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8일(토) 총산 낙동팀의 정기산행일입니다. 날이 흐려서 혹시 비가 오지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산행중에 비는 안 내려서 다행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운무가 뒤덮고 있어 먼 경치를 감상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요. 눈이 내린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녹은 눈에 길이 질고 해발 고도가 높은 지역인지라 사방에 눈이 희끗희끗 남아있었습니다. 그 결과 비탈길을 오를 때엔 진흙과 낙엽이 미끄러워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아침 7시 양재역에서 다섯 사람을 실은 미니버스는 경부고속도로 동천역에서 3인을 더 싣고 경부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상주영천고속도로를 거쳐 신녕IC에서 고속도로에서 내려와 28번 국도와 지방도로를 거쳐 11시 13분경 경북 경주시 서면 천촌리 숙재고개에 도착하였습니다.(상주영천고속도로의 북안IC까지 와서 고속도로를 나왔다면 30분 이상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기사의 네비게이션이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숙재고개에서 산행준비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산행을 시작하였는데 차도를 버리고 폭이 재법 있는 임도로 들어서서 부산성을 향했습니다. 해발고도가 400m 이상 되는 곳이라 길에는 잔설이 남아 있었는데 걷기에 큰 지장은 없었습니다. 조금 더 가보니 임도와 갈라져서 산길로 들어가도록 표지기(리본)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산길을 나오자 다시 임도가 나옵니다. 임도를 따라 계속 올라가다보니 부산성의 서문자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성문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고 이정목과 두 개의 벤취만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앞으로 뻗은 임도를 버리고 우측 비탈로 난 산길을 따라서 계속 올라갔습니다. 길이 불확실할 때에는 GPS 앱(산길샘)을 보면서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해발 700m가 넘는 능선길인 듯한데 운무에 휩싸여 주변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에 무슨 작물을 심어 놓았는데 묘목 같기도 한데 정체를 모르겠습니다. 길이 아래로 급하게 내려가는 지점에서 남문지를 만났습니다. 진흙으로 길이 질어서 조심하다 보니 근처에 있던 돌무더기를 보지 못 한 채 통과하였습니다.(선답자들의 산행기에서 사진으로 남문의 흔적인 돌더미를 보았는데 남문 통과후 일행에게 물어보니 직접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진흙길에 신경 쓰느라 저는 보지 못하였습다.)
남문에서 한참 아래로 향해 내려가던 길이 안부를 만나더니 상승하기 시작하여 오늘의 최고봉인 760m봉을 향한 오르막이 되었습니다. 올라가는 김에 다 올라가서 점심식사를 하려고 하였으나 길이 멀어 적당한 장소를 골라 둘러 앉았습니다. 컵라면에 더운물을 부어서 먹고 “산사춘”(상표 이름) 한잔을 얻어 마셨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길을 떠나 760봉까지 남은 언덕길을 오르기 위해 전진했습니다. 이때 누가 조림을 한 것 같은데 자작나무 숲이 나타났습니다. 자작나무를 보자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한민족과 연관성이 많은 나무라고 들었는데 보통 때 잘 볼 수 없기에 더욱 반가웠습니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자 경사가 급해져서 산을 오르기가 상당히 어려워졌습니다. 경사가 있는 데에다가 길이 진흙길이고 낙엽까지 덮여 있어 천천히 조심해서 올라가는데 자주 미끄러져 뒤로 밀리곤 하였습니다. 그럭저럭 용을 써서 해발 760m 되는 정상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14:50) 정상에는 “준•희”라는 분의 표지판이 붙어 있었는데 해발고도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준•희는 부부산악인으로 뵙지 못 한 분들인데 산행을 하며 봉우리 이름이 없는 곳에 많은 표지를 붙였는데 부인께서는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힘들게 올라 온 760봉에서 내려가는 길도 경사는 제법 있었지만 크게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길에 낙엽이 깔려있어 미끄러짐만 조심하면 되었습니다. 정상에서 수직으로 약 300m 네려간 독고불재에 도착했는데 집이 있었고 농장을 가꾸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독고불재에선 다시 올라가서 650봉을 넘은 다음 작은 봉우리들을 몇 개 넘은 다음 오리재에 도착했습니다.(15:45)
이제 마지막 작은 봉우리 하나 넘으면 당고개입니다. 지친 몸을 채근하며 숲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니 달성서씨 평장 묘역이 보이더니 바로 당고개를 통과하는 20번 국도가 보였습니다. 국도로 내려서니 휴게소가 있었는데 그곳이 당고개였습니다.(16:25)
이렇게 예상한 시간에 산행이 끝났습니다. 길이 진흙에 덮인 곳이 많았고 경사가 심한 몇 개의 산을 넘어야 했기에 쉬운 산행은 아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건천읍으로 나와서 “팔도오리”라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오후 6시쯤 서울을 향했습니다. 9시반경 양재역에 도착하여 전철로 비교적 일찍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의 흔적은 안개에 싸여 볼 수 없었으나 동문들과 힘을 합해서 낙동정맥길을 줄여 간 뜻깊은 산행이었습니다.
