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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2,206년 장대한 로마 역사의 심장부를 관통하며
오늘의 세계를 움직이는 12가지 코드
이 책 『로마사를 움직이는 12가지 힘』은 로마사 일본 최고 권위자이자 도쿄대 명예교수이며 『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의 저자인 모토무라 료지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로마사’ 관련 최고의 역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공화정’, ‘회복탄력성’, ‘공공성’, ‘대립과 경쟁’, ‘영웅과 황제’, ‘후계 구도’, ‘선정과 악정’, ‘5현제’, ‘혼돈’, ‘군인황제’, ‘유일신교’, ‘멸망’의 12가지 코드를 통해 2,206년 장대한 로마사를 명쾌하게 설명하며, 그 로마사가 오늘의 세계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날카롭게 통찰한다.
👨🏫 저자 소개
모토무라 료지
1947년 구마모토현에서 태어났다. 도쿄도립 기타타마고등학교를 거쳐 1973년 히토쓰바시대학교 사회학부를 졸업했다. 1980년 도쿄대학교대학원 인문과학 연구과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1984년부터 도쿄대학교 교양학부에서 조교수를 지냈으며, 1994년 교수로 승격했다. 1996년부터 도쿄대학교대학원 종합 문화연구과 교수로 활동했다. 2012년 도쿄대학교를 정년퇴직한 뒤 도쿄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다. 퇴직 후 전임직에서 벗어나 지금은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잡지 《KODAI》의 편집장으로 일본 고대 서양사 연구를 해외에 소개하고 있으며, 일본 서양 전학회 위원과 지중해 학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대 로마 사회사 전문으로, 산토리 학예상, 지중해 학회상, JRA마사 문화상(JRA賞馬事文化賞受賞: 일본 중앙 승마회에서 문학, 평론, 예술 등 문화 활동을 통해 승마문화 발전에 공헌한 사람에게 1987년부터 수여하는 상_ 옮긴이)을 수상했다. 저서로 『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다신교와 일신교』『로마제국 인물 열전』『말이 바꾼 세계사』『애욕의 로마사』『지중해 세계와 로마제국』 등이 있다.
📜 목차
글을 시작하며_ 로마 역사는 살아 있다
서문_ ‘도전과 응전의 제국’ 로마, 2206년 흥망성쇠의 비밀
part I
‘회복탄력성’과 ‘공공성’, 두 기둥으로 세계 제국이 된 로마
― 최대 경쟁자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를 통일하다
① Republican Government(공화정)
독재를 혐오한 로마인, 공화정을 선택하다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가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비니족 여성 대량 납치 사건’을 명령했다? | 로마 공화정 탄생의 기폭제가 된 ‘루크레티아 능욕 사건’ | 로마는 왜 그토록 독재를 경계했을까 | 고대 로마의 민주정(공화정)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정보다 1년 앞섰다고 | 500년 지속된 로마 공화정 vs. 50년 지속된 아테네 민주정 | 플라톤은 독재정,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정을 지지한 까닭은 | 고대 그리스가 로마처럼 세계 제국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
② Resilience(회복탄력성)
패배할수록 강해지는 로마군, 패배에서 배우는 로마인
‘로마 제2의 건국자’ 카밀루스는 어쩌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도 추방되다시피 했을까? | 카우디움 전투에서 삼니움족에게 당한 굴욕을 되갚아주고 대제국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로마군 | 막강한 로마군에게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안긴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 패전 장수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는 관용과 융통성이 로마를 대제국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 ‘한니발 전법’을 응용해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군대를 꺾은 명장 스키피오 | 스키피오는 왜 자신의 묘비에 “은혜를 모르는 조국이여, 너희는 내 뼈를 가질 자격이 없다”라는 글을 남겼나? | 관용의 로마가 카르타고에만은 관용을 베풀지 않고 초토화한 이유 | 보수파 원로원 의원 카토는 왜 스키피오를 그토록 끔찍이 싫어했을까?
③ Publicness(공공성)
로마인의 철두철미한 ‘공공성’이 제국으로 도약하는 디딤대였다?
