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343) /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 Athens; 1987)
아티카 주[Prefecture and Region of Attica]에 속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그곳의 기념물은 고전주의의 정신과 문명의 보편성을 상징하며, 고대 그리스가 세계에 남긴 가장 위대한 건축과 예술의 복합체로서 칭송받고 있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민주주의를 성립시키면서 고대의 도시 국가 사이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다. 그 뒤를 이어 아테네에 사상과 예술이 융성하자 탁월한 예술가들은 아테네의 위정자 페리클레스(Pericles)의 원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에 이르렀다. 조각가 페이디아스(Pheidias)는 뛰어난 영감을 발휘하여 이곳의 바위 언덕을 사상과 예술이 어우러진 독특한 기념물로 탈바꿈시켰다. 이 시기에 세워진 가장 중요한 기념물은 익티노스(Ictinus; Ikinos)가 세운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 신전, 므네시클레스(Mnesicles)가 설계한 기념 조각 형태의 아크로폴리스 신전 입구인 프로필라이온(Propylaea), 그리고 작은 규모의 아테나 니케(Athena Nike) 신전 등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건축이 자연의 현장에 적응된 최상의 표현물이다. 기원전 5세기에 건축된 일련의 완벽한 걸작들은 완벽하게 균형 잡힌 장엄한 구조물의 웅장한 구성을 지니고 있으며,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면서 기념비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기념물들은 지중해 세계에서 모범적인 모델로 간주되었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신화로부터 관습화된 숭배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 종교에 대해 정확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독특한 증언을 해 준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에 대한 전설이 생긴 신성한 신전으로서 1,000년 이상에 이르는 그리스 문명을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15세기의 왕궁과 최초의 요새인 펠라스기 성벽[Pelasgian walls]에서부터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가 서기 161년에 세운 음악당, 오데움(Odeum)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독특한 공공 기념물들이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된 공간 가운데 하나에 건설되고 보존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일리소스(Ilissos) 계곡에 있는 높이 156m의 바위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부지 면적이 3㏊가 채 안 되는 이곳은 기원전 제2천년기부터 왕궁과 제사 장소를 보호하기 위한 요새였다. 고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은 펠라스기의 성벽에 의해 보호되었다. 그 성벽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시작된 도리아 인의 아테네 침공 이전에 존재했다. 기원전 514년 제1대 참주인 히파르코스(Hipparchos)에 이어 기원전 510년에는 제2대 참주인 히피아스(Hippias)의 정권이 무너진 후 아크로폴리스는 재건축되었다. 저주를 받았다는 델포이(Delphi)의 신탁에 의해 펠라스기 성벽은 파괴되었다. 성벽의 보루가 없어지자 그 위쪽에 자리 잡은 도시는 약화되었으며, 기원전 480년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은 도시를 약탈하고 신전을 불태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기원전 480년 아크로폴리스가 약탈당한 것이 오히려 고대 그리스의 가장 훌륭한 조각 작품들을 보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성벽의 보루는 기원전 472~기원전 471년, 아테네와 그 외항인 피레우스를 둘러싼 ‘긴 성벽[Long Walls]’과 같은 시기에 파괴되었다. 기원전 5세기는 페리클레스와 더불어 아테네 민주주의가 절정에 이른 시기이다. 기원전 447~406년의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여러 건축물이 세워졌다.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주신전인 파르테논 신전, 피시스트라투스(Pisistratus) 성문을 대신해 고대 왕들의 성채에 이르는 입구 가운데 한 곳에 세워진 기념비적인 입구인 프로필라이온, 아테나 니케 신전,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 신전 등은 그리스 고전 예술의 4대 걸작이다. 끔찍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기원전 404년 4월 스파르타의 아테네 점령으로 ‘긴 성벽’이 파괴되었지만 아크로폴리스의 건축물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찬사를 받았던 기념물이 서 있는 아테네의 성스러운 언덕은 페르가몬(Pergamon)・카파도키아(Cappadocia)・이집트 등의 군주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Claudius)・하드리아누스(Hadrianus) 같은 로마의 황제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개인 교사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 같은 부유한 개인 등 당대의 권력자들에 의해 꾸준히 미화되었다. 아크로폴리스의 기념비적 유적을 손상시킨 최초의 사건은 267년에 있었던 헤룰리(Heruli) 족의 침공이다. 이후 오랫동안 비교적 평온했지만 유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손상을 입었다. 동로마 제국 사람들은 신전을 교회로 바꿨으며, 그곳에 있던 예술 작품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다. 1204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아테네는 유적에 대해 별로 무관심한 프랑크 왕국 제후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1456년 터키 인(오스만 제국)이 아테네를 점령하자 그곳은 모스크가 되었고,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종종 터키 총독의 후궁이 머무는 처소로 이용되곤 했다. 1687년에는 최악의 일이 벌어졌다. 모로시니(Morosini)의 베네치아 군대가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하자 터키 인의 화약고로 사용되던 파르테논 신전에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19세기에는 오스만 정부에 파견된 영국 왕의 대사인 엘진(Elgin) 경 토마스 브루스(Thomas Bruce; 1766~1841)가 술탄으로부터 공식적인 허락을 받고 신전의 대리석 부분을 가지고 감으로써 약탈은 끝났으며, 엘진이 가져간 유물은 1815년 이래 대영 박물관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1세기에 걸친 발굴과 현장의 개선 이후, 아크로폴리스는 이제 심각한 대기 오염의 영향을 받아 온 대리석 부분의 안전한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가장 혁신적인 야외 보존 기술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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