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cafe.naver.com/godnjf12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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Å日月眞人 明 선생님Ω
♧마지막 구세주(救世主) 황발(黃髮: 明 선생님)♧
【인천(仁川) 중앙동(中央洞) 자유공원 작은 정자 옆에 있는 큰 정자(大亭:석정루石汀樓) 黃宮 】
【 鄭道令 (明 선생님)은 1946년 병술년(丙戌年)(음력 12월 대한민국 수도 서울 용산(龍山)에서)
해월(海月) 황 여일(黃 汝一) 선생 후손(後孫)으로 재림(再臨)하셨다 】
『사계(沙溪) 이 영발(李英發)선생의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의 현판』
근차 해월헌운(謹次 海月軒韻)
추봉차 해월헌(追奉次 海月軒) 아계상공운( 鵝溪相公韻)
사계(沙溪) 이영발(李英發)선생
망망창해불생조 (茫茫蒼海不生潮) 교교은섬전벽료 (皎皎銀蟾轉碧寥) ***
옥우앙관천묘묘 (玉宇仰觀天渺渺) 영주요망낭초초 (瀛洲遙望浪迢迢) ***
개준흡사요지연 (開樽恰似瑤池宴) 취적혼여적벽소 (吹笛渾如赤壁簫) ***
취후빙란의일곡 (醉後憑欄欹一曲) 차신의재광한교 (此身疑在廣寒橋) ***
망망한 푸른 바다(蒼海)에 조수(潮水)가 일지 않으니 밝은 둥근 달이 푸른 융단에 앉아 있네
옥황상제 대궐(玉宇)을 쳐다보니 하늘은 끝이 없고 영주(瀛洲 ; 삼신산의 하나)를 바라보니 물결 멀리 아득하다
달에 비친 술 항아리를 여니 요지연(瑤池宴)과 흡사하고 흐느끼는 피리 소리 적벽강의 퉁소(赤壁簫)소리 아닌가
난간에 기대 앉아 한 곡조 불러 보니 이 몸 있는 곳이 신선의 궁정(廣寒橋)인가 하여라.
사계(沙溪) 이영발(李英發)선생
명문가에서 태어나 영동과 영서의 시회를 휩쓸다 |
사계당 이 영발선생은 1603년(선조 36)에 사동리 본가에서 태어났다. 사계당의 가계는 조선조 중기 이후 대를 이어 당상관 벼슬을 하는 명문가였다. 특히 그의 9대조인 효정공 이정간(孝靖公 李貞幹)의 둘째 아들 이사관(李士寬) 대에 와서 전의이씨 가문은 조선조의 명문반열에 뛰어오르며 전성기를 맞는다. 이사관(李士寬)은 고려 우왕 때 태어나서 한성판윤을 거쳐 영의정을 추증 받는다. 그는 7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 2남인 이지장(李智長)의 아들 이덕량(李德良)이 세조·예종·성종 대에 걸쳐 무관으로 급제하여 하동현감을 지냈다. 황보인과 단종복위를 꾀하다 이루지 못하고 여주에 은거한다. 3남인 예장(禮長)은 1432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수관의 5남인 이함장(李諴長)의 아들인 수남(壽南)은 17세에 진사시, 20세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전의이씨 문중에서 유일하게 배출된 대제학 이덕수(大提學 李德壽)도 이정간의 현 손이며, 당대의 뛰어난 명필가인 이제신(李濟臣)은 이정간의 6세손이다. 문의공(文義公)파에서는 그의 증손인 귀(龜)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탁(李鐸)과 우의정(右議政) 이상진(李尙眞))이 대표적이다.
명문가의 긍지를 갖고 태어난 이 영발선생은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영동과 영서의 시회에 참가하여 여러 번 장원을 차지하는 등 글재주를 발휘하였다. |
'충효전가'의 가훈을 실천하다 |
그러나 그는 과거급제에는 그다지 집착하지 않은 듯하다. 그의 묘갈명을 쓴 생원 남대만은 그의 이런 성격을 “일찍이 영서의 향내에 가서 일거에 장원을 하였는데, 곧바로 후회하기를 ‘관동이 험하기를 촉도의 구절양장보다 심하거늘 어떻게 부모의 유체를 조심하라는 옛사람들의 경고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하면서 다시는 과거의 뜻을 버리고 사동에 집을 짓고 사계정사라 현판했다.”고 기술했다.