고대 로마를 단순한 공화정이 아닌 ‘공화정 파시즘’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 | 인류 역사상 ‘공적 개념’을 최초로 발견한 민족, 로마인 | 로마인은 어떻게 그토록 강한 ‘공공 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 신앙심이 깊었던 로마인이 현세의 가호를 빌지 않은 까닭 | 고대 로마 명장 투베르투스는 왜 규율을 위반한 친아들의 목을 베었나? | 연대 책임에 기초한 형벌인 ‘10분의 1형’ 데키마티오를 엄격히 시행한 로마군
part Ⅱ
최고 영웅 카이사르와 최고 황제 아우구스투스,
로마를 반석 위에 세우다
― 율리우스-클라디우스 왕조의 성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④ Confrontation&Competition(대립과 경쟁)
‘대립’하며 혼란을 겪고, ‘경쟁’하며 발전하는 로마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 승리한 뒤 ‘승자의 저주’에 빠진 로마 | 명문 귀족 가문 출신 그라쿠스 형제가 가난한 평민을 위한 개혁에 나선 이유 |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곡물법 개혁안을 반대하던 원로원 의원은 왜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섰나? | 마리우스와 술라라는 간판을 내걸고 대립한 ‘평민파’와 ‘벌족파’ | 스파르타쿠스 난 진압으로 명성을 얻은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어쩌다 앙숙이 되었을까? | 독재자 술라의 압박에도 카이사르가 아내 코르넬리아와 이혼하지 않은 까닭은? | 폼페이우스 vs. 카이사르 내전에서 카이사르가 최종 승자가 되게 한 결정적 무게추는 그의 ‘관대함’이었다?
⑤ Heros&Emperors(영웅과 황제)
로마를 반석 위에 세운 최고의 영웅과 황제는?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라는 사적 관계는 공화정 말기 로마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 군대가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바뀌면서 병사의 충성 대상이 ‘국가’가 아닌 ‘장군’으로 바뀐 것이 로마 멸망의 보이지 않는 원인이었다? | 의원 정수를 늘리는 교묘한 방법으로 원로원을 장악한 정치 천재 카이사르 | 수많은 반대파와 정적에게 보여준 무한 관용이 부메랑이 되어 그의 심장에 꽂히다 | 안토니우스는 왜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대중 앞에서 공개했을까? | 고대 로마의 공화정 시대에 최고 신관이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보다 높은 직위였다고? |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왜 권력과 무관한 ‘최고 신관’ 지위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⑥ Succession Structure(후계 구도)
로마 제국의 ‘성쇠’를 좌우했던 후계 구도 문제
카이사르는 왜 병약하고 군사 재능도 뛰어나지 않은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점 찍었을까? |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과 민회가 부여한 온갖 특권을 정중히 사양한 까닭 | 아우구스투스는 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인간적으로 좋아하지도 않은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할 수밖에 없었을까? | 유능한 황제 티베리우스는 어쩌다 로마 시민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나? | 유혈이 낭자한 검투사의 경기에 로마인이 열광한 이유는? | 중병을 앓은 후 폭군으로 변한 ‘미치광이 황제’ 칼리굴라 | 유능한 통치자였으나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비운의 황제 클라우디우스 | 친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잔인하게 살해한 희대의 폭군 네로 | 네로가 기독교 신자를 박해했다는 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part Ⅲ
가장 행복했던 ‘5현제 시대’ 이후 찾아온
최악의 ‘군인황제 시대’
― 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 번영의 끝에서 몰락이 시작되다
