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아시는지?
독도는 널리 알릴수록 한국이 손해란것.
이미 한국이 실효지배 중이고 국제법상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일본이 건드릴 수 없음.
日本에 유일한 방법이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가서 日本꺼라란 판결을 받는 방법뿐이지만,
양국이 동의해야 국제사법재판소 제소가 가능하기 때문에 日本이 아무리 발악해도 韓國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왜 이제까지 정부들이 무대응을 원칙으로 했냐면, 괜히 도발에 걸려 맞장구 치는 순간 독도가 국가간의 영토분쟁지역이 되는 것이다.
하두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국제적으로 광고질 열심히 한 덕분에, 외국인들은 독도가 한국땅이 아니라,
한국-일본 영토분쟁지역이란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
전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미국 영국의 섬이 뭐가 있는지 알고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과거 영국-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전쟁에서 그 땅이 누구땅이 되건 신경쓰는 한국인이 얼마나 있었나?
외국인들도 독도를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일텐데. 알기싫고 알아도 누구 땅이건 신경안쓴다는 것이다.
뉴욕 전광판에 광고하고 독도 티셔츠 입고 해외여행 하는 사람들은 애국심이라 하겠지만,
그냥 기업마케팅활동, 연예인으로서 인지도 상승, 애국마케팅으로 돈벌어 보려는 사람들이란것.
정말 국익을 위해서라면 그러면 안되는 것이니 . 이제 그만 좀 하고 그만 좀 휘둘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올바른 대응이란 그냥 왜구들 발악하면 정부 및 외교부 차원에서 성명서 하나 정도만 내면 되는 것이다.
자꾸 민간에서도 선넘으면 안되는 것이며~ 뉴욕에서 전광판 광고질 한것도 한국 외교부가 제발 내려달라고 간청했었다.
개념없는 이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쪽은 원래 친일 라인이니까 무지한 국민들 관심을 끌고 분란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터넷 게시판 따위에 자극적인 내용의 글을 올리거나 악의적인 행동을 하는것도
일본에 실질적 이득도 가져다 주는 그쪽 정당의 정체성에 맞는 일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최근 민주당이 독도관련 법안을 만들려 하는데, 이것도 사실 국민 선동질이라 본다.
새로운 법을 만드니 안만드니 하는데 독도는 이미 법적으로 한국영토인데
거기에 뭔가 더 붙이고 빼고 할 대상이 아니다.
가장 경계해야할 건, 독도는 우리땅이 당연하고 명백하니 왜구들 더이상 설치지 못하게 국제사법재판소 당당하게 갑시다~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진정한 이완용이고 매국노 인것이다.
아니 그럼 우리아이가 독도도 모르고 자라도 되나?
그냥 한반도 최북단 백령도, 최남단 마라도, 최동단? 독도. 그정도로 알고 있으면 족하다 본다.
제주도는 한국땅~ 노래하고 광고할 필요가 있나?
누군가 제주도는 중국땅이야~ 일본땅이야~ 이러면 뭐라 얘기할 것인가?
갑자기 옆집아저씨가 너는 내아들이라 하면, 나는 울엄마아빠 아들이라고 노래하고 티셔츠 입고 전단지 뿌리고 할 것인가?
만약 그렇게 티내고 다닌다면 다른 이웃이나 동네사람들(다른나라)이, ‘얘야~ 너 그러지말고 그냥 유전자검사(국제사법재판)라도 한번 받아봐라~’이러겠지.
결론은. 더 이상 휘둘리며 독도는 한국땅 하지말고 대마도는 한국땅~ 하는게 국익에 도움될것 같다.
실제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대마도가 한국땅이란걸 비벼볼 소지도 많음.
<독도의 역사>
우리는 언제부터 독도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독도는 신라시대(512년)에 울릉도 지역의 우산국이라는 나라에 소속된 섬이였다.
신라의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하면서 그 부속 섬인 독도가 ‘우산도’로 처음 불리게 된 것이다.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뜻의 ‘삼봉도’로 불리게 되었고, 1794년에 이르러서는 가지라는 뜻의 물개과 동물 강치가 살고 있는 뜻의 ‘가지도’로 명명되기도 했다.
