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머나먼 바다 건너 하염없이 님 그리다
꽃이 된 나의 사랑아
기다림은 청보랏빛 멍울 되어 눈물 가득 고였구나 내 님이여
천년이 흘러 그대를 보니 어이하리 어이하리
나의 사랑꽃이여
이제라도 만났으니 내 너를 품에 안고
시린 바람 내가 맞으리라
기다림은 향기 되어 내 온몸에 스며드니
내 사랑아 울지마라
천년이 또 흐른다 하여도 나 역시 꽃이 되어
그대 곁에 피어나리
- 김치경, <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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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을 준비하다가 해국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꽃말이 ‘기다림’이라지요? 바닷가 절벽 바위틈에서 해풍을 맞으며 꽃을 피우는 연보랏빛 해국. 아마 이맘때면 꽃을 피우는 끝자락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해국의 생장 과정을 보면 이 꽃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됩니다. 흙도 별로 없고 물도 부족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저리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지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꽃을 피우기까지 견뎌내야 했을 온갖 역경의 시간들이 꽃의 아름다움을 빚어냈는지도 모릅니다. 해국을 묵상하다 보니 해국과 우리가 기다리는 아기 예수님이 오버랩됩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바닷가 절벽의 바위틈은 절망과 비탄, 온갖 욕망과 폭력들이 난무하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우리네 세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생명을 꽃피우기에는 너무도 열악한 환경이지요.
그런 환경에서 해국은 꽃을 피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감탄과 축복 속에 인간이 태어났음에도 하나님의 숨결이 깃든 세상을 난도질한 인간의 배은망덕한 타락의 역사를 묵묵히 참아내신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결자해지(結者解之)하려 하셨던 것일까요? 세상을 암흑으로 만든 인간을 세상에 내신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내려 하셨던 것이었을까요? 도무지 욕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간을, 그 인간들이 짓밟아 놓은 세상을 구원하시려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로 인해 세상은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지우는 것은 안 될 일이지요. 인간들이야말로 결자해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망쳐 놓은 세상은 우리가 다시 되돌려놓아야 합니다.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과 더불어 인간의 응답에 달려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이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이 기다림의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저 시간이 흘러간다고 기다리는 건 아닙니다. 이 기다림은 의미를 낳아야 합니다. 하여 기다림은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대림절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일체의 잡념을 지우고 오직 주님의 마음의 바다를 유영하며 그 바닷속 깊은 곳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길어 올린 주님의 마음 한 자락을 붙잡고 생각하며 결단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 기다림의 시간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아기 예수님은 구원의 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주님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다 보면 언젠가 주님의 마음을 그득히 안고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겠지요. 그도 생명의 꽃으로 피어나겠지요.
김치국 시인의 <해국>을 음미해봅니다. 바다 건너 님을 그리워하다 그리워하다 꽃이 된 해국. 천년이란 시간이 흐를 만큼 긴 기다림 끝에 만난 님. 시린 바람 맞으며 그 님은 그를 품에 안고 그간 흘렸을 인고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를 위로합니다. 이토록 질긴 그리움을 견딘 자만이 사랑하는 님과 함께 꽃으로 피어나겠지요. 주님을 향한 우리의 그리움은 이런 간절함이 있는지 묻게 됩니다. 여전히 부끄러움뿐입니다. 이 기다림의 계절, 꽃을 피우기 위한 진실함과 간절함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빕니다. <2024.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