⑦ Good Politics&Bad Politics(선정과 악정)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의 선정과 도미티아누스의 악정, 그 놀라운 결과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최고 지휘권에 관한 법령’으로 혼란을 잠재우다 | 재정 회복을 위해 소변에도 세금을 부과한 ‘현명한 짠돌이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 형 티투스의 선정 vs. 아우 도미티아누스의 악정 | ‘공화정 부활론’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세 명의 폭군, 칼리굴라·네로·도미티아누스
⑧ The Age of Five Good Emperors(5현제 시대)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현군들의 시대
네르바 황제가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한 ‘후계자 선택’이 로마의 5현제 시대를 열어준 역사의 아이러니 |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 트라야누스, ‘로마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를 열다 |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의 자녀를 위한 장학금 조성 정책인 ‘알리멘타’를 시행해 민중의 삶을 개선한 현군 트라야누스 | 트라야누스, 연이은 원정 승리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로마 제국을 이룩하다 | 하드리아누스는 과연 전임 황제 트라야누스의 지명이 아닌 황후 플로티나의 계략으로 제위에 올랐을까? | 하드리아누스, 제위에 오른 후 자신에게 쏟아진 불신과 혼란을 탁월한 정책과 업적으로 잠재우다 | 치세 기간의 절반을 속주 시찰에 할애하면서도 ‘하드리아누스 르네상스’를 이루고 대제국의 내실을 다진 또 한 명의 현군 | 유대 반란에 후계자 사망, 건강 악화까지 불운으로 점철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만년 | 내정과 외정을 두루 안정시켜 5현제 중 가장 뛰어난 황제로 평가받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역사상 최초로 ‘공동 통치 체제’를 구축하다 | 아우렐리우스가 플라톤의 이상에 부합하는 황제인 까닭
⑨ The Beginning of Chaos(혼돈의 시작)
막장 황제들이 활개 치고 제위를 사고팔던 참담한 시대
로마 역사상 최악의 황제로 기록된 코모두스, 돈으로 평화를 사고 기행을 일삼다 | 근위대에게 돈을 주고 제위를 샀으나 66일 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어리석은 황제 디디우스 | 로마를 ‘로마인의 제국’에서 ‘로마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북아프리카 출신 황제 세베루스 | 공동 통치자인 친동생 게타를 암살하고 ‘기록말살형’에 처한 폭군 카라칼라 | 여장과 동성애 등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제국을 혼란에 빠뜨린 ‘광인 폭군 황제’ 엘라가발루스
part IV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 로마 멸망
― 관용을 상실한 로마, 멸망의 길로 질주하다
⑩ The Military Emperors’ Time(군인황제 시대)
최고의 세계 제국 로마를 멸망으로 몰고 간 최악의 황제들
로마 제국 멸망을 ‘쇠퇴·멸망 시대’가 아닌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변혁 시대‘로 보아야 한다? | 로마 제국 황제의 출신지가 이탈리아반도가 아닌 발칸반도에 집중된 까닭 | 로마 제국을 멸망의 길로 몰고 간 군인황제 시대를 열어젖힌 최악의 황제 막시미누스 트락스 | 고트족 침공을 막기 위해 군대의 전권을 맡긴 데키우스에 의해 제위를 잃은 아랍 출신 황제 필리푸스 | 내정 질서를 수립하고 민심을 바로잡은 ‘명군’ 데키우스가 ‘폭군’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기독교 박해’ 때문이었다? | 로마 역사상 최초로 이민족의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죽은 황제 발레리아누스 | 로마 제국의 판도 안에 ‘삼국시대(로마 제국·팔미라 왕국·갈리아 제국)’가 형성된 적이 있다고? | 팔미라 왕국·갈리아 제국을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한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 로마 제국의 고질병이 되어 50년간 이어진 ‘황제 암살 사건’ | ‘3세기의 위기’를 초래한 군인황제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개혁을 완성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⑪ The Monotheistic World Empire(유일신교 세계 제국)
유일신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 어떤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불러일으켰나?
