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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흥겸과 벗들 원문보기 글쓴이: 최형묵
*쑥스럽지만, 시냇물이 올리라고 해서 올립니다. 각주 달린 원문은 별도 첨부합니다.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죄책고백을 통한 과거사 극복 심포지엄>
제5차 발표문(2006년 2월 14일 / 기독교회관)
유신체제, 군사정권하의 한국교회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
1. 지속되는 당대사를 평가하는 어려움
한국사회에서 군사정권기는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로 시작하여 1972년 성립한 유신체제 전기간, 그리고 1980년부터 1987년 민주화대투쟁에 이르기 전까지 신군부의 통치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은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는 당대사의 일부로서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과거청산의 대상은 아니다. 그 유산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나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나 '살아 있는 역사'이기에 그 시대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과거사로 치부될 수 있는 역사에 비해 어려운 점이 있다. 물론 그 생존자들이 이미 사라진 과거사라 하더라도 역사를 평가하는 문제는 항상 당대의 관점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평가하는 일 자체는 당대사의 일부에 해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미 과거사이든 지속되고 있는 당대사이든 그 평가 작업은 동일한 어려움을 지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지난 과거사의 경우는 평가의 시점에서 해석이 중요한 관건이 되는 반면, 지속되고 있는 당대사는 멀지 않은 그 과거 시점에서의 해석과 현재의 시점에서의 해석이 보다 긴밀하게 얽히고 설킬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이미 지나간 과거사의 주인공들은 말이 없지만, 멀지 않은 그 과거를 살았고 지금도 살아 있는 주인공들은 얼마든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수도 있다. 이로 인해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멀지 않은 과거를 평가하는 사람은 편안하게 자신만의 해석을 내리는 것으로 안도할 수 없다. 바로 그 점이 지속되고 있는 당대사를 평가하는 작업의 어려움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 어려움 내지는 불편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특별히 '죄책고백을 통한 과거사 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은 어찌되었든 역사의 주인공들의 행위를 반성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오히려 살아 있는 시대에 대한 평가는 다른 모든 시대에 대한 평가의 시금석이 될 수도 있다. '죄책고백'이란 타인을 정죄하는 차원이 아니라 스스로의 죄를 반성하는 차원이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시대에 대한 평가는 바로 그 취지를 한껏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시대에 대한 평가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물론 그 살아 있는 시대를 다루는 이 글 자체가 저절로 그 취지를 충분히 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교적 먼 과거를 평가하는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은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평가는 즉각적인 반론에 직면할 수도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고 긴장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긴장감 속에서 시도하는 평가가 문제의 사안에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었던 당사자들 스스로의 이의제기 또는 보완으로, 이 글은 본래 그 취지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유념하면서 이야기꺼리를 던지는 심정으로, 이 시대와 관련하여 청산해야 할 한국교회의 과오를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2. '박정희체제'와 교회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과거사 평가와 관련하여 군사정권 시대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를 둘러싼 논의들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시기를 흔히 군사정권 시대로 통칭하기도 하지만 최근 논의에서는 이 시기를 특징지어 '박정희체제'라 말하기도 한다. 군사정권의 통치라는 성격규정으로도 그 시대를 말할 수도 있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닌 보다 복합적인 어떤 체제의 특성을 규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표현일 것이다. 80년대중반의 신군부통치 시기까지를 포괄하는 '박정희체제'는 민주화운동의 성과에 근거한 '87년체제' 또는 '87년이후체제'와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민족의 통일과 자립화, 그리고 민주화를 이룰 수 없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었던 박정희 군사쿠데타세력은 반공주의와 경제성장에 모든 것을 내걺으로써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박정희 개인의 이력상, 그리고 미국 주도하의 냉전체제 최전방으로서 한국 상황상 쿠데타세력은 스스로 정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한 달리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그것은, 흔히 박정희신화를 믿고 있는 이들이 탁월한 영도력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정통성 없는 정권의 협소한 선택의 결과일 뿐이었다. 