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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팔로군(八路軍) 간부 출신으로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총사령관이 되어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수행한 김무정(金武亭) 장군
문대식 추천 0 조회 70 20.04.15 14: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30년대 말기와 1940년대 초기에 중국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제8로군 포병단장과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 군사위원장으로서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에 참전,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우고 8·15광복 이후 북한의 민족보위성 부상과 인민군 제2군단장을 역임했던 김무정(金武亭) 장군은 팽덕회(彭德懷)가 이끄는 홍군(紅軍) 제3군단에 소속되어 유명한 대장정(大長征)에 참가했던 조선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1905년에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김무정 장군은 14세 때에 3·1운동에 참가하였고, 서울 기독교중학교를 졸업한 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가난으로 학비를 내지 못해 18세 때에 퇴학당하였다.

 

식민지시기에 일제의 압제로 신음하는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중국의 북경으로 망명한 그는 19세 때에 중국 하북성의 보정군관학교 포병과에 들어가 군사학을 공부하였고, 22세의 젊은 나이에 포병대 중좌가 되었다. 1924년에 포병과를 졸업한 뒤 그 이듬해에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에 입당하였다. 그 후 김무정은 상해에 가서 중국 공산당 상해 조선인 지부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서금(瑞金)에 가서 중국 노농홍군(勞農紅軍)에 입대하였다.

 

서금은 제2차 국공내전(國共內戰) 시기에 중앙 소비에트 구역이라고 불리었고, 그곳에는 30여명의 조선인 반일운동자들이 있었다. 김무정은 1930년 7월 동정호전투(洞庭湖戰鬪)가 한창일 때에 팽덕회 장군이 전위서기로 있던 홍군 제3군단에 소속되었다. 홍군이 국민당 군대로부터 노획한 야전포(野戰砲) 4문과 산포(山砲) 2문을 수중에 장악하고 있던 김무정은 팽덕회를 찾아가 포격전으로 적군을 격파할 전술을 건의하였다. 팽덕회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자, 김무정은 병사들에게 포격 요령을 가르치고 포신에 포탄을 장탄하도록 하였다. 적군이 다가오자 김무정은 친히 포신을 적진에 조준하면서 포격을 전개하였는데, 적군은 무더기로 쓰러지며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 후 김무정은 홍군 제3군단의 포병연장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홍군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1934년 2월에 세계사를 뒤흔든 2만 5천리의 대장정(大長征)이 시작되었다. 홍군대학과 팽양보병학교, 및 특과학교 4개소의 홍군학교 생도들로 홍색간부단이 편성되었는데, 단장은 진갱(陳羹)이며 정치위원은 송임궁(宋任窮)이었다. 양림(楊林)은 이 간부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홍군특과학교의 교장 겸 포병영장으로 있던 김무정은 중앙군사위원회 기간요원들로 구성된 군사위원회 제1종대 제3대대의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어 대장정의 길에 참여했다. 대도하를 건너고 설산을 넘어 파서에 이르렀을 때였다.

 

장국도는 각 군과 당 중앙과의 연계를 끊어버리고 자기의 우세한 병력으로 홍군 제3군단을 남하하도록 강박하기 위하여 홍군 제4방면군의 무전암호를 거두어들였다. 장국도의 이 음모를 분쇄하려면 홍군 제3군단은 아계로 진출한 홍군 제1방면군과 무전연계를 가져야 했다. 그러자면 홍군 제3군단에서 만든 무전암호를 제1방면군에 보내주어야 했다. 이 중요한 임무를 팽덕회는 김무정에게 맡겼던 것이다. 인적없는 초원에서 홀로 길잡이도 없이 방향을 잡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김무정은 지남침(指南針)을 들고 북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던 그는 물웅덩이 옆에서 풀무데기 하나를 발견했는데 헤치고 보니 한 홍군 전사의 시체가 묻혀있었다. 그는 다시 시체를 묻고 얼마간 걸었는데 앞에 솥을 걸었던 자리가 있어서 만져보니 온기가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다그쳐 끝내 제1방면군의 대오를 따라잡고 무전암호를 넘겨주었다. 

홍군은 아계를 지나 백룡강 량안의 험준한 낭떠러지인 랍자구의 천험을 정복하였다. 팽덕회의 조수로 일하던 김무정은 부대를 따라 행군하였다. 중앙 홍군에는 조선인이 원래 1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장정의 길에 올랐다. 하지만 장정도중에 조선인 전사들은 대부분이 희생되고 섬북에 도착한 사람은 김무정과 양림 두사람이였다.