위대한 개혁 군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범죄의 창조자’로 폄하된 이유는 ‘기독교 박해’ 때문이었다? |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의 옛 신앙’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권력과 권위를 황제에게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고? | 77명의 정식 로마 황제 중 스스로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난 유일무이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 공동 황제 시대의 혼란에 마침표를 찍고 로마를 재통일하며 단독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 콘스탄티누스, 순도 99.8퍼센트 금화 ‘솔리두스’를 무기로 화폐 개혁에 성공하며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다 | 임종 직전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된 콘스탄티누스가 다른 황제들과 함께 로마의 ‘신’이 된 아이러니 | 오랫동안 정체돼 있던 기독교 신자 수가 3~4세기 군인황제 시대에 급증한 이유는 세상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 율리아누스 황제가 30대 초반에 죽지 않고 20년만 더 살았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황제들이 그토록 열심히 기독교 보호 정책을 펼친 뜻밖의 이유는? | ‘관용 상실’이 로마 제국 멸망의 첫 번째 원인이라고? | 유능한 황제 테오도시우스를 유일하게 무릎 꿇린 인물,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
⑫ The Fall of the Roman Empire(로마 제국 멸망)
‘관용’을 잃어버린 로마, 자기 심장에 비수를 꽂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영원히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라진 로마 제국 |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이름이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와 같은 얄궂은 운명과 역사의 아이러니 | 20년에 걸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영토 확장 정책이 오히려 동로마 제국의 수명을 단축시켰다는데? | ‘세 개의 세계’가 로마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던 고대 지중해 세계가 중세에 다시 ‘세 개의 세계’로 분열하며 새 시대를 열다 | 지금까지 나온 로마 제국 멸망 원인이 210가지에 달한다고? | 노예가 노예를 낳아 새로운 노예를 충당할 수 없었던 시대의 로마는 어떻게 400년간이나 노예제를 유지할 수 있었나? | 로마의 ‘공공 의식’ 상실이 인프라 노후화로 이어졌고, 멸망을 앞당기는 원인이 되었다? | 로마 제국의 ‘황제 권력 상실’이 역설적으로 권력을 회복한 듯 보였던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까닭 | 서로마 제국 멸망은 어느 날 갑자기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로 밀고 들어오며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과 제정 시대의 로마인이 전혀 다른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유는? | 3세기 로마 제국 내 기독교 신자 수가 급증한 또 하나의 원인, ‘스토아 철학’ 확산 | 관용이 사라진 로마 제국 말기 상황과 닮은꼴인 현대 사회가 나아갈 길은?
📖 책 속으로
막 걸음마 단계의 나라를 다스리던 로물루스왕에게는 로마에 아기를 낳아줄 가임기 여성이 부족하다는 고민이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구가 감소해 머지않아 로마라는 나라가 없어질 수도 있는 위기였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로물루스왕은 로마와 이웃한 사비니라는 나라에서 여성을 납치해 온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아내와 딸을 빼앗긴 사비니 사람들도 당연히 가만있을 리 없었다. 사비니 사람들은 로마에 복수를 맹세했고 이윽고 두 나라는 서로 칼끝을 겨누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런데 팽팽하게 대립 중인 두 나라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자 역할을 자처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로마에 억지로 끌려간 사비니 여성들이었다. “어느 쪽에서 희생자가 나오든 슬픔을 감내해야 합니다. 부디 싸움을 멈춰주세요.” 사비니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사비니가 패하면 자신들의 아버지와 형제가 죽임을 당하고, 로마가 패하면 남편과 어린 아들이 죽임을 당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억지로 끌려갔으니 그들도 처음에는 로마인을 원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살을 맞대고 함께 산 지 일 년이 지나 아이가 태어나면서 사비니 여인들의 마음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사비니 여성들이 평화를 호소하자 로마와 사비니 사이의 분쟁은 조정 국면에 접어들었고 바야흐로 양국은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 p.28~29
물론 로마도 비겁하게 싸운 자나 자신만 살려고 적 앞에서 도망친 자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하지만 용감하게 싸우다 패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관대하게 받아주며 다음번에 설욕할 기회를 주었다. 칸나에 전투에서 7만 명의 사망자를 낸 패전 장수 바로도 로마로 무사히 귀환했고 로마는 그를 모질게 내치지 않았다. 로마가 패전 장수에게 관용을 베푼 데는 이유가 있었다. 로마인이라는 긍지를 지닌 그들에게 패배를 맛본 순간의 굴욕이 이미 충분한 사회적 재판이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패전 장수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기회가 생기면 다시 장수로 기용해 설욕할 기회를 주었다. 로마인은 실패할 경우 그 실패에서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로마인이 몇 번이고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면서도 언제나 최후의 승자가 되었던 비결은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모름지기 로마인이라면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힘이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 p.77