박정희체제는, 미국에 의해 자본주의를 지키는 일종의 '전투기지' 역할을 강제당해 위험부담을 안는 대신에 자금ㆍ기술ㆍ시장을 공여받는 '냉전형 발전'의 길을 통해 구축되었다. 그렇게 구축된 박정희체제는 반공주의를 내세워 체제 안보의 위협을 막는 가운데 강력한 군사주의적 획일주의 내지는 권위주의로 사회를 통제하고 돌진적인 경제성장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 체제는 1972년 유신체제로 더욱 강화되었지만 권위주의적 통제가 강화되는 만큼 민주화의 요구 또한 거세져 마침내 위기를 맞았고, 적어도 박정희 정권은 붕괴하였다. 그러나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로 위기는 봉합되었고 박정희체제는 사실상 87년체제의 등장 이전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이 박정희체제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데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관계이다. 이른바 '개발독재'라는 말 자체가 시사하듯이 그 체제하에서는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개발이 공존하였다. 문제는 경제적 개발을 위해 정치적 독재가 불가피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쟁점은 박정희체제가 일궈낸 경제적 발전을 별 의심없이 성공적으로 평가하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경제적 발전의 성공이라는 점에서 별 의심을 하지 않는 입장에서 볼 때 정치적 독재의 부당성만이 문제가 된다. 요컨대 경제적 발전의 성과를 깎아 내리지 않으면서 정치적 독재의 문제를 평가해보려는 논의구도에서 제기되는 쟁점이다. 박정희체제와 87년체제가 확연히 구별된다고 했지만, 그 구별은 사실 순전히 정치적 차원에만 해당한다. 정치적 민주화의 성과 위에 수립된 87년체제 역시 경제적 차원에서 보자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현실 가운데서 국가경제의 경쟁력은 여전히 초미의 관심사이고, 1987년이래 김영삼정권부터 현재 노무현정권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정부의 정책도 그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다. 국민소득 2,000 달러를 외치던 박정희와 20,000 달러를 외치는 노무현이 그 점에서 어떤 질적 차이를 지닐까? 경제적 차원에서 박정희체제는 여전히 강력하게 존속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현실에서 이와 같은 논의구도는 어쩌면 매우 당연한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와 같은 논의구도로 박정희체제를 평가하는 것이 충분할까? 경제적 성공은 인정하되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재고해보자는 식의 논의로는 고작해야 개발과 독재가 함수관계가 있다든지 아니면 없다든지 하는 식의 결론 이외에는 별로 건질 것이 없다. 그 시대와 체제에 대한 평가를 그와 같은 논의구도에 한정시킨다면, 그와 관련한 한국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정당성 없는 정권과의 부당한 유착 이외에 달리 문제삼을 것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으로 한국교회의 문제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와 체제를 더욱 근본적으로 문제삼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점에서 박정희체제와 그 시대에 대한 평가를 충분히 개진하여야 하겠지만, 여기에서 충분히 다룰 수 있는 겨를이 없는 관계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수준에서 머무르고, 암묵적으로 시사한 그 문제제기의 연장선상에서 한국교회의 문제를 지적해보려고 한다.
우선 구체적으로 문제되는 사안들을 지적하기에 앞서, 박정희체제와 교회와의 관계 성격을 개괄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흔히 역대 정권 가운데서 박정희정권과의 관계에서 교회는 가장 불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정과 이승만정권 또는 민주당정권과의 밀월관계가 친불교적 성향의 박정희 시대부터 깨지고 껄끄러운 관계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 시대에 들어서 정권이 기독교인을 특별히 중용하는 일도 없었고, 무엇보다 한편으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교회가 정권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을 했던 만큼 그와 같은 생각은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인상과 달리 박정희체제와 교회는 훨씬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미국의 강력한 영향하에 있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이 여전히 중요한 대미 막후교섭 창구를 기독교계 인사에게 맡겼다는 것은 오히려 작은 일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거시적 차원에서 볼 때 박정희체제와 교회는 가장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해 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박정희체제하에서 진행된 한국적 근대화의 최대 수혜자이자 동시에 협력자는 교회였다. 한국교회의 '성공'과 박정희체제의 '성공'은 매우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어쩌면 가장 긴밀한 밀월시대로 평가하는 것이 더 정당할 것이다. 예컨대, '조국근대화'는 '민족복음화'와 등식을 이뤘고, '잘 살아보세'는 '삼박자 축복'과 등식관계를 이뤘다. 충분히 개진하지는 못했지만, 박정희체제에 대한 평가 문제를 앞서 제기한 사연이 여기에 있다. 이제 구체적 사안별로 그 관계를 짚어볼 차례이다.
