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숲
모임득
여름이 한창 익어갈 무렵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의식하지 않아도 생명이 넘치고
숲은 한층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푹푹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바람과 빗줄기 때문이 아닐는지. 포
도를 뜨겁게 달구는 태양 권태로운 도시의 색깔로 인해 여름이 짜증스럽기도 하겠지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바람이 불어와 씻겨 줄때의 청량감과 달구어진 산야를 식혀주는 한
줄기 빗방울이 있어 여름다운 맛을 느끼며 사는지도 모른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과 매일 눈길을 주고받으며 산다. 가끔 요란스럽게 제짝을 찾
아 노래하는 매미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울창한 숲길도 걷는다. 산림욕이니 피톤치드
를 들먹이지 않아도 좋다. 여름 숲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나뭇잎 사이사이로 조각난 하
늘이 초록의 잎새들과 모자이크 되어 바라다 보이고 햇빛은 부서져서 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떨어진다.
키 큰 나무와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조각의 햇빛을 받아 푸르게 자라나는 키 작은 풀
들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좋고, 초록빛 사이로 수줍게 피어 있는 여름 꽃을 보는 기쁨도
있다. 상큼한 향이 중후한 나무의 향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여름의 숲은 여리게 잎을 움트는 봄날의 숲처럼 신비롭지도 않고, 온갖 색채로 치장
한 가을의 숲처럼 황홀하지도 않고, 나목으로 흰눈을 소복이 맞고 있는 겨울의 숲처럼
깨끗하지는 않지만 초록빛이 주는 청량감이 있다. 그 짙은 녹음은 흐르는 땀방울을 시
원하게 하는 시각적인 서늘함도 있다.
한낮의 고요. 바쁜 일상생활 속에 잠시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숲의 고요도 초록빛으로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주는 여름 숲이다. 숲을 바라다보면 나무
를 잘 볼 수 없고 나무에 관심을 갖다 보면 숲을 제대로 감상할 없다고 누군가가 말
했듯이 살아오면서 어느 한곳에만 치중하여 정작 중요한 일을 놓쳐 버린 것은 아닌지.
아내에서 엄마의 자리에서 잠시 비켜서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여름
숲은 준다.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해 본다 먼 곳 어디선가 새소리가 청량하게 들리
어 오고 숲 속의 나무에선 매미 소리가 요란스럽다. 성충으로 한 달 가량을 살기 위해
땅속에서 유충으로 오륙 년을 참고 기다리는 매미. 짧은 생애동안 구애하고 짝짓기하고
알을 낳아야 하기에 저리도 크게 울어대는가. 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을 보니 암컷이 가
까이 있는 모양이다.
나무만이 아니라 땅을 내려다보면 거기에도 무수한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다.
관심을 기울여 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생명들, 크고 눈에 띄게 좋은 것들만
지향하던 내게 작고 사소한 것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고 일러준다.
일렬로 서서 어디론가 이동하는 개미떼들이 나무 밑동을 지나간다. 굵직한 나무는 뿌
리가 깊고 잎이 무성하여 혈기왕성한 건장한 청년을 보는 듯하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뿌리 깊고 튼실한 열매가 열리는 나무 같았으면 좋겠다고 문득
생각해 본다. 언제나 푸른 잎 무성하게 달고 비바람을 견디는 나무들처럼
여름 숲은 내게 희망을 준다 지치고 피곤할 때 여름 숲에 가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생명력으로 용기가 솟는다 여름이 덥고 짜증난다고 느껴질 때 계곡이나 바다보다
는 여름 숲을 만나러 간다. 숲은 그 누구를 가리지 않는 포용력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
다 짧은 생을 위해 기다릴 줄 아는 매미의 인내와 뿌리 깊고 초록빛 잎새 무성한 나무
에서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어느 계절이나 숲은 살아있는 생명이다. 풋풋함이 묻어나는 인생의 봄날, 무성한 나
뭇잎 속에서 느껴지는 초록의 싱그러움, 갖가지 빛깔과 열매로 풍성한 가을 숲 빈 가지
의 허전함속에 생을 마무리하고 다음해의 푸른 꿈을 기약하는 겨울 숲이 그러하다.
때가 되면 잎이 돋아나고 떨어지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내가 여름 숲을 좋아하는 것은
절반을 살아온 내 인생에서 남은 반에 발자국 떼어놓기 싫은 영원히 푸르른 숲이고 싶어
서일 게다.
2005. 21집
첫댓글 때가 되면 잎이 돋아나고 떨어지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내가 여름 숲을 좋아하는 것은
절반을 살아온 내 인생에서 남은 반에 발자국 떼어놓기 싫은 영원히 푸르른 숲이고 싶어
서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