1900년에 대한제국이 ‘칙령 41호’로 독도를 돌섬의 한자 표기인 ‘석도’라는 이름으로 부르다가, 1906년에 이르러 ‘독도’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 독도 지명의 변천 과정
▲ 한 눈에 보는 독도의 역사
▲ 세종실록지리지 (출처:외교부)
▲ 신증동국여지승람 (출처:외교부)
■ 독도를 지킨 역사 속 인물들
독도하면 신라의 이사부 장군처럼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조선시대 사람 안용복이다. 안용복은 조선 후기(1693년) 어부로 울릉도에서 고기잡이 하던 중 이 곳을 침입한 일본 어민을 꾸짖다가 일본으로 잡혀가게 되었다. 안용복은 일본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일본 관리들 앞에서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조하며 일본인들의 출어를 금지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고 ‘울릉도는 지리적으로 조선과 더 가깝기 때문에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일본측의 문서를 받고 돌아오게 되죠.
그러나 1696년에도 다시 울릉도와 독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일본 어부들이 활개를 치자 일본 오키섬으로 쳐들어가 그 곳 섬의 주인으로부터 다시는 울릉도와 독도에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안용복은 일본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해둔 큰 역할을 한 분으로 현재는 그 뜻을 기리고자 안용복 장군으로 추대되고 있다.
1945년, 일제로부터 갓 해방된 우리나라는 독도를 안전하게 지키고 보전하는 일에 신경 쓸 형편이 못 되었다.
패전국인 일본은 무장순시선 등을 이용해 계속해서 독도를 침범해 왔으며 심지어 독도에 일본 영토 푯말을 설치하기도 했다. 울릉도 주민들은 일본인의 불법 침범에 불안함을 느끼고 어업활동에도 막대한 지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에 1953년 울릉도에 거주하던 홍순칠은 울릉도에 살고 있던 6·25참전 용사 30명과 함께 독도를 수비하는 독도의용수비대를 창설하였다. 처음 의용수비대는 자비로 식량과 무기를 구입할 정도로 형편이 열악하였지만 독도를 지키고자하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극복해 나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독도를 지키고부터 우리 어민들은 안심하고 어로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까지 독도가 우리의 영토로 될 수 있었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홍순칠 대장(출처: 독도의용수비대 기념사업회)
▲ 용맹한 독도의용수비대원들(출처: 독도의용수비대기념사업회)
1696년 일본 관리가 독도에 침입한 일본 어선에 항의하기 위해 찾아온 조선 어부 안용복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한 문서. 울릉도(죽도·竹島)와 독도(송도·松島)가 강원도에 속해 있다고 쓰여 있다.
▲ 1696년 일본 관리가 독도에 침입한 일본 어선에 항의하기 위해 찾아온 조선 어부 안용복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한 문서. 울릉도(죽도·竹島)와 독도(송도·松島)가 강원도에 속해 있다고 쓰여 있어요.
대나무도 없는데 '竹島'라 부른 日… 영유권 억지 증거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홈페이지가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참가국 일본을 소개하면서 지도에서 '독도'를 '리앙쿠르 암초(Liancourt Rocks)'로 표기했다가 삭제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를 왜 '리앙쿠르'라고 표기하는 일이 생겨나는 것일까?
독도의 명칭과 그것이 지닌 함의에 대해 알아보겠다.
1847년에 독도가 '발견'됐다는 거짓말
1846년 10월, 프랑스의 한 포경선(고래잡이 배)이 머나먼 동해로 떠났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수많은 고래가 새겨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해는 예로부터 고래가 많이 사는 바다였다. 이 프랑스 포경선은 해가 바뀐 1847년 1월 동해 한복판을 지나던 중 바다 위에서 뭔가를 볼 수 있었다.
선장인 로페즈는 프랑스 해군성에 올린 항해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줄레(울릉도)가 북동(北東) 2분의 1 북(北) 방향으로 바라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이 암석은 어떤 지도와 책자에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들이 암석(암초)으로 봤던 이 섬이 다름 아닌 독도였고, 이 포경선의 이름은 리앙쿠르호였습니다. 1851년 '프랑스 수로지'는 이 섬의 이름을 '리앙쿠르 암초'라고 공식 표기했다.
섬을 '발견'한 배의 이름을 이 섬에 붙였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서기 6세기 이전부터 울릉도(무릉도)와 독도(우산도)는 우산국이라는 옛 나라를 구성하는 섬('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이었고, 512년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뒤로 독도는 줄곧 한국 영토였기 때문이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울릉도에 사는 사람들이 육안(肉眼)으로 뻔히 볼 수 있는 이 섬을 프랑스 배가 '발견'했다?