3. 개발독재체제의 굳건한 동맹세력으로서 교회
사실 박정희체제 또는 개발독재체제하에서의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이미 지적하였고, 그 내용도 대체적으로 공통된다. 여기서 새삼 추가해야 할 사안은 별로 많지 않다. 이미 지적한 사안들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며 약간의 보충을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새삼스러운 게 있다면 지적하는 각 사안들이 체제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하는 점을 더 깊이 유념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1) 국익과 체제안보 논리로서 반공주의
한국교회 반공주의의 기원이 뿌리깊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반공주의는 미군정과 한국전쟁 기간을 통해 한층 강화되었고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지속되었다. 한국교회는 반공주의를 체질적으로 내면화하고 있었다. 분단상황에서 그렇게 체질화된 반공주의는 한국교회의 자기정체성을 유지하는 최고의 가치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입장이었던 셈이다.
그와 같은 한국교회의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반공을 최전면에 내세운 5.16 군사 쿠데타를 즉각 환영하였다. 쿠데타가 일어난지 10일만에 교계는 그것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었다. 당시 한 교계신문은 "우리는 자유를 희생하더라도 방종하는 무리들이 숙정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주장했는가 하면, 군사정부의 내각수반인 장도영이 교인이라는 사실과 해병대의 김윤근이 쿠데타에 앞서 기도하고 거사에 나섰다는 사실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1961년 5월 29일 당시 한국기독교연합회(NCC)도 조속한 민정이양을 촉구하기는 했지만,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금반 5.16 군사혁명은 조국을 공산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과 부패로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사였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쿠데타를 인정한 동기가 분명하다. 반공의 명분 앞에서는 민주적 절차와 법질서의 유린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식의 동기이다. 군사 쿠데타에 대한 교계의 입장은 지지선언으로 그치지 않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6월 10일 국가재건을 위한 자립경제를 구축하고 악습과 부패를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재건국민운동을 전개할 때, 교계의 유력한 인사들이 한 때나마 본부 중앙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6월 하순에는 교계 인사들이 '혁명정부의 국제적 지지'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쿠데타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반공주의 입장을 취한 교회는 유신체제가 들어섰을 때에도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논리로 정당화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정권안보를 위한 기만술책인 것으로 드러났지만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좀처럼 흔들릴 것 같지 않았던 한국사회의 냉전의식은 다소 완화되는 듯한 분위기였고 한국교회 역시 편협한 반공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듯했다. 그러나 일시적 충격으로 한국교회의 강고한 반공주의가 쉽게 무너지기 어려웠고, 결국 10월 유신체제의 등장과 함께 더 강력하게 반공주의에 편승하게 되었다. 1975년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이를 빌미로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을 원천 봉쇄한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을 때 반공주의로 일관해 온 교회는 앞다투어 구국기도회 및 집회를 열고 반공주의를 역설하였다. 1975년 7월 열린 '세계기독교반공대회'에서 김준곤 목사는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림길에서"라는 주제의 강연으로 유신체제를 찬양하고 진보적 기독교운동과 신학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이와 같은 김준곤 목사의 입장은 한국교회 반공주의의 전형이었다.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한편으로는 북에 대한 적대의식을 조장함과 동시에 남쪽의 부당한 권력체제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민중운동에 참여하는 또 다른 교회를 정죄하는 구실이 되었다. 한일협정 체결과 삼선개헌 등의 계기로 한국교회에 일각에서는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이어진 급속한 경제개발로 소외된 민중의 문제가 전면화되면서 그에 대해 선교적 차원에서 접근하게 된 교회의 전통이 뚜렷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반공주의 교회는 그와 같은 교회의 흐름을 배척하면서, 자신들은 정권과 유착하여 기득권을 형성해나갔다.
한국교회 반공주의의 폐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사실은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태도 문제이다. 한국군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파병되었을 때, 한국교회는 한국전쟁 때 우리가 받은 은의에 보답하고 공산침략에 맞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 나아가 세계평화를 지킨다는 견지에서 한국군의 파병을 지지하고 환송예배를 개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한 한국교회의 입장은 당시 베트남 전쟁을 비도덕적인 전쟁으로 규정하고 미군의 철수를 주장했던 세계교회협의회(WCC)나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의 입장과도 달랐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명백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베트남 파병 한국군을 '평화수호의 십자군'이라 부르기까지 했다. 이렇게 반공주의로 무장한 한국교회는 복음의 보편성이나 인권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아예 사고하기를 중단하고 국익과 체제안보에 매몰되었다.