- 후기 -
우산은 준비했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아 산행에 도움이 되었고, 대신 운무가 주변을 가려서 먼 경치를 감상하지 못했습니다. 부산성이란 중요한 신라의 유적을 찾아 간다는 생각에 큰 기대를 하였으나 안개 때문에 지형지물을 달 살필 수 없었고 역사의 흔적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성곽의 생김새를 현장에서 전혀 파악할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웠습니다. 시간이 나면 다시 한 번 더 탐사해 볼 곳으로 남겨 둡니다. 인터넷의 부산성 설명입니다.
"경주 서쪽에 자리한 해발 729.5m의 부산(富山) 정상부를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감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깬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은 석성이다. 부산은 주사산(朱砂山)·오봉산(五峯山)·오로봉산(五老峯山)·닭벼슬산이라고 하므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불린다.
부산은 경주에서 대구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백제 군사가 이 산을 넘어 옥문곡(玉門谷, 女根谷)까지 침입하자, 문무왕이 도성(都城) 서쪽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경주 남산에 장창(長倉)을 건립하면서 함께 쌓았다.
산성은 661년(문무왕 1)에 쌓기 시작하여 3년만에 완공하였다.산성 밖의 지형은 4면 모두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한 천험(天險)의 요새이며, 산성 안은 평탄하고 물이 풍부하여 거주하기에 알맞다. 성벽은 가공하지 않은 안산암(安山岩) 석재를 안팎으로 쌓아 올리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우는 협축법(夾築法)으로 축조하였다. 성벽은 현재 대부분 무너져 돌들이 산허리에 널려 있지만, 성 안에는 남문(南門)터, 군량미를 비축하였던 군창(軍倉)터, 주암사(朱巖寺)터 등의 건물터와 함께 군사 훈련을 시켰던 연병장(鍊兵場)터, 연못터, 암문(暗門)터, 우물터 등이 남아 있다.
주암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절터 바로 북쪽에는 지맥석(持麥石)이라고 불리는 넓고 평평한 큰 돌이 있다. 이 돌은 1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로, 김유신(金庾信)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었고, 그 뒤 술을 빚어 군사들에게 준 곳이어서 지맥석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부산성은 신라 효소왕 때 득오(得烏)가 지은 향가「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의 주무대로 알려져 있다."
산행 후 시를 한 수 지었습니다.
[낙동정맥 제26차 종주에 부쳐]
엄청난 기가 흐르는
한국 땅 그 한 가운데
기를 타고 걷는다
백두산서 시작해서
두류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지나
구봉산서 낙동정맥으로 이어지고
백병산 주왕산 사룡산까지
기가 흘렀다
영남 알프스 먼저 지났고
단석산 천성산 금정산
남겨두었고
오늘은 신라땅 부산성이다
서라벌 서쪽에 부산성 높다
신라 화랑 죽지랑
예까지 손수 오시어
고생하던 득오를 해방했더니
득오가 답하여
모죽지랑가를 지었다
낙동의 전사들 현장에 와서
쇠락한 성터를 더듬어 보나
개스 속에 숨은 왕국
보이지 않네
그 사람이 정말 여기 서 있었을까
다리는 우리보다 튼튼했을까
보지 않고도 믿어야 신라가 있다
단석산 금정산 넘어서
다대포 몰운대 가면
영광의 골인인데
벌써 바닷내음 나는 듯
그날이 머지 않으니
더욱 준비하며 기다리련다
낙동의 여신이여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