기원전 123년 티베리우스보다 여덟 살 어린 가이우스도 형의 뒤를 이어 호민관으로 취임해 국가 재편에 매진했다. 가이우스의 개혁은 형의 유지를 이으면서도 원로원의 지배 영역을 깊숙이 파고드는 대담한 정책이었다. 가이우스의 개혁이 한창이던 와중에 흥미로운 일화가 남아 있다. 당시 주요 식량인 곡물을 수입에 의존하던 로마에서는 기상 이변 등 여러 요인이 겹치며 곡물 가격이 크게 요동쳤다. 가난한 사람들은 곡물 가격이 상승하자마자 배를 곯기 시작했다. 가이우스는 경제적 약자들이 곡물 배급을 받을 수 있도록 곡물법을 제정했다. 그 당시 곡물 배급을 받으러 민중들이 늘어선 줄에 곡물법 제정에 반대하던 유력 원로원 의원이 끼어 있었다.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위한 배급입니다. 왜 당신이 여기 있습니까?” “내 몫을 찾으러 왔소. 나한테 뜯어간 세금 아니오. 그러니 내 몫을 찾아가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 p.126
마리우스는 기존에 입대 자격이 없던 무산 시민의 입대를 허용해 징병제였던 군대를 모병제로 바꾸었다. 토지를 잃고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가 된 무산 시민들에게 입대는 엄청난 기회였다. 입대하면 의식주가 제공된다. 숙식 걱정이 없어지는 데다 꼬박꼬박 급여까지 나온다. 운이 좋으면 전쟁에서 전리품을 챙길 수도 있다. 군대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뀌며 병사가 충성을 맹세하는 대상도 바뀌었다. 그때까지는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국을 위해 싸웠는데, 이후로는 입대 자격을 준 직속 장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장군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게 됐다. 이런 장군과 사병의 관계가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관계로 자리 잡았다. 마리우스와 술라가 대립각을 세웠던 시대에 이 구조는 엄청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때까지 로마는 적대 관계가 탄생해도 어디까지나 개인 대 개인의 관계였다. 그러다가 장군과 사병 관계가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관계로 굳어지며 무력을 갖춘 조직 사이의 항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 p.149~150
네로의 국고 탕진과 귀족의 처형 및 재산 몰수, 그리고 황제 자리를 둘러싼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올랐을 때 로마의 재정은 이미 바닥이 드러난 상태였다. 새 황제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재정 건전성 회복이었다. 그런데 새 황제의 독특한 방식에 로마인들은 기절초풍했다. 각지에 세리를 파견해 세금을 엄격하게 징수하는 건 기본이고 관직을 법에 정해진 가격 이상으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매매했다. 심지어 공중화장실을 여기저기 지어 화장실에서 모은 소변에 세금을 매겼는데 그런 정책에 로마인들은 기함했다. 당시 모직물 염색과 세탁에 사용되던 소변은 염색업자에게 꼭 필요한 재료였다. 거기에 눈독을 들인 황제는 공중화장실에서 모은 소변을 사용하는 염색업자에게 사용료 명목으로 세금을 징수했다. 현재 이탈리아어로 공중화장실을 뜻하는 ‘베스파시아노(Vespasiano)’는 이 시대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 p.217~218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드리아해를 끼고 이탈리아반도와 마주 보는 스팔라토(Spalato, 오늘날의 크로아티아)의 별장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11년경에 눈을 감았다고 전해지는데, 은퇴하고 나서 6년여 동안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별장에서 보낸 셈이다. 은퇴 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어떻게 생활했는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딱 한 차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308년 11월, 도나우강 유역의 카르눈툼(Carnumtum)이라는 요새에서 열린 황제 회의 자리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은퇴한 후 새로운 정제와 부제가 정권을 잡았지만 그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과 반목이 발생했다. 그래서 회의 석상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복귀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청을 거절했다. “내가 텃밭에 심은 양배추를 얼마나 정성껏 돌보는지 알면 그런 부탁은 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는 두 번 다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p.341
🖋 출판사 서평
“로마 이전의 모든 역사는 로마로 흘러들어갔고,
로마 이후의 역사는 로마로부터 흘러 나왔다.”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왜 우리는 로마사를 공부해야 할까?’, ‘2,206년 로마 역사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 이런 질문 앞에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게 될 수도 있다. ‘기원전 753년에 세워져서 1453년 동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로마사는 이미 과거의 일이 아닌가?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로마라는 나라와 그 나라의 역사가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중요하다는 거지?’