2) 정권과의 유착과 교회의 기득권 강화
5.16 군사쿠데타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시대의 징조'를 구별하지 못했다.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의 한 목소리로 '혁명'을 지지하고 나섰던 데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민정이양이 이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후 한일협정 체결과 삼선개헌 과정을 지켜보면서 교계는 반성을 하기 시작했고 정권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교회의 흐름을 뚜렷하게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 흐름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선 한국교회의 전통을 형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를 유대기반으로 박정희정권과 유착을 하기 시작한 교회는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정권의 지지세력으로서 자리를 잡아간다. 그 유착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례가 국가조찬기도회이다.
애초 국가조찬기도회는 1966년 2월 3일 기독교인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원내 조찬기도회가 조직되어, 3월 8일에 조선호텔에서 대통령 조찬기도회를 개최한 데서 유래한다. 이후 연례행사로 치러왔는데 1976년부터 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되었고, 1980년대 신군부 통치시대에도 지속되었다.
정권의 입장에서야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장도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다. 교회의 입장에서도 체제를 뒷받침해주고 협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리를 생각하였다. 정권과 유착한 교회의 그와 같은 속내는 1973년 제6회 조찬기도회에서 한 김준곤 목사의 설교에서도 잘 드러난다.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 ... 당초 정신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이 운동은 ... 맑스주의와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새로운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야 될 줄 안다. 외람되지만 각하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 신자화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민족신자화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면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다."
정권의 비호 속에서 안정적으로 기독교 신자를 늘일 수 있다는 실리 계산이 숨겨지지 않은 채 드러나고 있다. 폭압적인 유신통치가 시행되고 이에 대해 저항하는 기독교인들 다수가 탄압을 받고 있는 바로 그 시기에 보수적 교회와 교계 인사들이 주도하는 각종 대형집회들이 정권의 비호 속에서 매우 빈번히 열렸고, 그와 같은 대형집회들은 기독교인들의 양적 성장을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와 같은 사실은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1974년 기독실업인회가 주최한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김종필 총리는, 정권에 저항하는 기독교인들을 법으로 처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10여 년간 교회증가 숫자는 2배, 교역자는 무려 6배의 증가를 보였다.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겠는가." 이 때 그는 로마서 13장을 인용해 "교회는 정부에 순종해야 하며 정부는 하나님이 인정한 것이다"라고 발언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의 탄압을 정당화했다. 한편의 교회와 정권은 그런 식으로 밀월관계를 지속하였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고 난 후 완전하게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과도 교회는 손쉽게 손을 잡았다. 광주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 그 해 8월 6일 유력한 교계 인사들은 서울 롯데호텔 에머랄드룸에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어 전두환을 앞에 두고 군권찬탈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의 장도를 축복하였다. 신군부에 대한 교계 인사들의 협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980년 5월 초헌법적 기관으로 '국보위'가 만들어졌을 때 다수의 교계 인사들이 입법위원 또는 국보위 종교부 담당자들로 협력하였다. 계속해서 신군부 치하에서의 국가조찬기도회 역시 끊이지 않았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거센 국민적 저항이 일어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도 계속되었다.
3) 경제적 성장 이데올로기의 내면화
단순히 하나의 정권이 아니라 사회전반을 통제하고 구조화한 체제라는 의미에서 '박정희체제'와 교회와의 관계를 말할 때 사실 가장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문제는, 그 체제가 추구한 경제개발의 '성공'과 한국교회의 '성공'의 상관관계일 것이다.
경제개발의 성공이 어떻게 교회의 성공을 가져 왔을까?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급속한 경제개발로 와해된 전통사회의 공동체성을 교회가 대신 담보해준 효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한국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면, 한국교회의 '성공'은 경제개발의 '성공'에 따른 부수적 효과를 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면 사실이다. 만일 그것이 한국교회 '성공' 이유의 전부라면 우리는 과거사 극복을 논하는 이 마당에 그 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 점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문제는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경제 개발의 논리를 교회가 그대로 수용하면서 교회가 성장을 추구했고 그렇게 성공을 거두었다는 데 있다.
