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님의 카페에 올라온 글인데 "우리 시대의 스타"인 양희은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함 올려 봅니다.
양희은
주 철 환
"가수하고 배우는 다르지. 연기자는 배역에 따라 백번도 더 달라질 수 있지만 가수는 자기가 살아온 대로, 살고 있는 삶 그대로 노래할 뿐이거든. 배우는 평생을 뒤집어 쓰고 살 수 있지만 가수는 가면 쓰고 노래 부를 수 없잖아. 맨몸으로, 알몸으로 노래하는 거야"
나는 그녀를 누나라고 부른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감격해 하던 열여섯살 이후로 그녀는 줄곧 나의 누나였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마주보며 누나라 부른 건 불과 7,8년 전 일이다. 나는 이 바닥에서 일하게 된 최고의 보람 중 하나로 김민기를 형으로, 양희은을 누나라고 부를 수 있었음을 이미 여러 차례 고백한 바 있다.
인터뷰 약속이 있던 날 아침 누나가 불쑥 내 사무실에 나타났다. 디제이 이종환씨가 진행하는 <음악살롱>에 월요일마다 출연하는 터라 온김에 그냥 들렀다며 내 앞에 풀썩 앉았다. 커피를 마시며 '솔직히 난 누나를 만나지 않고도 누나에 대해 쓸 수 있다'고 하자 정색을 하며 내게 들려준 말이 가수의 '맨몸론'이었다.
"넌 나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어. 그 속에 갇혀 지내는 게 난 편치않아. 날 만나지 않고 멋대로 쓴 글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알아. 난 사기치는 거 싫어. 거짓으로 날 만들고 싶지 않다구. TV를 끄면 내가 사라지지. 그러나 TV 를 꺼도 여전히 TV밖의 나는 실존해 있잖아."
표정이 진지해진다.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화살을 마구 쏘아댄다.
"작은 약속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 난 용서 못 해. 사기를 치려면 철저하게 쳐야지. 소매치기들이 마네킹에 방울 달고 수천 수만 번 연습한다는 거 들어 봤어."
역시 그녀 말이 맞았다. 일산의 김대중 대통령 사저 근처에 와서 아무 의경이나 붙잡고 양희은네 집을 물어보면 된다더니 사실 그대로였다. 문은 열려 있었고 나를 먼저 맞은 건 통통하게 살찐 두 마리의 퍼그였다. 곧이어 나타난 그녀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도 퍼그(Pugs)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씌어 있었다.
"미미랑 보보는 우리 결혼 역사와 거진 맞먹지. 얘들이 열살이거든. 그쵸. 여보"
콘서트 때마다 만나 낯익은 매형(조중문씨)이 곁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누나를 'TV 밖에서' 먼저 보았다. 1971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나의 노래방 애창곡인 동물원의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부터>에 이런 가사가 들어 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땐 라디오와 함께 살았었지. 성문종합영어보단 비틀즈가 좋았지."(내가 고1때는 성문종합영어가 정통종합영어였다는 게 달랐다. 나중에 '정통'이라는 이름이 저자의 이름인 성문으로 바뀐 것이다.)
나도 라디오와 함께 살았었다. 제일 친한 친구였던 경진이와 나는 MBC라디오의 인기 DJ였던 박원웅씨가 만든 팝송팬클럽의 회원이었다. 그 회원들을 모아 정기적으로 열었던 콘서트에서 누나의 노래를 '라이브'로 처음 들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광화문 교육회관 8층에서 열렸던 그날 공연의 2부는 서유석씨가 주인공이었다. 사회자인 박원웅씨가 '서유석씨의 열렬한 팬 한 분을 무대에 모시겠다.'고 하자 서유석씨는 '나의 팬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이 사람의 팬이다. 지금 서강대학교 일학년 여학생인데 여러분도 한번 노래를 들어보면 꼼짝없이 팬이 되고 말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객석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녀의 노래가 관중을 '엄습'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목을 죄든가 싶더니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 마침내는 서유석씨의 예언대로 거기에 있던 모두는 꼼짝없이 그녀의 노래에 포획되고 말았다.
