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 신자님들이 불러들인 불갑사 입산
돌아보면 나의 출가는 잘 짜여진 소설 각본처럼 움직여졌던 것 같다. 지리산 화엄사 아랫마을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손을 잡고 화엄사 산내 암자를 드나들었던 일이나, 초등학교 때 그림그리기 대회에 나갔다가 화엄사를 온통 황금빛으로 그려 놓았던 일이 유년시절에 익혀놓은 불심이었다.
그로부터 십 몇 년 후, 통도사에서 열리는 행자교육에 입방했다.
21일간의 교육을 마치고 최종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인례사 스님이 물었다.
“머리에 흉터가 있는데, 인천人天의 스승이 될 사람이 흉터가 있어서 되겠어요?”
고등학교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수술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남은 유난히 긴 흉터 자국을 보신 모양이었다.
“부처님 법에 의하면 몸뚱이도 객인데, 몸에 있는 흉터가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행자교육원생인 주제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 얼마나 당돌하게 들렸을 것인가.
인례사 스님의‘오호, 이봐라!’하는 표정이 역력했고 곧‘저리 가 있게’하는 명과 함께 따로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그날 면접에선 또 나의 입산 날짜가 문제 되었다. 사실 나는 행자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행자교육원에 들어갔다. 사연은 이렇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려고 들어간 불갑사에서 방을 하나 얻어 공부하며 지낸 지 얼마 후였다. 절에 도둑이 들어 불전함을 가져가고 난 다음 날 아침, 대책회의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내가 불쑥 그 자리에 계시던 스님들께 여쭈었다.
“ 며칠 전 불교신문을 보니까 3월 11일부터 행자교육이 있다고 하던데 저도 가보면 안될까요?”
부처님께선 스물아홉에 출가를 하셨는데, 자꾸 나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 걱정되던,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봄이었다.
은사스님이 되신 수산 스님을 비롯해 주지스님 등 몇 분의 스님들께서 반색을 하셨다. 행자과정이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출가하기 전에 불교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문제없다’는 스님들의 성원 속에 나의 행자교육원 입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주지스님께서 직접 서류를 작성해서 교육원에 접수시킨 뒤 행자교육에 참여한 것인데 그만 입산 날짜가 문제된 것이다. 서류를 작성하면서 주지스님께서 입산 날짜를 한 해 전으로 써 놓았는데 그것을 모르고 갔다가 서류상의 날짜와 다르게 대답해서 지적을 당한 것이다. 이래저래 안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싶었는데, 저녁 8시 반이 되자 퇴방할 사람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행자 15명가운데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시공부도 포기하고 들어온 길인데 교육과정도 끝내지 못하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행자교육원의 유나 소임을 보셨던 지금 송광사 방장 보성 스님을 찾아가서‘만약 머리에 흉터가 있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금생엔 출가를 하지 않고 재가에서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입산날짜가 문제라면 불갑사에 전화를 해보십시오.’하고 말씀드렸더니, ‘객실에 가 있게’하시는 것이었다.
조금은 착잡한 심정으로 객실에 있는데 아홉시 반쯤 되자 갑자기 밖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퇴방당했던 한 사람이 다시 올라온 것인데, 그는 당시 백양사 행자반장으로, 세속에서 익힌 나쁜 습을 끊고 출가 대장부의 길을 가겠다며 손가락 세 개를 끊고 크게 발심을 한 사람이었다. 되돌아가다 생각하니 너무 억울해서 사하촌에서 동동주 한 병을 마시고 다시 올라온 그는 호기있게 율사스님을 불렀다.
“스님, 나와! 내가 출가할 뜻을 세우고 들어왔는데 당신이 나를 보내?”
겨우 말려서 돌아간 그는 그후 비구계를 받을 때도 세번째 만에 통과되었다. 어렵게 계를 받고 출격장부의 길에 들어선 그는 지금, 누구보다도 열심히 출가의 길을 잘 가고 있다.
