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구현 (AIAM Gallery 대표 & IP빅데이터 분석전문가)
한선미 작가는 1981년생으로 MZ세대 작가이다. 한국에서는 서양화를, 그리고 독일 Saarland 주의 Hochschule der Bildenden Künste Saar 대학에서는 Sound Art를 전공했다. 전공 후에는 독일 《Künstlerhauses Eckernförde otte1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3개월 동안 독일 북부 지역 Eckernförde에서 작업을 진행하고, 전시회를 개최하며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 그 이후 독일에서 정착한 후 다수의 전시회를 진행하면서 예술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해왔다.
작품 제작을 통해 그녀 자신과 다른 이들의 내면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초창기에는 자주 자화상을 그리면서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다루기도 했다. 더군다나 철학자 Carl Gustav Jung의 <id, ego, superego 이론>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자연스럽게 인간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보는 작업에 천착했다. 그러다가 점점 범위를 넓혀 주변의 사물들과 일상 생활 속에서의 상호작용에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따금씩 그 대상들에 자신이 ‘감정 이입’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야생’에서 벗어나 인간에게 길들여진 동물을 주된 작업 모티브로 삼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적응 해왔던 친환경 야생의 자유로운 틀과 환경에서 괴리되어 새로운 환경에 맞춰 애를 쓰며 살아가는 모습이, 흡사 한국을 떠나와 독일에 적응해 나가고 있는 그녀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한선미 작가는 주로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작업한다. 물감에 물을 많이 희석할수록 눈물처럼 흐르는 효과에 착안해 슬픈 감정이 반영되는 듯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법을 선호하게 되었다. 슬픔이 최고조에 달하면 어느덧 고독감 또한 더욱 강조되었다. 그녀의 예술은 인간과 자연의 교감 변화와 탐구를 거쳐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새로운 시도와 경험을 통해 예술적으로 성장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제2회 AIAM & ADAGP 글로벌연합회원전」에 출품된 한선미 작가의『오 나의 사슴(2023)』을 대한 순간, 현대미술거장인 앙리 쿠에코(Henri Cueco)의 대표작『사냥개들(1993)』의 거친 이미지가 전율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한선미 작가의 현재는 수십 년 전에 젊은 혈기만으로 당대의 야수와도 같은 세상과 맞서던 앙리 쿠에코의 고독한 삶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앙리 쿠에코는 1949년에 열린 당대 기성세대에 저항하던 청년 작가들의 열린 창구 역할을 했던 <젊은 창작>의 전신인 ‘젊은 회화’전에 참가한다. 당시 문화계는 공산당이 점유하고 있었고, 상업 화랑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중에 추상미술을 주로 전시하던 파리 살롱의 엘리트들 사이로 구상적 경향이 강한 젊은 예술가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폴 르브이롤르(Paul Rebeyrolle, 1926~2005)가 청년 미술가들을 위한 ‘젊은 회화’전을 1949년 처음 열었고, 1953년에는 같은 이름의 협회가 만들어졌다. 협회가 창설되자 조금씩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그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954년에는 파리시가 《시립현대미술관》에서 젊은 작가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살롱전을 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열린 '젊은 회화전'(Salon de Jeune Peinture)은 1960년대 내내 그 시대의 정치적 논쟁점들을 반영하면서 사회 갈등의 계기판이 되었다. 1969년 『정치와 문화』전을 열면서 보인 주제나 "베트남을 위한 빨간 방" 등이 증명하듯, 열성적이고 전투적인 회화의 복귀를 볼 수 있었고, 신조형주의 같은 새로운 사조를 열었으며, 그러한 미술운동에 앞장 선 여러 화가들이 연합하는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했다. 앙리 쿠에코는 질 아이요(Gilles Aillaud), 에두아르도 아로요(Eduardo Arroyo), 피에르 부라글리오(Pierre Buraglio), 자크 모노리(Jacques Monory), 베르나르 랑시약(Bernard Rancillac) 등과 활동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1969년의 전시를 끝으로 협회는 분위기가 바뀌어버렸다. 정치적 대립 축이 팽팽히 맞서는 중에 더 이상 협회에서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력 인물들이 모두 협회를 떠나버렸다. 이후 10년 동안 '젊은 회화'는 전시회의 목적이 무엇인지 회의하며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 1980년 콩차 베네딕토(Concha Benedito, 1936~)가 협회장이 되자 협회는 재구성되기 시작했고, 1981년에는 프랑스의 조형예술 3부회의 자격을 갖고 그 단체에 참여했다. 1980년대에는 카트린 누이노(Katerine Louineau)를 의장으로 해서 엄격하게 전시 출품작을 선정하도록 선정위원회를 운영한 덕에 협회가 다시 제 위치를 되찾았고 이전의 수준과 질도 회복했다. 2000년부터는 '젊은 회화' 대신 <젊은 창작>으로 이름을 변경했고, 파리 시의 후원으로 전시회가 벌어진 이후 계속 전시회에 따라 붙어 다니던 '살롱'이란 말도 떼버렸다. <젊은 창작>은 조형미술에서 계속 일어나는 변화들을 지켜보면서 다른 매체의 도입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다. 또한 일본, 퀴벡, 이탈리아, 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콜롬비아, 한국, 덴마크, 폴란드 등 점점 더 많은 외국 작가와 집단들의 유입을 경험하고 있다. 오늘날 <젊은 창작>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예술가 집단 중 하나로 영구히 살아 숨쉬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선미 작가는 【AIAM국제앙드레말로협회】회원 작가들 가운데서도 드물게 이국 땅에 상주하면서, 현지 생활의 고달픈 현실 속에서 수반되는 ‘문화 충격’을 고스란히 감당해 내고 있다. 필자 역시 긴 세월 동안 외국에서 체류하다 보니 현지인들과의 경쟁과 투쟁을 통해 자연스레 습득한 ‘생존 본능’이겠지만, 때로는 그야말로 살아남아야 하는 멘탈 수습과정에서 ‘내가 먼저 무느냐, 물리느냐’의 결정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 사안’이 되기도 한다. 특히, 오직 한 자리만을 놓고 내, 외국인 여부와 상관없이 서로 경쟁해 차지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평소 잠들어 있던 ‘야성의 호출 신호’에 따라 내 삶의 희비가 엇갈린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겪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한선미 작가의 개인적 입장을 고스란히 십분 공감하기는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소위 말하는 현지 외국인과 ‘국제 결혼’을 한 후 현지에 정착한 여성 작가이기에, ‘인생의 고난지수’를 단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다. 물론 천편일률적인 시나리오에 따라 어림짐작만으로 타인의 행 · 불행을 재단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녀와 남편 사이에는 상상 이상의 ‘화합 에너지’가 생성되어 가장 이상적인 가정 생활을 영위해 갈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근본적인 ‘문화 차이’로 인한 갈등 요소가 불거져 나올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생이 예술가라면 인생 역정의 함수 곡선이 들쭉날쭉한들 무슨 상관이랴. 마치 앙리 쿠에코의『사냥개들(1993)』처럼, 한선미 작가의 화가 생애 전반에 걸쳐 시도 때도 없이 삶의 고단한 무게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지라도, 아무쪼록 성찰하는 【ADAGP 글로벌 저작권자】의 일원으로써 그녀의 외로운 작가로써의 도전 의식이 ‘새로운 정신’에 의해 함양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첫댓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