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의 클라이막스 부분이다. 경기 도중 부상을 입은 강백호가 출전을 만류하는 감독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감님에게 영광의 순간은 언제죠? 나는 지금입니다." 아아, 감동적이다. 그야말로 만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다. 아 잠깐, 정말 그런가?
얼마전 주중 경기를 하루 앞두고 스포츠 신문에서 이동국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왼발에 피로골절로 깁스를 해야할지도 모르며, 그럴 경우 13일 경기나 한일전은 출전이 힘들지도 모른다는 기사다. 깁스를 하느냐 마느냐는 성남전을 치룬 이후 정밀진단을 받고 결정한단다.
어, 왜 경기 이후에 진단을 받지? 선수단이 바빠서 그럴까? 그래도, 부상이 심각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진단을 받는게 좋지 않나? 하고 의아해 하다가, 하루 지나서 이동국이 90분을 풀출장한 것을 알고는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동국이 어려운 팀을 위해 선발을 자청하는 투혼을 발휘했단다. 이 감독은 뛰고 싶다면 부상중인 선수도 그냥 뛰게 하는 모양이다.
98년 네덜란드전에서의 인상적인 활약 이후, 이동국은 99년에 세계 청소년 대회, 2000년에는 시드니 올림픽과 아시안컵에 나섰다. 연령별 대회의 지역예선과 본선. 소속팀의 경기. 골드컵 등 중간중간의 대표팀 평가전...이러고서 2000년 시즌 끝나자, 브레멘에 임대된다. 분데스리가 시즌이 오프되자 이번에는 다시 포항에 복귀한다. 몸이 완전치 않은 상태에서, 대표팀과 소속팀을 오가다가 마침내는 월드컵 대표에서 제외되기까지. 이동국은 쉴 틈이 없었다. 이렇게 선수를 만신창이 만들어 놓고, 몸에 무리가 가서 뛰지 못하면 "게으르다"란다.
이천수도 마찬가지다. 부평고 시절부터 이미 주목을 받아온 터라 U-20 평가전, 지역예선, 시드니올림픽, 소속팀에서의 경기, 월드컵... 고질이 되어버린 어깨탈구는 수술한다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2-3달 푹 쉬면 큰일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나마, U-20에서 지역예선을 통과 못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또 있다. 시드니올림픽 때부터 박지성은 거의 쉬지를 못해왔다. 소속팀에서는 에이스였고, 히딩크에게 꾸준히 신뢰를 받아오면서 대표팀을 오갔다. 월드컵이 끝나자 바로 리그에 복귀했고, 무리한 일정으로 아시안게임에 합류했다. 시즌이 끝나고 조금 엄살을 부려도 좋으련만 떠나는 마당에 팀을 일왕배 우승에 올려놓느라 한번 더 무리를 하고, 곧바로 네덜란드 리그로 합류했다. 무리가 안 생기면 이상하다.
체력이 떨어져 있는 건 김남일도, 이영표도 마찬가지다. 송종국은 시합중에 입은 부상이긴 하지만. 부상은 항상 피로한 몸상태 때 오는 법이다. 그나마 설기현과 안정환은 월드컵 전에 소속팀에서 출장이 적었던 것이 오히려 덕을 보는 셈이다.
고등학교 시절 김병수가 오른발이 아파서 못 뛰겠어요, 하니까. 감독이 그럼 왼발로만 차라 했단다. 한국에서 테크니션 꼽으라면 세손가락 안에 들어갈 최문식이, "그 형 혼자만 다른 축구를 하는 것 같았어요" 했던 김병수는 그렇게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시들고 있었다. 2000년 골드컵 당시 공항 인터뷰에서 황선홍은 "너무 몸이 안 좋아서 반경기만 뛰었으면 한다" 고 했지만. 감독은 풀타임으로 출장시킨다. 이후 황선홍은 소속팀으로 복귀한 후 결국 어깨부상이 악화되고 만다.
96년 아틀랜타 올림픽시절, 가나전에서 부상을 입은 황선홍은 마지막 경기에서 감독에게 출전시켜달라고 애원했지만, 비쇼베츠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98년 월드컵 때에는 네덜란드전에 투입시키려고 진통제를 맞고 러닝을 시키다가 부상이 악화되서 결국은 마지막경기까지 결장하고 말았다. 월드컵이 끝나고 마음고생이 심했던 황선홍이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하면서 했던 인터뷰는 "이제 좀 즐기면서 축구를 하고 싶습니다." 였다.
자. 머리가 터져도 뛰고, 코뼈가 부러져도, 발목이 돌아가도 뛴다. "나는 지금입니다!"는 한국 축구에서는 만화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황선홍이 98년이나 2002년에 부상을 참아가며 뛰었던 것은 그렇다 치자.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팀을 위해서가 아니라. 황선홍 자신에게 그 경기가 그만큼 중요했다고 넘어가자. 그러나, 이동국에게 영광의 순간이 2000년 골드컵인가? 아니면 얼마전의 성남전인가? 박지성의 축구인생의 절정이 2002년 아시안게임 4강전인가? 이천수의 인생의 "바로 그" 순간이 모교의 라이벌전인가? 언제까지 눈앞의 승리를 위해 선수생명을 담보로 잡아두는 혹사를 시킬 것인가.
픽션에서는 감동적인 드라마가 현실로 넘어오면 잔혹해진다. 나는 또다시, "날개접힌 축구천재"를 보고 싶지 않다. 제2의 김병수도, 제2의 백승철도 보고 싶지 않다. 선수보호를 위해서는, 천하의 라울이라고 해도 벤치에 앉혀 놓는 것이다. 제발. "나에게 영광의 순간은 지금입니다." 따위의 감상주의는 만화의 몫으로 남겨놓자.
정말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무언가가 밀려오는 글입니다.. 강백호가 다시 나가고 그는 재활훈련을 받으며 슬램덩크는 끝이 났습니다. 다행이도 만화니까 우리에게 여운과 감동을 안겨주었지만.. 맞는 말씀이네요 그게 현실이었다면 강백호란 사람이 정말 존재했다면.. 제2의 김병수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첫댓글 절대 동감.
동감동감동감 또동감
정말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무언가가 밀려오는 글입니다.. 강백호가 다시 나가고 그는 재활훈련을 받으며 슬램덩크는 끝이 났습니다. 다행이도 만화니까 우리에게 여운과 감동을 안겨주었지만.. 맞는 말씀이네요 그게 현실이었다면 강백호란 사람이 정말 존재했다면.. 제2의 김병수가 될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