내가 본격적으로 불교를 접한 것은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고향 구례에서 서울로 유학을 와 법대에 들어가 공부를 잘 하고 있던 중, 한 친구에게서 처음‘마음’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한창 단학丹學이 유행할 때여서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마음이 나의 주인공’이라는 말은 매우 신선하면서도 깊게 다가왔다.‘ 마음’이야기를 듣고 곧 친구가 나가는 법회에 참석했다. 탄허 스님의 회하에서 공부를 하신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이 서울 경동시장 근처 한 포교당의 법사로 계시면서 경전을 강의하셨고 나는 그분에게서 경전을 들었다. 탄허스님께서 현토하신 금강경, 능엄경, 대승기신론 등을 익히면서 심오한 불법의 세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법회에 참석해 경전을 익히던 어느 날부터 법사께서‘불법을 닦는다는 사람들이 술 담배를 끊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라는 말씀을 자주하는 것이었다. 웬일인지 그 말씀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그 경책은 재미있던 학창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가 되었다. 술 담배에서 멀어지자 어울리던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불법 공부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홀로 도서관에 앉아 읽는 한글대장경은 전공 공부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당시 얼마나 불교에 심취하고 신심이 날로 깊어졌는지 새벽 세시면 일어나서 학교와 가까운 곳에 있던 포교당문을 열고 들어가 새벽예불을 드렸다. 대예참까지 해서 정진이 끝나는 시간은 6시였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면 어김없이 도서관에서 경전공부를 했고, 그것도 모자라 하숙집으로 돌아와 밤 10시에서 12시까지 방에서 정진을 했으니, 그때가 초발심을 다지는 행자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함께 방을 쓰던 하숙생에게 미안해서 전셋집으로 옮겨 그렇게 공부와 정진을 거듭했던 한 해 동안은 나를 출가로 이끈 값진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도서관 뒤쪽 텃밭에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만물과 하나 되는 느낌이 들었고, 경전 하나에 몰입해 있는 마음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그리고 평온한 마음 근저에 있는 미세 망념들을 바라보면서 출가해서 집중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발심을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바로 출가를 택하지 않고 고시공부를 선택했다. 출가란 결코 현실도피적이고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름대로 선택한 것이었는데, 졸업 후 2차 시험을 준비하러 들어간 불갑사에서 입산을 하고 말았으니,‘ 고시 합격 후 출가’란 목표에 약간의 차질이 생긴 셈이다.
‘영광에 불갑사라는 조용한 절이 있다더라. 거기 가서 공부 한번 안 해볼래?’하는 전주지검에 있던 육촌형의 권유에 짐을 싸들고 불갑사에 들어갔는데, 처음 와보는 곳이었는데도 천왕문 들어설 때부터 낯설지가 않았다.
대웅전 앞에 섰을 때는 마치 고향에 온 듯했으니, 불갑사는 내 전생의 인연터였음이 틀림없다.
통도사 객실에서 듣는 새벽예불 소리는 참으로 기막혔다. 행자 교육을 마치고 난 수백 명의 사미·사미니들이 해내는 염불소리는 한마디로 천상의 소리인듯 장엄한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아, 내가 저 자리에 있어야하는데…’했는데, 예불이 끝나자 객실 밖에서 누군가 그러는것이었다.
“ 110번 행자! 어서 들어가!”
그 소리를 들으면서‘아, 되었구나!’했고 출가 입산해서 지금 여전히 불갑사에 있다. 나는 출가를 했든 재가에 있든 공부하고 수행하는 데는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가 전 가끔 은사스님이 보여준 사적기를 보면서‘많은 선지식들이 사셨던 불갑사가 왜 이렇게 쇠락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가하면서‘가람을 복원해서 지켜야하겠구나’하는 생각을 해서 그런지 출가 후의 생활은 가람을 복원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흘러왔다.
아마 불갑사 도량 신장님들이 나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은사스님께서는 늘‘공심公心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셨다. 스님께선 실수로 잘못한 것은 가려 따지지 않지만, 사찰의 공물을 개인적으로 낭비하거나 빼돌려 쓰는 일은 용납하지 않으셨다. 평생 어려운 절만 다니면서 가람을 보수하고 수호하면서 공물을 아껴쓰는 생활을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은사스님과 전생의 깊은 인연 탓인지 나도 스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불갑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