한동안 멍했고 더 긴 시간 얼떨떨했다. 나는 그때 어린 나이였음에도 '노래의 힘은 위대하구나'라고 절절하게 느꼈다. 그건 내 성장기의 한 '사건'이었고 그 후 몇 달이 지나 라디오에서 다시 그 노래를 들었을 때 비로소 내가 겪은 사건의 6하원칙을 헤아릴 수 있었다. 양희은. 그 이름이 입력되면서 그전까지 죽 나를 사로잡아왔던 김추자(님은 먼 곳에, 꽃잎,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거짓말이야의 바로 그 가수)로부터 해방되었다.
"만 18세하고도 11개월째 되던 때 <아침이슬>음반을 냈지."
그녀의 기억력은 비상하기로 소문나 있다.
"출발부터 어려웠어.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고 그저 아르바이트로 형편 풀릴 때까지만 노래품을 팔려고 했던 거지."
가수의 창법은 그 가수가 사는 법이다. 나는 늘 양희은씨가 세상을 향해 신경질 부리듯 노래부른다고 느꼈다. 스무살이 채 되기 전 양희은을 둘러싼 세상은 그녀에게 불손했고 불친절했다.
"살아오면서 가장 절실했던 것들 중 하나는 내 주변에 좋은 선생님 한 분이 계셨으면 하는 거였지. 세상사는 법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누구도 큐사인을 주지 않았어. 힘들다기보다 두려웠지."
늘 당당하고 누구에게도 질 것 같아보이지 않던 그녀가 내심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게 뜻밖이었다. 나는 그녀의 방패만을 확대하여 본 것일까. 그녀가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온 걸 본 일이 있다. 과연 누나가 누구를 찾을까. 누구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까. 궁금했다. 첫사랑? 누나가 다녔던 경기여고의 은사님?아니었다.
기운이 아저씨. 누나가 늘 고개를 떨구고 다닐 때 "기운내. 내가 있잖아."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시던 명동 오비스 캐빈의 웨이터 아저씨.
"나의 이십대 때 8년간 거의 매일 만났던 아저씨. 술집 지배인과 다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위로의 말을 던지던 고마운 아저씨. 희망과 용기를 주셨던 그분이 내겐 유일한 선생님이었던 거야."
당시 오비스 캐빈은 단순한 맥주집이 아니었다. 20세기 한국의 대중음악사를 정리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장소가 바로 명동의 오비스 캐빈이다.
"오비스 캐빈이 통기타음악의 산실이된 데는 이유가 있지. YWCA가 대학 일,이학년생들을 위해 직원들 식당을 허물고 청개구리라는 휴식공간을 마련해 주었어. 당시 100원을 내면 1원을 거슬러주는 걸로도 유명했지. 들어갈 땐 신발주머니를 나눠주었는데 죄다 신발을 벗어서 거기다 넣고 들어갔지. 당시 대학의 재주꾼들이 청개구리에 다 모인거야. 전유성, 송창식, 윤형주, 4월과 5월, 은희, 뚜아에무아, 투코리안즈하던 김도향, 손창철, 라나에로스포, 그리고 서유석, 김민기까지. 아, 빼놓을 수 없는 김광희. 그 언니는 당시 서울음대에 다니고 있었지. 재수하던 1970년도에 대학 들어간 친구들이 재수생의 가을을 위로한답시고 나를 그리로 데려간거야. 누군가 '이 중에 노래 잘하는 친구가 있으니 노래 한 곡 시켜보세요'라는 쪽지를 주최측에 건넸지. 당시 트윈폴리오 하던 윤형주씨는 경기여고 영어회화클럽의 지도간사여서 안면이 있었거든. 당시 기독교 방송에 <꿈과 음악 사이에>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안에 고은씨의 칼럼이 인기였지. 그 칼럼의 로고송이 바로 김광희 언니가 부른 <세노야>였어."
청개구리의 멤버들은 자연스럽게 오비스 캐빈으로 '이월'되었다. 청개구리의 부제가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의 집'이었는데 그들에게 노래도 하고 용돈도 벌게해 준 곳이 바로 오비스 캐빈이었던 셈이다.
"내겐 용돈이 아니었지. 주된 생활비였으니까. 엄마사업이 실패하고 가회동집이 '몰락'했을 때 안면몰수하고 오비스 캐빈 주인의 둘째 아들을 찾아갔지. 그때가 섣달 그믐이었어. 그분 이름이 이종범이었는데 무턱대고 돈을 꾸어달라고 졸랐지. 그분이 이십몇개월 무이자로 돈을 빌려 주었어. 출연료로 한달 한달 그 빚을 갚아갔지."