 

1936년 2월 홍군은 중앙의 지시에 따라 일제(日帝)의 침략군과 싸우기 위하여 황하를 건너 동정(東征)을 시작하였다. 홍군 동정부대는 팽덕회가 지휘하였는데 김무정과 양림도 출전하였다. 황하 도강작전은 동정부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김무정은 용감하고 지혜롭게 정찰임무를 완성하였다. 한달동안의 준비가 끝나자 모택동(毛澤東)의 지시에 따라 제15군단 제75사단의 참모장이던 양림은 소속 제223단 제1영을 지휘하여 도하작전의 선봉대가 되고 김무정은 참모가 되였다. 작전임무를 완수한후 김무정은 홍군대학에서 특과영장으로 있으면서 포병간부와 포사격수를 양성하였다.

 

1937년 8월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18집단군)으로 개편되였다. 김무정은 팔로군 총부 작전과장으로 임명되었다. 주덕(朱德)과 팽덕회의 총애와 신임을 받은 그는 성격이 과격하였지만 군인으로서의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팽덕회의 주선으로 직속포병단의 한 지도원과 결혼한 김무정은 평소에는 라서경(羅瑞卿)과 함께 숙식하였다. 1937년말에 김무정은 부대를 거느리고 진서남 임분에 주둔하고 있었다. 항일전(抗日戰)의 새로운 변화에 따라 팔로군 총부에서는 포병단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총부에서는 김무정에게 그가 거느리고 있는 병력을 기초로 평양·평성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총부직속 유격제2대를 접수하여 포병단을 편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총병력이 1천여명에 달하는 포병단이 건립되였는데 포병단에는 6개 연대가 있고 그외에 봉사기관과 관찰통신대 및 선전대가 있었다. 이 포병단은 팔로군에서 처음으로 창건된 포병부대였다. 팔로군 총부에서는 김무정을 단장으로, 구창선을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였다. 1938년 1월 28일 임분부근의 유촌과 와구지간의 한 광장에서 포병단성립대회가 열렸다. 팔로군 판사처 주임 팽설풍(彭雪楓)이 중공중앙군사위원회의 임명서를 낭독하고 중앙북방국 책임자 양상곤(楊尙昆)이 축사를 하였으며 항일구국10대강령을 낭독하였다. 대회가 끝난후 김무정의 제의에 의해 포병단의 명의로 전국에 팔로군 포병단의 성립을 알리는 통보를 발표하였다.

 

1938년 2월 일본군은 태원을 점령한 후 계속하여 진남을 침공하였다. 포병단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연안을 거쳐 낙천으로 가 정비훈련을 하였다. 이 기간에 주은래(周恩來)와 주덕·팽덕회가 포병단을 시찰하였다. 주은래는 짧은 시일내에 포병단양병이 신속하게 궤도에 오르고 훌륭한 성과를 올렸다고 치하하였다. 그후 동필무(董必武)·하룡(賀龍)도 포병단을 시찰하고 격려하였다. 정비훈련을 거쳐 포병단은 5월에 황하를 건너 중양현에서 류백승(劉伯承)·등소평(鄧小平)이 지휘하는 제129사단과 연합하여 전투를 벌였고 일본군이 섬감영변구에 침입했을 때 4연대·9연대·관찰통신대의 일부 병력이 황하가의 미가천에서 포진지를 구축하고 변구를 보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0년 국내외를 진감한 백단대전이 벌어졌다. 총부 포병단은 정태선전역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에 따라 김무정 장군은 부대를 거느리고 적진지의 가까이에 대포를 걸어놓고 포격하여 적의 토치카를 박살냄으로써 부대의 작전을 엄호하고 진공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포병단은 중일전쟁의 포화속에서 전투의 경험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장성하였다. 이때 포병단에 소속되였던 지휘관과 병사들은 그 후 중국 인민해방군의 여러 포병부대에서 활약하였고 많은 고위급 지휘관들이 나왔다.

 

백단대전이 끝난후 팔로군내의 조선인 간부들을 앞으로 본 민족간부양성에 중점을 두라는 중앙의 지시에 따라 김무정은 관내 여러 지방에서 활동하고있는 조선인 항일투쟁단체들을 통합하는 사업을 맡게 되였다. 당시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팔로군과 신사군이 활동하던 각 유격구내에는 김무정과 같은 많은 조선인 반일운동자들이 팔로군·신사군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항거하고 있었다. 1939년 초기에 연안에서 김무정 등 조선인 반일운동자 12명이 중국관내지구의 많은 저명한 항일독립운동가 백범(白凡) 김구(金九)·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등 26명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내의 항일투쟁단체들이 합작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황하 이남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대부분이 황하를 넘어 그 활동지역을 화북으로 지정하였다.