당신의 의문에 두 가지로 답변할 수 있겠다. 첫째, 이 책의 저자 모토무라 료지가 자신의 다른 책 『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에서 ‘세계사를 움직이는 7가지 코드(힘)’ 중 일곱 번째로 꼽은 ‘현재성’에 기대어서다. 그 책에서 저자는 “모든 역사는 현재사다”라고 언명한다. 이는 역사란 어느 한순간, 한 장면도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오늘, 지금 이 순간으로 이어지고 확장하며 ‘현재성’을 획득해간다는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2,206년간의 로마 역사 역시 어느 한순간, 한 장면도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오늘, 지금 이 순간으로 이어지고 확장하며 ‘현재성’을 획득해간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로마사에는 인류의 경험이 응축되어 있다”, “로마사는 사회학의 실험장이다”라는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의 말과 “로마 이전의 모든 역사는 로마로 흘러 들어갔고, 로마 이후의 역사는 로마로부터 흘러나왔다”라는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의 말에 기대어서다. 두 학자의 말대로,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로마사의 위상과 무게감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 세계사를 찬찬히 톺아보면 랑케의 말대로 “로마 이전의 모든 역사는 로마로 흘러 들어갔고, 로마 이후의 역사는 로마로부터 흘러나왔”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고대 그리스 역사와 카르타고를 비롯한 고대 지중해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 흡수되었고, 중세의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대부분의 유럽 역사가 로마사라는 거대한 수원(水源)에서 흘러나왔으며, 그 영향이 오늘날 대부분의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 『로마사를 움직이는 12가지 힘』의 본문 맨 앞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가 한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치자.
“반세기 가까이 로마사를 연구해온 나는 연구 과정에서 눈에 들어온 깨달음이 적지 않다. 가령 세계 제국으로서의 로마 제국을 원형으로 삼는다면 근대 해양 제국 중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대해서도, 식민지를 줄줄이 거느린 대영제국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이해가 가능하리라 믿는다. 또 21세기 미국이라는 ‘제국’과 중국이라는 ‘제국’에 대해서도 로마사를 좌표축으로 삼으면 모종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 비극은 되풀이해서 ‘휴브리스(Hubris, 오만·교만)’가 비극의 원인이라고 가르친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사는 대단하다’는 주장을 남발하면 휴브리스의 교훈을 거스르게 된다. 그러나 ‘세계사라는 바다를 항해할 때 로마사를 좌표축으로 삼는다면 학습 효과가 달라지리라고 자부한다.”
2,206년 장대한 로마사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12가지 코드
이 책 『로마사를 움직이는 12가지 힘』은 로마사 일본 최고 권위자이자 도쿄대 명예교수이며 『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의 저자인 모토무라 료지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로마사’ 관련 최고의 역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공화정’, ‘회복탄력성’, ‘공공성’, ‘대립과 경쟁’, ‘영웅과 황제’, ‘후계 구도’, ‘선정과 악정’, ‘5현제’, ‘혼돈’, ‘군인황제’, ‘유일신교’, ‘멸망’의 12가지 코드를 통해 2,206년 장대한 로마사를 명쾌하게 설명하며, 그 로마사가 오늘의 세계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날카롭게 통찰한다.
1. 공화정(Republican Government) ─ 로마를 지탱하는 중심축의 하나인 ‘공화정’은 어떻게 성립되었을까? 흥미롭게도, 이는 이민족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제7대 로마 군주가 된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로마의 귀족 콜라티누스의 아내로, 아름답고 정숙한 유부녀 루크레티아를 겁탈한 사건에 로마인들이 대응하는 과정에 형성되고 자리 잡았다. 로마인들이 독재 정치와 독재자를 그토록 경계한 연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2. 회복탄력성(Resilience) ─ 많은 시련과 역경, 실패를 오히려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하는 ‘회복탄력성’은 로마인의 가장 대표적인 자질 중 하나다. 로마인은 오랜 세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승리와 패배, 영광과 치욕의 순간을 겪었는데, 패배와 치욕의 시간마다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실패에서 교훈을 배우며 그 쓰라린 패배와 치욕을 찬란한 승리와 영광으로 바꾸어냈다.
그중 하나로, 기원전 321년 삼니움족과 벌인 카우디움 전투에서 참패한 로마군과 로마인이 이후 그 쓰라린 패배의 굴욕에 무너지지 않고 절치부심하며 새로운 집정관을 선출, 군단을 재편성한 뒤 끝내 삼니움군을 무찌르고 멋지게 원수를 갚아준 사례를 들 수 있다.