애초 기독교 수용 당시부터 발전한 서구 근대 문명을 기독교와 동일시한 교회는 경제적 근대화의 성취를 곧 신앙의 성취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국교회의 그러한 경향은 박정희체제 아래서 가장 좋은 호기를 만났다. 전시체제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전국민의 역량을 동원한 박정희체제의 국민동원 방식을 교회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박정희정권하에서도, 신군부정권하에서도 빈번히 계속된 대규모 집회 방식 자체가 국가의 총동원 전략을 그대로 닮았고, 그와 같은 방식은 개별교회 단위에서도 동일하게 재연되었다. 그 안에서 선포되는 메시지 또한 경제적 성장의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적으로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앞서 지적한 대로 '조국근대화'는 '민족복음화'로, '잘 살아보세'는 '삼박자 축복'으로 등식화되는 양상이었다. 그렇게 교회는 경제개발의 성공을 가져온 그 체제를 그대로 모방했고 경제적 성장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내면화하였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박정희체제가 추구한 경제성장 정책의 문제를 그대로 안게 되었다.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급속한 성장으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자본주의의 냉혹한 병폐를 그대로 안고 있는 한국의 경제체제와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그 병폐를 그대로 안게 되었다.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 삶의 양식이 지니는 양극의 모순을 익히 경험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내달리지만, 그 욕망 충족의 한계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제 당한다. 창업 신화의 주인공은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신화를 이룰 수는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1등을 향해 경쟁을 하지만 그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1등뿐 나머지 사람은 모두 패배자가 되고 만다. 그 냉혹한 현실이 바로 근대 자본제가 사람들에게 강요한 삶의 양식이다. 한국교회가 돌진적 근대화를 추구한 박정희체제의 병폐를 그대로 안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삶의 양식을 용인할 뿐 아니라 스스로 체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 사회의 병폐와 교회의 병폐가 얼마나 닮았는지는 아주 단순한 비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세간에서 지적하는 교회의 양적 성장의 문제는 경제적 정의를 등한시하고 규모만을 키워온 경제 그 자체와 너무나 닮았다. 사실 양적 규모로 '성공'을 거둔 소위 대형교회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의 교회들은 소규모의 교회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수의 성공한' 교회를 모든 교회들이 선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믿는 것과 너무나 닮아 있다. 대형교회들이 지교회를 분립하는 것도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을 닮았고, 교회 세습마저도 재벌의 행태를 닮았다. 부의 독점적 소유와 배타적 특권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마저 금권선거가 횡행하는 사태도 그와 같은 교회의 문제 연장선상에 있다. 규모와 성장의 논리, 그리고 국익의 논리 앞에 사고를 정지한 듯 어떠한 윤리적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그와 같은 과거의 유산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4) 타종교에 대한 전투적 배타주의
박정희체제하에서의 한국교회의 '성공'은 그 표방한 바와 같이 '복음화'와는 상관없는 것이었고 단지 자신의 규모와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온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적 병폐를 극복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을 육화하려는 교회의 실천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정권의 비호와 그 통제하에 있는 여러 세력과의 공모관계 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자신의 존립 자체를 절대화해온 과정일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성공'을 거둔 교회는 마치 절대권력과 마찬가지로 진리 자체를 독점한 듯한 의식에 사로잡혀 자신과 다른 타자와의 건강한 소통 자체를 하지 못하는 불능 상태에 빠졌다. 오늘날 시민사회와 합리적 소통을 하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도 그렇거니와, 타종교에 대해 유달리 강한 전투적 배타주의는 그와 같은 교회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한국교회의 타종교에 대한 전투적 배타주의의 기원은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해 준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유래한 측면도 있겠지만, 박정희체제하에서의 '성공'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경제적 성장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배제의 논리를 안고 있다. 성장의 논리를 체현한 교회가 배제의 논리를 더욱 강화하였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4. '걸인의 철학'과 '수치심의 철학'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면서 그 시대를 관통하는 욕구를 '걸인의 철학'이라는 수사로 비유하였다. 먹고사는 욕구를 해결하면 또 다른 종류의 욕구가 끊임없이 분출하는 원리를 그렇게 말하였다. 아울러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걸인의 철학에 물든 사람이 거기에서 탈피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예컨대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욕구는 '더 잘 먹고 더 잘 살아보자'는 욕구로 진화할 뿐 정말 '잘 사는 것'에 대한 성찰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웰컴투동막골>에서 촌장이 말한 "뭘 잘 멕여야지!"라는 대사는 오늘 한국 정치인들의 즉각적인 환호를 받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국민소득 2,000 달러를 외쳤던 박정희와 20,000 달러를 외치는 노무현은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을 보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걸인의 철학'에 매여 있는 것 같다.