노래는 그에게 생활이라기보다 생존의 방편이었다.
"잊을 수 없는 사람 가운데 김현숙 선배가 있지. 경기여고 6년 선배인데 와이틴의 회장이었던 내가 언니를 우리 모임에 초대한 적이 있어. 언니는 당시 이화여대를 마치고 조흥은행 본점에 취직해 있었는데 워낙 재주가 많은 분이라 KBS에 특채됐었지. 언니가 <젊음의 행진>전신 프로그램의 사회자였는데 청개구리 멤버들을 추천한 거야."
한국의 포크음악이 비로소 TV와 접선한 것이다. 사실 나는 지금껏 70년대 포크음악의 선사시대 유적지를 더듬은 셈이다. 그 후의 '역사'는 기록된 바 그대로다. 결코 결혼할 것 같아 보이지 않던 그녀가 결혼을 하고, 결코 살찔 것 같아 보이지 않던 그녀가 '뚱보'가 되고, 결코 앓을 것 같지 않아 보이던 그녀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그사이에 한 차례의 공간이동이 있었다. 88년 1월 5일부터 93년 10월 18일까지의 미국 체류가 그것이다.
그녀를 PD와 출연자의 관계로 만난 것은 내가 <일요일 일요일밤에>라는 프로그램을 맡게된 '91년 가을이었다. 그녀가 잠시 고국에 나왔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곧장 섭외에 들어갔다. 그녀가 출연한 꼭지의 제목은「노래 한 곡의 세상풍경」. 그날 소개된 노래는 그녀가 직접 노랫말을 만든 <들길 따라서>였다. 이어폰을 끼고 낭만에 겨워하며 들길을 걷던 양희은이 노래가 끝날 무렵 무심결에 뒤돌아보니 엄청난 수의 차량이 경적을 울려대며 그녀가 비키기를 기다린다는 일종의 코믹 뮤직비디오였다. 그 뒤로도 나는 수차례의 <대학가요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등의 프로그램에 그녀를 초대했다. 그녀의 콘서트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관객으로 '참여'했음은 물론이다.
- 오늘날의 대중문화 흐름에 대해 할 말이 많을텐데
"나는 한쪽으로만 힘이 실리는 시소의 문화, 몰표의 문화가 싫다. 십대, 이십대, 삼십대, 그리고 사오십대가 손에 손잡고 나란히 가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고 건강한 대중문화의 모습일진대 현실은 사뭇 다르다. 천편일률이다. 군사문화의 흔적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사오십대도 대중음악을 즐길 권리가 있는데 그것이 TV나 라디오의 상업주의에 의해 봉쇄당하고 있다."
- 음반 삼만장만 팔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늘 하는데.
"내가 말한 삼만장은 고작해야 CD 만장에 카셋트테이프 이만장이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 혹자는우리나라가 세계 8위의 음반시장이라고 말한다. 양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질로는 천만의 말씀이다. 문화는 꽃과 같은 것이다. 가꾸고 정성을 쏟아붓지 않으면 말라 죽는다. 한국의 사십대는 빈둥지 신드롬을 앓고 있다. 고액과외에는 눈을 벌겋게 뜨지만 눈에 안 보이는 문화에는 투자를 전혀 안 한다. 어디서 세일을 한다면 화들짝 놀라면서 정작 문화적인 가치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마흔이 넘어서도 그녀는 꾸준히 음반을 내고 공연을 갖는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10월에 가질 공연을 위해 함께 연습하는 연주자들이 계속 돌아가며 나타나 눈치를 준다. 그녀는 7월부터 줄곧 그들에게 '밥을 해먹여가며' 연습중이다. 그들 중에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노래로만 이름을 들었던 사람도 끼어 있다. 김의철. 나는 그가 만든 <마직막 교정>과 <저 하늘에 구름따라>를 지금도 줄줄 외며 부를 수 있다.
양희은의 운명을 만든, 그녀를 직업으로 노래 부르게 한 문제(?)의 어머니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젊고 건강해 보이는 분이다. 지난번 어느 잡지에선가 자신에 대해 딸이 쓴 부분을 더듬더듬 이야기하자 대뜸 양희은이 그 말을 자른다.