또 하나의 사례는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이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에게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해 멸망 직전의 상황까지 내몰렸으나 끝내 좌절하지 않고 스키피오를 사령관으로 임명, 군대를 정비하고 오히려 한니발의 전법을 효과적으로 벤치마킹해 최종 승리를 거두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일이다. 그러나 회복탄력성을 잃어버렸을 때 로마인은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을 겪다가 게르만족과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멸망했다.
3. 공공성(Publicness) ─ 로마인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공적 개념’, 즉 ‘공공성’을 발견한 민족이다. 실제로 고대 로마는 예컨대 당대의 경쟁국 페르시아나 그리스와는 달리 조국, 국가 등 ‘공공’에 헌신한다는 마음가짐을 귀족은 물론 민중까지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철두철미한 ‘공공성’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시국가 중 하나였던 로마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도약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결국 로마인의 ‘공공성 상실’은 인프라 노후화로 이어졌고 멸망을 앞당기는 원인이 되었다.
4. 대립과 경쟁(Confrontation&Competition) ─ 숙적 카르타고와 벌인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하고 제국의 기틀을 다진 로마는 이내 ‘승자의 저주’에 빠졌다. 정복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얻은 막대한 전리품과 토지 등의 부가 귀족 등의 일부 기득권층에 의해 독점되면서 빈부의 격차가 켜졌고, 오래 이어진 전란의 영향으로 농지가 황폐해지면서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농지를 등지게 되자 귀족들이 그 토지를 차지해 부를 늘림으로써 빈부의 격차가 더욱더 심해진 탓이었다.
이렇게 되자 로마 사회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주와 농민(소작농)’, ‘귀족과 평민’ 등으로 극심한 대립과 갈등이 빚어졌다. 이로 인한 심각한 사회 문제를 극복하고,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평민의 권리와 이익을 되찾아주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가 개혁을 시도했으나 귀족 등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로 좌절되고 두 형제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로마는 각각 마리우스와 술라라는 간판을 내걸고 ‘평민파’와 ‘벌족파’가 치열하게 대립하며 혼란과 공포의 시기를 보냈으며 원로원을 끼고 두 걸출한 영웅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내전까지 겪으며 경쟁하는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했다.
5. 영웅과 황제(Heros&Emperors) ─ 2,206년 로마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웅을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카이사르’다. 그는 8년간의 갈리아 원정을 통해 로마의 영토를 비약적으로 넓혔고, 역사상 그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대단한 전공을 세웠으며, 최고의 라이벌 폼페이우스와의 경쟁에서 열악한 상황과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로마를 개혁하기 시작했고 대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그렇다면 로마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황제를 꼽으라면 누구일까? 5현제 시대의 다섯 황제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등의 명군도 있지만,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올라 초대 황제가 되면서 로마를 대제국으로 발돋움시키고 국력을 다지고 민생을 안정시킨 ‘아우구스투스’를 꼽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이 두 걸출한 영웅과 황제가 통치하는 시대에 로마는 위대한 세계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6. 후계 구도(Succession Structure) ─ 카이사르는 공화파에 의해 암살당하기 전, 왜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인 데다 병약하고 군사 재능도 뛰어나지 않은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을까? 이는 카이사르가 자신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지닌 탁월한 ‘위정자의 자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마 역사상 최악의 군주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찬란한 5현제 시대의 문을 연 네르바가 자신의 후계자로 트라야누스를,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하드리아누스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지명했을 때 로마는 ‘흥’과 ‘성’의 길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가 군왕의 자질이 없는 자기 아들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을 때 제국의 미래에 암울한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는 ‘후계 구도’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7. 선정과 악정(Good Poitics&Bad Politics) ─ 희대의 폭군 네로가 죽고, 100년 가까이 이어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로마는 누구를 제위에 앉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런 심한 혼란 속에서 고작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군대의 힘을 입은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줄줄이 서로 죽이고 죽으며 제위를 차지했다. ‘세 황제의 난립기’를 종식하고 로마를 안정시키며 새로운 왕조를 성립한 이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그는 ‘최고 지휘권에 관한 법령’을 제정하여 로마 제국의 극심한 혼란을 잠재웠다. 또 그는 소변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등의 ‘현명한 짠돌이 정책’으로 재정 회복을 이루며 선정을 베풀었다.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꼽히는 ‘콜로세움’이 세워진 것도 그의 치세에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서거한 후 그의 큰아들 티투스가 제위에 올랐다. 그는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2년 3개월이라는 짧은 치세 동안 폼페이 피해자를 성심성의껏 구제하고 100일간 경기를 개최해 실의에 빠진 민중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둘째 아들이자 티투스 황제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르자 그는 무차별 학살과 시행을 일삼으며 재위 기간을 악정으로 채웠다.