박정희체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이자 협력자로 함께 해온 한국교회의 모습 또한 다르지 않다. 한국의 교회 이름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이 '제일'과 '중앙'이다. 그 이름들은 한국교회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욕구를 표현한다. 그야말로 규모상 세계 제일의 교회도 있고, 세계 10대교회 안에 5개 이상이 한국에 있으니 누구나 바라는 그 목표가 그렇게 비현실적으로만 보이지 않을 듯도 하다. 그런데! 그래서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저마다 '중앙'을 자처하고 '제일'을 자처하는 가운데 교회의 본연의 임무에 대한 성찰 또한 함께 하는 것일까? 스스로의 존립 자체를 목적으로 함과 동시에 규모의 성장에 매몰되어 있는 교회는 속성상 그와 같은 성찰을 할 수 없다.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민주적 정당성 없는 정권과 유착하고, 그 정권이 확립한 체제 안에서 성장주의를 내면화해 왔을 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극도의 배타적 자세를 당연시하는 교회는 자기의 생존과 확장 이외에는 관심을 갖지 못한다. 언제나 채워지지 않은 허기로 허덕일 뿐이다.
그로부터 헤어 나오는 길은 무엇일까? 죄책고백을 통한 과거사 극복을 시도하는 것은 그 길을 찾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수사가 우리의 혜안을 열어준다. 한신대에서 종교학을 가르친 바 있는 이상린은 '수치심의 철학'이라는 다소 낯선 개념을 말한다. 맑스의 한 서신에서 착상을 얻은 이상린은 그 수치심을, 비인간적인 소외된 강제적 인간관계에 '아직도' 적응하며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그 현실의 구조를 변혁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는 내면 의식이라 말한다. 흔히 타율적 윤리관에서 체면의 손상에서 오는 수동적 의식으로 간주되는 수치심을, 사회적 현실과 인간 자신을 변화시키는 출발점으로서 능동적 자기 의식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죄책고백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말하는 죄책고백은 능동적인 자기 의식으로서 수치심과 같은 것이 될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 아닐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죄책고백이란 죄를 지은 당사자가 그 죄를 참회하고 반성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우리는 지금 우리의 죄를 반성하고 있는 것일까? 교회의 이름으로, 또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잘못을 말하고 있으니, 의당 교회의 한 성원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죄를 반성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교회 현실을 보자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이미 앞에서도 지적했다시피 한국교회는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불의한 정권과 유착한 교회가 있는가 하면 그에 대해 저항한 교회가 있다. 그런데 지금 죄책고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불의를 저지른 교회가 아니라 저항을 했던 교회들이다. 다른 시대는 그 양상이 다를지라도 특별히 박정희체제하에서 교회의 구도로 보자면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죄책고백'은 '고백'이 아니라 '고백의 강요'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 흔한 "내 탓이오"일까? 그렇게 누구누구의 잘잘못을 덮어두고 모두의 잘못이라고 말하면 정말 잘못을 범한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참회할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게 어째서 죄가 되느냐고 항변할 사람들이 더 많다. 과오를 인정한 경우에도 참회보다는 변명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이 그렇다면 죄책고백은 사실 말장난일 뿐이다. 현실의 삶에서 아무런 변화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그 흔한 싸구려 회개운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능동적인 자기 의식으로서 수치심과 죄책고백을 관련시켜보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능동적인 자기 의식으로 수치심은 스스로의 잘못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용인할 수 없는 현실에 스스로 매여 산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그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변혁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죄책고백은 잘못된 교회의 전통과 단호히 절연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어야 하고 실제로 잘못된 교회의 현실을 변화시켜나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