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산성에서
남녘 산자락도 온통 단풍이 물든 십일월 셋째 일요일이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가끔 산행을 함께 나서는 벗과 유의미한 채집을 위한 길을 나섰다. 우리는 봄날 근교 산자락에서 머위를 캐거나 다래 순을 따오기도 했다. 초여름 강변으로 나가 돌복숭을 따 담금주를 해 놓고 죽순을 꺾어와 찬으로 삼았다. 겨울이 오는 길목인 이맘때 찾아가 따오는 열매가 있다. 그것은 산수유열매였다.
나는 도시락을 준비하고 벗은 곡차를 챙겨 이른 아침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주차장에서 접선했다. 우리는 함안 가야로 가는 농어촌버스를 탔다. 시내에서 서마산을 지나 중리를 거쳐 신당고개를 넘으니 함안 산인이었다. 입곡저수지 근처 대천마을에서 내렸다. 산수유열매만 따고 하산하기는 단조로워 어디 먼저 들릴 곳을 정했다. 둘은 대천마을 뒤 문암산성을 답사하기로 약속되었다.
함안은 가야사에서 아라가야 고분군으로 주목 받는 고을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상당한 고분들이 도굴된 안타까움이 있다. 그럼에도 가야국 중심 김해 금관가야보다 유물에선 주목 받는다. 특히 굽다리접시는 가야사에서 뺄 수가 없다. 거기다 고려 말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거부하고 천 리 길로 남하했던 재령 이 씨 고려동 유적지 장내 담안마을은 충절의 고장 표본이 된다.
대천마을에서 문암산성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묵혀져 있어 들머리를 찾기가 다소 어려웠다. 마침 채소밭을 돌보는 현지 주민의 안내를 받아 대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올랐더니 희미한 옛길이 드러났다. 후손들이 선산 성묘를 다녀간 길과 겹쳐 산기슭으로 오르니 등산로를 찾을 수 없어 낙엽이 수북한 숲을 헤쳐 오르니 가랑잎 사이 녹색 잎이 윤이 나는 몇 포기 춘란이 눈길을 끌었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성터로 짐작되는 돌무더기가 나왔다. 정상부는 아래서 바라보기보다 넓고 펑퍼짐했다. 신라 이전 가야국 시대 쌓았을 원시 형태 성터로 자연석을 얼기설기 주워 모아 놓은 듯했다. 함안은 여섯 가야 가운데 아라가야 지역이다. 군청 소재지 근처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말이산고분군은 고고학계 주목을 받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절차를 밟고 있다.
북사면으로 가니 성터 윤곽이 더 뚜렷한 부분이 나왔다. 성내는 누군가 움막을 짓고 기거하다 최근 떠나간 흔적이 보였다. 아카시나무를 비롯한 잡목들이 석성을 덮고 있었다. 문화재 관리 당국에서 성터를 정비하고 안내문을 세웠으면 싶었다. 더 나아가 유적지 고고 유물을 발굴해봄직도 했다. 성터를 내려가 대천마을과 송정마을로 넘나드는 고갯마루에 서니 만추 단풍이 아름다웠다.
1치 목표인 문암산성을 넘어 다음 행선지는 자양산 통신 중계소였다. 함안에서 대성을 이룬 순흥 안 씨와 함안 조 씨 무덤을 지나다가 배낭을 풀어 곡차를 들었다. 개척 산행으로 낮은 산봉우리를 넘으니 아까 고갯마루를 돌아온 등산로가 나왔다. 경사가 급한데도 산악자전거가 지난 바퀴 자국이 보였다. 숲속에서 안개가 걷히면서 산인과 가야 들판과 시가지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자양산 정상에는 통신사와 공영방송 송신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가로수로 심겨진 산수유나무가 줄을 지었다. 둘은 몇 해째 늦가을이면 그곳에서 산수유열매를 따오고 있다. 발 빠른 선행주자들이 산수유열매를 거의 따 가고 우리는 이삭만 줍다시피 했다. 입소문이 났는지 해가 갈수록 무주공산의 산수유열매에 눈독을 들인 이들이 늘어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산수유열매는 씨앗은 볼가내고 과육을 말려 찻물을 끓여 먹을 셈이고 벗은 담금주를 담가 먹는다. 임도 갈림길 정자에서 도시락을 비우니 자전거 라이딩을 나선 이가 셋 올라와 곡차를 나누었다. 유원으로 가는 길고 긴 임도에도 산수유열매가 보였으나 발길을 서둘러 칠원으로 나갔다. 합성동 버스터미널 뒷골목 장터 돼지국밥집에서 맑은 술로 하산주를 겸한 저녁을 때웠다. 20.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