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8일 십자고상 바라보기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세상에 나타내 보여주셨다. 공생활 전체가 그러한데, 특히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그렇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과 자비 이미지와는 너무 달라서 하느님이 사랑이란 걸 믿기 쉽지 않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한 ‘대속적(代贖的) 죽음’, 다시 말해 우리를 대신해서 죽임을 당하시고 우리는 우리 죄로 죽지 않고 살게 됐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은 과거이며 현재다. 골고타 십자가 처형 사건은 오늘도 미사 성찬례 안에서 벌어진다. 거기서 예수님은 다시 우리 죄로 수난하고 돌아가신다는 게 우리가 믿는 교리다. 오래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에서 특수분장과 주인공 배우가 실감 나게 연기해서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그 상처가 너무 끔찍해서 똑바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사야 예언서 말씀대로다.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이사 52,14)
십자가 위 예수님 몸은 투시 거울이나 의료 특수 카메라처럼 우리 내면을 보여준다. 죄로 상처 입은 우리 영혼을 보이게 그린다면 퇴마 영화에 나오는 마귀 들린 사람처럼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그렇게 흉측할 거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거다. 우리 그 바람대로 그것들은 땅속에 묻혀 없어졌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내 죄도 죽어 없어진다. 믿기 어려워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 흉측한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내 기억을 모두 지울 수도 없고, 설령 지운다고 해도 내 몸은 그걸 기억하고 있다.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이유 없이 긴장하고 조급해지고 실수하고 잘못해서 후회하고 괴로워하기를 반복한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믿지 않으면, 그분이 하느님이라는 걸 믿지 않으면 나는 내 죄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요한 8,24)
악은 인간 안에서 꼭 그 완성을 보고야 만다. 그러고는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그를 버리고 웃으면서 유유히 떠나는 거 같다. 군사들이 예수님을 처형할 때도 그랬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고는 끝내 살해하고야 말았다. 그러고 난 뒤에 즉시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15,39) 죄의 결과를 알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 일단 걸려들면 빠져나오지 못한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렇게 불쌍한 우리 처지를 아주 잘 아신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돌아와 살기를 바라신다.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단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이 바로 우리 하느님이라고 믿는 거뿐이다. 자주 십자고상을 올려다보며 내 죄를 아파하고 그런 나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감사한다.
예수님, 상처 입은 주님의 몸은 경고나 위협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라고 믿습니다. 벌을 받는 게 정의라고 알고 있는 세상에서 하느님이 저를 무조건적 용서하심을 믿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믿습니다. 그게 아니면 제겐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카나 혼인 잔치에서 제자들이 아드님을 믿게 해주셨던 거처럼(요한 2,11) 저에게도 그렇게 해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