8. 5현제(Five Good Emperors) ─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현군들의 시대’로 칭송받는 5현제 시대의 문을 연 주인공은 네르바 황제다. 그런데 그가 5현제 시대를 열게 된 배경에는 약간 우연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한 내막이 숨어 있다. 이는 황제였던 그가 군대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한 ‘후계자 선택’이 역설적으로 가장 찬란한 ‘5현제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네르바 황제로부터 시작된 5현제 시대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를 지나며 로마 제국을 반석 위에 세웠으며, 90여 년간 안팎으로 평온하고 행복한 시대를 맞이하게 해준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상에 가장 부합하는 황제’로 꼽히는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좀 더 정확히는 그의 사심이 담긴 어리석은 후계자 지명으로 인해 현군들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고 극심한 혼란의 시기와 군인황제 시대를 거쳐 멸망의 길로 달려간 것은 또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9. 혼돈(Chaos) ─ 5현제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그의 아들 콤모두스는 돈으로 평화를 사고 온갖 기행과 악행을 일삼으며 제국을 안팎으로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추락시킨다. 그 탓에 그는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 그리고 군인황제 시대 최악의 황제들과 함께 로마를 멸망으로 몰고 간 원흉으로 지목받는다.
그의 사후 로마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다가 급기야 지위를 경매에 부쳐 돈으로 사고파는 목불인견의 상황까지 겪다가 그 끝에서 또 다른 최악의 황제 엘라가발루스까지 등장해 제국을 수습 불가능한 혼란의 절정으로 몰고 가는데…….
10. 군인황제(Military Emperors) ─ 혼돈의 시대를 지난 로마는 최고의 세계 제국을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간 최악의 황제들을 연이어 만나게 된다. 이른바 ‘군인황제 시대’의 시작이다. 끔찍한 군인황제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장본인은 알렉산데르 황제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거인 황제’ 막시미누스 트락스다. 이후 군인황제 시대는 수십 명의 피로 물든 군인황제를 배출하며 우여곡절을 겪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대에 이르러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11. 유일신교(Monotheism) ─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제2대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 시대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성립되고 로마 제국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한 기독교는 오랫동안 신자 수가 늘지 않고 정체해 있었다. 그러다가 3~4세기 군인황제 시대에 눈에 띄게 신자 수가 많아지고 세력도 강해졌다. 이유가 뭘까?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당대의 기독교가 유대인에 갇혀 있던 ‘민족의 벽’, 대도시 가난한 사람들에 갇혀 있던 ‘계급의 벽’, 대도시에 갇혀 있던 ‘거주지의 벽’이라는 세 가지 벽을 성공적으로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세상이 혼란하고 어수선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제국은 황제가 난립하고, 군인이 함부로 무력을 행사하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삶이 팍팍해지고, 국경에서는 이민족이 수시로 침입하고, 전장에서 돌아온 군인이 도시에 역병을 퍼뜨리는 등 그야말로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암담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독교의 ‘유일 절대신’이라는 강력한 신이 장악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이후 급성장한 유일신교 기독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등의 시대에 탄압받다가 콘스탄티누스 이후 대다수 황제에 의해 비호받으며 제국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12. 멸망(Fall) ─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 자라고 번성하다가 쇠퇴의 과정을 거쳐 죽고 소멸해간다. 이는 자연의 이치이며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마치 생명체처럼 탄생과 발전, 번영과 쇠퇴를 거쳐 몰락하고 사멸한다. 이것이 우리가 쉼 없이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로마사는 탄생과 발전, 부흥과 쇠락이라는 문명의 기승전결 과정을 그 어떤 나라의 역사보다 뚜렷이 보여준다. 더구나 그 기승전결이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의 한평생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극적이다.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나온 주장을 모두 합하면 210가지나 된다고 한다. 이것을 한 가지로 압축해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관용을 잃어버린 로마, 자기 심장에 비수를 꽂다!’ 정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