이 영발선생의 품성은 외가와 본가를 모두 닮아 학문의 성취에 앞서 더 소중하게 여긴 것은 ‘충효(忠孝)의 실천’이었다. 이영발의 이 같은 품성은 효정공 정간이 효행으로 세종대왕의 친필을 받은 이래, 전 가문의 가훈으로 내려온 ‘충효전가’의 전통과 그의 외조부로부터 전가된 어머니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묘갈명을 쓴 남대년은 이 영발선생의 자세를 “평생의 목표는 충효 두 자이다.”라고 평했다. 이 영발선생은 해월 황 여일의 아들인 동명 황 중윤, 이 우당, 주 개신, 애월당 남 유주,와 교유하며 사계당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다. 특히 이 영발선생은 사제(師弟)와 혼반관계를 바탕으로 평해 지방과 울진지방의 학문적 교류를 연결하는 중심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문집은 1844년경에 그의 9세손인 수권(壽權)이 엮어 세상에 선을 보였다. 그의 문집은 시와 부(賦), 제문과 부록으로 편집하였다. 110편의 시와, 1편의 부, 1편의 제문을 싣고, 부록으로 묘갈명과 만사 등을 실었다. 그의 묘갈명은 후학인 생원 남대만(南大萬)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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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象村) 신흠(申欽)선생의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의 현판』
차청강운기제 황사군해월정(次淸江韻寄題 黃使君海月亭)
상촌(象村) 신 흠(申欽)선생의 해월헌(海月軒)에 대한 시(詩)
수지북두작동명(誰持北斗酌東溟) 공설군가해상정(共說君家海上亭) ***
응유란참과벽락(應有鸞驂過碧落) 계궁고처문선령(桂宮高處聞仙靈) ***
누가 북두칠성(北斗)을 손에 넣어 동해바다(東溟)를 잔(酌)질 하겠는가? 그대의 집 바다 위의 해월헌(海上亭)이라는 정자에서 함께 말했지,
난새(鸞)가 끄는 수레가 푸른 하늘을 지나가니, 달속의 궁전(桂宮)에 신선(仙)의 신령(靈)한 소리가 들리는구나.
이 글을 보면 상촌(象村) 신흠(申欽)선생은 해월(海月) 선생과 더불어, 해월(海月) 선생의 고향 바닷가가 있는, 해월헌(海月軒)에 올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누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손에 넣어서, 동해(東海) 바다를 잔질하겠는가? 하고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고, 상촌(象村) 신흠(申欽) 선생은 말하는 것이다.
상촌(象村) 신 흠(申欽(1566 ∼ 1628), 명종21∼인조6)선생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本貫)은 평산(平山), 자(字)는 경숙(敬叔), 호(號)는 현헌(玄軒), 상촌(象村), 방옹(放翁)이다.
1585(선조 18)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사헌부 감찰, 병조좌랑으로, 1599년 동부승지, 우부승지, 이조참의, 도승지, 병조판서, 예조판서, 경기감찰사를 역임하고, 1610년에는 예문관 대제학을, 1623년 인조 즉위년에 이조판서겸 예문관 홍문관의 대제학에 등용되었고,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에는 좌의정으로, 같은 해 9월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았으며, 이 정구(李廷龜), 장 유(張維), 이 식(李植) 등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저서(著書)로는 상촌집(象村集), 야언(野言) 등이 있으며 시호(諡號)는 문정공(文貞公)이다.
【上帝之子斗牛星 西洋結寃離去后 登高望遠察世間 二十世後今時當 東方出現結寃解】
【만사이황발(萬事已 黃髮 ) 잔생수백구(殘生隨 白鷗 )】
♧ 청림도사(靑林道士) 明(黃) 선생님 ♧
조선중기 대문장가인 해월(海月) 황 여일(黃 汝一) 선생의 시문이 들어있는 문집 목판본(7권14책)이 현재
고려대학교와 서초동 국립도서관에 있으며 필사본은 영남대학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도 또한 있음.
해월헌(海月軒) -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선생의 친필
한석봉(韓石峰)선생의 해월헌(海月軒)의 갈근필병풍(葛根筆屛風 : 무이구곡가)
해월종택(海月軒): 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으로 풍수학상 강릉 이남 최고의 명당(明堂)
경북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433 (해월헌길70번지)
봄을 노래하는 우리 가곡 27곡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