"엄마, 말 만들지 마. 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수."
그녀는 언어에 대해 엄격하다. 지엄하기까지 하다. 남이 한 말의 어순까지 기억하는 비상한 힘마저 지니고 있다. 그녀가 애당초 사학을 전공으로 택한 까닭도 숫자나 이름이 한 번 입력되면 사진처럼 쑥 박혀버리는 천부의 기억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관되지 못한 말과 행동을 미워한다. 예전엔 저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달라진 말을 하는가에 대해 늘 근심한다.
한대수가 만들고 그녀가 힘있게 불렀던 <행복의 나라로>를 나는 좋아한다.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은 어떤 모습일까.
" 중학교 졸업앨범에 내가 바라는 것에 대해 '마음의 평화'라고 썼지. 그것이 내 인생의 화두가 되었던 것 같애. 겉으로 드러나는 건 덜 중요하지. 보이지 않는 평안이 내가 추구하는 행복의 실체야."
그녀의 말투는 자신감을 넘어 때로 공격적이다. 어떤 땐 화난 사람같이 느껴지는 적도 있다.
"절대 그렇지 않아. 내 말이 툭툭 끊어지게 들리는 건 우리 집안말씨가 이북 사투리와 서울 사투리가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는 탓이지. 난 왠만한 일에는 화가 안 나. 남들은 화낼 일이어도 난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인정하는 편이야. 그런데 아주 작은 일에서 터지는 적이 있지. 약점을 건드렸기 때문에? 아니야. 사실은 이미 아흔 아홉 개가 누적되어 있는 상태에서 최후의 한 개가 더해졌을 때 폭발하는 거야. 그러나 그런 경우도 흔하진 않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두 번 정도 그런 일이 있었지."
그녀의 노래에는 서정과 저항이 묘하게 엉켜 있다. 광복 50년을 기념하여 MBC라디오가 조사 발표한 「한국의 대중가요 100선」에서 당당히 일등을 차지한 <아침이슬>에서부터 요즘 박세리의 골프 영상과 함께 IMF시대의 국민을 위로하는 노래로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상록수>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그렇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노래를 불러야 했다고 고백한 양희은. 마음과 몸의 평화가 있는 지금 그녀가 열심히 노래 부르는 까닭이 궁금하다.
"얼마나 반짝하며 높이 치솟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도록 살아남느냐가 진정한 노래의 생명성이다. 나를 처음 오비스 캐빈에서 노래 부르게 해준 송창식 선배는 늘 내게 '넌 노래밖에는 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넌 노래에 목숨걸고 있지 않다'고 지적해 주었다. 그는 내가 알기로 연예계에서 말 안 바꾸기로 유명한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솔직히 노래가 나의 운명이라고 깨달은 건 내 나이 사십 이후였다. 이십대 땐 어떻게 하면 노래로부터 탈출할까가 나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목표였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모름지기 노래는 스스로 즐기면서 불러야 남들에게도 행복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즐기기 위해선. (말을 끊었다가) 반드시 고통의 시간을 거쳐야 함을 이제는 알 것 같다."
- 돈 때문에 노래를 시작했지만 이제 돈 때문에 노래 부르지만은 않는다는 걸 알겠다. 돈 때문에 힘들었던 시절을 겪은 사람으로서 지금 가난 때문에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면.
" 난 돈이 없다는 걸 결핍으로 안 본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다. 오히려 돈이 없을 때 가족간의 유대를 굳힌 기억을 갖고 있다. 가난하던 시절 전깃불도 없이 초롱불 하나만 있을 때 거기 빙 둘러 앉아 함께 나누던 빛과 따뜻함을 상상할 수 있지 않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가질 수 있는 것이 많았다. 궁핍 가운데 행복은 더 빛이 난다."
인터뷰는 끝났다. 그녀의 몸은 온통 땀으로 절어 있다. 나의 사춘기를 온통 사로잡았던 낡은 청바지의 여대생은 넉넉한 웃음으로 지금 내게 향내나는 커피를 권하고 있다. 그 향기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여유로울 것 같다.
첫댓글 너무 길자네~~~
스트롤의압박 * 죄송해요 다 못 읽겠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