.”(리에즈의 파우스투스, ‘성령론’, 1, 2: CSEL 21, 104(1, 1: PL 62, 11))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므로 또한 우리 신앙의 스승이기도 하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7)/
‘믿는다는 것’은 교회의 행위이다. 교회의 신앙은 우리보다 앞서가며, 우리의 신앙을 낳고, 지탱하고, 기른다. 교회는 모든 신자의 어머니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을 수 없다.”(성 치프리아노, ‘가톨릭 교회의 일치’, 6: CCL 3, 253(PL 4, 519))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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