오래전부터 수많은 원주민이 정착해 살던 아메리카 대륙을 '1492년 콜럼버스가 발견했다'고 표현하는 서구인들의 오만함이 '리앙쿠르 암초'라는 말에도 깃들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리앙쿠르 암초'라는 말은 지금도 서양에서 독도를 일컫는 지명으로 흔히 쓰이고 있다.
이것은 자기들이 독도를 '발견'했다고 믿는 오만함에 더해, 한국과 일본의 분쟁 지역이라고 의식해서 중립적인 용어인 듯한 '리앙쿠르'라는 지명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이자 현재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독도를 서양 지명으로 표기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며 그들에게 대한민국 공식 지명인 '독도(Dokdo)'라고 표기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지명 '다케시마(竹島)', 日의 엉터리 주장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를 일본이 자기들 마음대로 부르는 지명은 '다케시마(竹島)'이다.
우리 발음으로는 '죽도', 즉 '대나무 섬'이라는 뜻이 되다. 하지만 정작 독도에는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부르는 걸까?
서기 512년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이후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신라·고려·조선의 영토였다.
그런데 1417년(태종 17년), 조선 조정은 세금 걷는 일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먼 섬의 백성들을 뭍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작했다.
이것을 해금(海禁) 정책이라고도 한다. 울릉도·독도는 조선 영토지만 공식적으로는 조선 백성이 거주할 수 없는 지역이 된 것이다.
이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17세기부터 일본인들이 어업을 위해 국경을 넘어 울릉도와 독도까지 오는 일이 생겼습다. 이때 일본 측에서는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라고 불렀다.
마쓰시마는 우리 발음으로는 '송도'가 되다. 섬의 특징을 지명으로 표현했다기보다는, 일본어에서 순서나 등급을 표시할 때 쓰는 말인 '송(松)' '죽(竹)' '매(梅)'가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독도를 1호 섬(송도), 울릉도를 2호 섬(죽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1693년(숙종 19년) 조선 어부 안용복이 일본으로 납치된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울릉도·독도를 둘러싼 국경 분쟁이 생겨났다. 이것은 1696년 1월 일본 측이 '다케시마 도해 금지령'을 내려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뒤로 200년 가까이 일본인은 공식적으로 울릉도·독도로 건너갈 수 없었는데, 이 기간에 울릉도와 독도를 부르는 지명이 뒤바뀌었다. 일본에 체류했던 네덜란드인 폰 지볼트가 1840년 '일본과 그 주변도'라는 지도를 그렸는데, 울릉도를 '마쓰시마', 그 옆 섬을 '다카시마(다케시마의 오기로 추정)'로 표기했다.
이 영향으로 이후 일본에선 예전에 독도를 '마쓰시마'로 부르던 것을 잊어버리고 '다케시마'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대나무 없는 섬을 '대나무 섬'이라고 부르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이 '죽도'라고 부르는 섬은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있는 또 다른 섬이다.
1877년 日 국가기관 "독도는 우리와 무관"
예전 우리나라에서 독도를 부르는 명칭은 우산도(于山島)였다. 1454년(단종 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우산과 무릉(울릉도)이라는 두 섬이 울진현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했다. 이 명칭은 18세기까지도 유지됐다. 1770년(영조 46년) 왕명으로 편찬된 '동국문헌비고'는 "울릉도와 우산도는 우산국 땅"이라 기록한 뒤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마쓰시마)"라고 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 변화가 생겼다. 1883년(고종 20년) 조선 조정이 해금 정책을 폐기하고 주민들이 울릉도에 가서 살도록 '개척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무렵 울릉도에서 어업 활동을 하던 주민 중 호남 지방 남해안 출신이 많았는데, 독도를 '돌섬'이란 의미의 방언인 '독섬'으로 불렀다. '독섬'은 한자로 표기할 때 뜻을 취한 '석도(石島)' 또는 발음을 취한 '독도(獨島)'로 표기됐다.
1900년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에서 울도군(지금의 울릉군)의 행정 범위 안에 포함한 '석도'는 '독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칙령 제41호가 발표된 것은 일본이 1905년 내각회의에서 '다케시마(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기 5년 전의 일이었다. 이 결정은 1877년 일본 최고 국가 기관이었던 태정관이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는 지령을 자기 나라 내무성에 보냈던 사실을 완전히 뒤집은 행동이다.
결국 '리앙쿠르 암초'나 '다케시마' '죽도' 등 해외에서 부르는 독도의 다른 명칭은 우리가 써서는 안 되는 지명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