 

김무정은 중앙의 지시를 받고 1941년 1월 10일에 팔로군의 근거지인 산서성 요현 동욕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개최하였다. 회의는 3일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첫날 회의에는 팔로군 부사령관 팽덕회가 축사를 하였다. 마지막 날에는 여섯가지 강령을 발표하였다. 회장에 김무정, 조직부장에 이유민, 선전부장에 장지광, 경제부장에 한덕지로 결정한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1941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조선의용대 대부분의 대원들이 차례로 낙양에서 산서성 요현 동욕에 도착하였고 따라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접촉하고 연계하였다. 1941년 7월 산서 요현 동욕에 있는 조선의용대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의 영도를 받아들여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화북지대(華北支隊)로 개편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성립 후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영도하에 대원들은 모두 무기를 갖추고 화북의 태항산과 진찰기변구 산서 중부, 산동, 안휘 등지의 유격구와 항일근거지에서 활동하였고 팔로군·신사군과 함께 작전에 참가하여 투쟁과 선전을 진행하였다. 1942년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태항산에서 제4차 대표대회를 열었다. 회의는 4일동안 열렸고 참석인원은 20여명이였다. 팔로군 부사령관 팽덕회가 당 중앙과 팔로군의 대표로 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 대회는 여러 차례의 토론을 거쳐 화북조선청년련연합회를 확대, 개편하고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으로 명칭을 바꾸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개편할 것을 전원일치로 결의하였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군정연합의 통일체로 규정하였다. 화북조선독립동맹 제1기 집행위원은 김두봉, 김무정, 최창익, 박효삼, 김학무, 채야화, 김창만, 왕지연, 리유민, 진한중, 리춘암이였고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은 김무정, 부사령은 박효삼과 박일우였다. 사령부는 잠시 동욕에 두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의용군은 조선독립동맹의 지도하에 팔로군과 함께 작전을 벌여 일본군 및 만주국군을 상대로 용맹스런 전투를 전개하였다.

 

인재양성을 위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총부는 군정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화북조선간부훈련반으로 명칭을 달았다가 후에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44년에는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8·15광복까지 이 학교의 교장은 김무정 장군이 직접 맡았다.  

1945년 8월 중일전쟁의 승리가 눈앞에 박두하자 팔로군 총사령관 주덕은 김무정이 지휘하는 조선의용군에게 팔로군 총부의 제6호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은 다음과 같다.

“중국과 조선경내로 진출하여 쏘련홍군과 합동작전을 하고 조선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나는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하고있는 조선의용군 무정사령원과 박효삼, 박일우 부사령원에게 소속부대를 통솔하고 팔로군과 원동북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괴뢰군을 소멸하고 동북에 있는 조선인민을 조직함으로써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것을 명령한다.”

 

총사령관 주덕 장군의 명령에 따라 관내에 있던 조선의용군은 김무정 장군의 영도하에 육속 동북으로 진출하며 1945년 11월경에 심양에 집결하였다. 심양에 도착한 조선독립동맹은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중공중앙 동북지국의 지시에 따라 아래와 같은 결정을 짓게 되었다.

 

˝첫째, 조선독립동맹 지도부와 조선의용군의 일부 간부들은 즉시 북조선으로 귀국한다.
둘째, 조선의용군의 나머지 간부와 대원들은 중국에 남아서 지역을 분할하여 부대를 확대하고 우리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셋째,  남만·북만·동만으로 구분하여 각 지대를 편성하고 주요책임자를 임명한다.˝

 

긴급회의 직후 동북조선의용군 군인대회를 심양시 대홍구 오가황학교 운동장에서 진행하였고 김무정 사령관이 국내외형세에 대해서 연설을 하였으며 남만에 조선의용군 제1지대를, 북만에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동만에 조선의용군 제5지대를 각각 파견한다고 선포하고 각 지대의 주요간부명단을 발표하였는 바 제1지대장은 김웅, 정치위원은 방호산, 3지대장은 김택명, 정치위원은 주덕해, 5지대장은 이익성, 정치위원은 박훈일이었다. 이때로부터 동북에서 조선의용군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회의 후 김무정을 포함한 조선독립동맹 전체 중앙집행위원과 일부 간부들은 북한 지역으로 입국하였다. 그 후 김무정은 1948년에 민족보위성부상을 지내고, 1950년 6·25남북전쟁 때에는 김광협 소장이 해임되자 그 후임으로 제2군단장에 임명되었다.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패퇴하였을 때에는 평양방위사령관을 역임하다가 낙동강 전선에서 평양을 유엔군에게 빼앗긴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4일에는 북조선노동당 중앙전원위원회에서 명령불복종·전투조직의 불성실·퇴각시의 불법살인 등의 죄목으로 김무정을 숙청하였다. 1952년 10월 중국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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