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흐르는 강
변종호
물새가 노닐던 바위에 앉아 소리치며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마음에 늘
그리는 고향의 강은 아닐지라도 굽이치며, 돌아 흐르는 물길을 보노라면 어느새 무거웠
던 마음의 빗장이 열리기 시작한다 원망스러움도, 서운함도 춘풍(春風)에 녹아내리는
잔설이 되어 한없이 넓은 마음은 사색(思索)의 나래를 펼친다.
떠올리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아름다운 고향의 추억도 내 곁을 떠나 다
시는 볼 수없는 그리운 얼굴들도 물위에 아른거리다 이내 사라져 버린다 그리움이 커
지면 외로움이 된다고 했던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 지독하게도 사랑했던 한 여인이
내 안으로 들어서고, 그 그리움은 같이할 수 없는 현실에 외로움이 되기도 했었다.
생(生)이란 내가 맞이하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에, 모든 것들을 남겨두고 나
홀로 떠나야하는 여행이 아니던가 고향 앞을 흐르는 남한강물도 긴 여정에, 만나고 헤
어짐을 반복하다 김포하구에서 이별을 고하며 소멸(消滅)돼 버리고 만다.
나이차가 많았던 형제들 한 숟가락 끼니를 때우면 들로 산으로 일을 나가시던 어머
니. 한나절이 지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선 커다란 빈 집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몸은 약
골인데다 소심하기까지 했던 나는, 커다란 미루나무가 서있는 제방만 넘어서면, 언제나
반겨주는 강을 만날 수 있었고 그런 강은 홀로 커가던 나의 놀이터요 외로움을 덜어주
는 친구였기에 강과는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36
서산(西山)에 걸터앉은 태양이 일렁이는 강물에 물감을 풀 즈음이면, 물위로 뛰어오
르는 피라미들의 묘기는 장관이었다. 그곳은 한 말 남짓한 콩 자루를 이고, 재 너머 장
에 가신 무릎시린 어머니를, 해질녘까지 기다리던 곳이기도 했다.
고향을 떠올리면 동네를 둘러싼 높은 산 보다는 마을을 휘감고 돌아 흘러가는 강물
이 좋기만 했다. 강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강을 바라보며 강과 더불
어 작은 몸집을 키우던 성장기였다. 그런 마음에도 답답한 일이 있으면 이내 쪼르르 강
가로 뛰어가, 부딪혀 부서지는 하얀 포말(泡洙)과, 너울거리며 흘러가는 강물에 눅눅한
마음을 띄워 보내곤 했었다.
그런 강물도 겉으로 보기에는 유유히 흘러가는 것 같지만 수없이 막히고, 걸리며,
부딪혀 흩어지면서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너그러운 강물이었다. 어느 것도 거스르지 않
고 끌어안는 포용력(包容力), 모나고 각진 바위를 감싸 안는 슬기로운 지혜(智慧), 부
서지고 합쳐지는 끈질긴 인내(忍耐)를 강물을 바라보며 배울 수 있었다.
흘러가는 강물에 대한 동경(憧憬)은 지천명의 나이인 지금까지 이어져, 뭔가 답답해
풀어내야하고, 채울 수 없는 그리움이 커질라치면 어느새 차가 달리고 있는 곳은 여울
져 흘러가는 강이 있는 곳이다. 마음에 쌓인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여울이 흐르는 강이
었으며, 홀로 사색(思索)을 즐기기에는 산 그림자 물위에 띄워놓은 흐름이 멈춘 잔잔한
강물이 좋았다.
내 마음속에 늘 드리워져 흐르는 고향의 강은 여름내 두어 번의 큰 장마를 치러냈다.
곡식을 여물게 하는 따가운 햇살이 강물에 고루 퍼질 때면, 하얗고 고른 치열(齒列)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여인의 미소처럼, 한 길이 넘는 강바닥을 훤히 다 드러내 보이곤 했
었다 그런 분위기를 띄우듯 은빛비늘 번쩍이며 몸을 뒤집는 꽃날치 떼들의 군무(群舞)
는 지워질 수 없는 환상적인 영상으로 가슴에 담겨져 있다.
가을걷이를 모두 끝내고나면, 강폭이 좁은 여울목에는 다리가 하나 놓여진다. 청솔가
지가 겹쳐져 깔리고 뗏장을 거꾸로 덮은 출렁거리는 섶다리는 장으로 팔려가는 소도 건
너고, 장에 가는 주인을 따라나선 강아지도 건너 다녔으며, 마지막 가는 길이라며 요령
잡이의 구슬픈 선소리에 상여꾼들이 발을 맞추던 그 큰 상여도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 건
너 다녔다.
모질게 춥던 겨울밤이면 울어대는 부엉이 소리, 파고드는 매서운 삭풍에 떨어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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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지소리, 얼음장이 조여들며 꾸르릉 꿍꿍 울어대는 소리는 앞산에 부딪혀 메아리로
되돌아오곤 했었다. 이런 영향인지 나는 흐르는 물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걸
리고 막히면 돌아가고 부딪혀 부셔지면 다시 추스르며, 모난 돌, 움푹 팬 바닥, 자갈밭
조차도 다 어르고 보듬으며 살고 싶었다. 허나, 지금 내 삶을 관조(觀照)해보면 지독한
교만과 독선으로, 듣는 편 보다는 내 생각만 토해내는 쪽에서 살아온 것 같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인자요산이요, 지자요수'(仁者樂山知者樂水)라 했다. '인자
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라는 말이다. 이런 강
물은 흘러야 하며, 흐르지 않고 멈춰선 강물은 이미 물로서의 생명력을 잃기 시작한다.
물의 소중함이 날이 갈수록 강하게 와 닿는 시대다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강들이 신음
하고 병들어간다. 소중한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눈으로 바라보며 즐기는 문화가 서서히
그 뿌리를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발을 담그고 싶도록 자갈바닥이 환하게 드러나 보이
는 강물 나직이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래가 끊이지 않는 내 마음에 흐르는 강.셈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생명의 강으로, 다시 자연에게 되돌려 주어야하지 않을까.
2005/21 집
첫댓글 발을 담그고 싶도록 자갈바닥이 환하게 드러나 보이
는 강물 나직이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래가 끊이지 않는 내 마음에 흐르는 강.셈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생명의 강으로, 다시 자연에게 되돌려 주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