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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자회 원문보기 글쓴이: 단풍
A.W. 토저의 <임재체험> 요약
* 1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에 거하는 인생
1장: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핵심 진리만을 따르라
토저에 의하면 사람들이 인생을 낭비하는 이유는 잘못된 인생관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은 사람들을 ‘선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과 ‘악하지만 영리한 사람들’로 나누고, 악하더라도 영리한 사람들이 되라고 부추기지만 우리는 악행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며 의가 미련한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배워야 한다.
토저는 인간의 삶을 중심과 가장자리로 구분하면서 중요한 것은 중심이고 가장자리가 아닌데도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가장자리의 가치 즉 사소한 가치에 더 비중을 두는데, 이처럼 중심과 가장자리를 구별하지 못하는데서 잘못된 인생관이 나오고 적의가 나오는데, 종종 이런 적의가 핍박과 살인과 전쟁을 낳기도 한다.
그러면 모든 인간의 삶에 안정과 평안을 가져다 줄 본질적 진리는 무엇인가? 하면서 토저는 핵심 가치 일곱을 소개한다.
첫째, 오직 하나님만 위대하시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어떤 물건, 어떤 사건, 또는 어떤 인간에게서 위대함을 찾아서는 안되는데, 예를 들어 인간에게 위대함이 있기는 하지만, 그 위대함은 달이 태양의 빛을 반사해서 빛을 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위대함을 반사하여 생기는 위대함이므로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위대함을 반영할 뿐이다.
둘째, 오직 하나님만이 지혜로우시다
인간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롭다고 여기면서 자주 교만에 빠지지만 시간, 공간, 물질, 운동, 생명 그리고 죽음은 “하나님만 지혜로우시다”는 것을 말해주며, 인간은 인생에 대해 아무 지혜로운 답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를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셋째,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우리는 건강, 자유, 지식, 예술, 문명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영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몸에서 폐, 간, 혹은 신장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심장이 멈추면 다른 장기들이 즉시 타격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숨기신다면 그것들을 얻으려는 우리의 노력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넷째,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만 결국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인간은 ‘창조적 활동’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어서 벽돌, 페인트, 음표, 과학적 자료, 사상 체계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지만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닳아 없어지게 되듯이 ‘수고로운 인생’은 ‘수고한 사람’과 함께 없어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분을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우리의 모든 수고에 불멸성을 부여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한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다섯째, 인간의 죄는 실재한다
세상은 죄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인간은 한 순간도 의심, 증오, 시기, 권력욕, 정욕 그리고 탐욕 같은 죄의 괴롭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무거운 죄의 짐이 우리의 영혼에서 벗겨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의 임재 밖으로 우리를 쫓아내기 때문이다.
여섯째,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신다
하나님이 죄를 사하실 수 있고 또한 실제로 사하시는 이유는 죄가 우선 그분을 향해 범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며 그 분으로 인해 이제 우리의 눈이 떠졌기 때문에 우리는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다.
일곱째, 하나님은 우리가 영생에 이르도록 지켜주신다
하나님께만 생명이 있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복된 목자요, 복된 보화요, 복된 소망이시다.
2장: 진리를 택할 것인가 행복을 택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오해할 때가 많은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첨하거나 인간의 비위를 맞추시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면서 심판을 긍휼보다 먼저 언급한다. 그러므로 심판의 정당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자신에게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셈이다.
우리는 구속의 드라마와 신데렐라 얘기를 구별해야 하는데, 인본주의 철학은 누구를 통하든지 핍박받고 있는 신데렐라를 구하면 돼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촌놈과 고집불통으로 몰아간다. 그들은 “진리의 궁극적 척도는 없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장점들을 한데 모으면 최고의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결국 진리는 ‘다수결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인간들의 ‘만장일치’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셈이다.
경우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의도는 선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린다면 그것은 지극히 악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사람들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리를 간과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화목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현재 우리 가운데 만연해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며 오히려 정반대가 진리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은 확신있게 당당히 말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갑론을박하며 시간을 보낸다. 현재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많은 종교적 논의가 실은 신앙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를 합리화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확신에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2 더하기 2는 4”였다. 다른 진리는 없었다. 그들은 이 진리를 부정하거나 이 진리에 대해 자꾸만 유보하려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면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구분할까? 토저에 의하면 최대한 공정한 판단은 ‘한 번 태어난 사람들’과 ‘두 번 태어난 사람들’의 사이의 구분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6,7)라고 말씀하셨는데,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 사이의 분명한 구별은 신약전체를 관통하며, ‘한 번 태어난 자’가 ‘두 번 태어난 자’를 핍박한다는 것도 신구약을 관통하는 사상이다. (가인과 아벨사건, 요15:19, 갈 4:29)
이처럼 양자 간에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지향하는 도덕적 기준과 삶의 태도가 다른데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 세상에 두 영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영과 성령님은 영원히 화합할 수 없으므로 ‘한 번 태어난 자’와 ‘두 번 태어난 자’ 사이의 싸움을 종식시키려는 현대의 노력은 헛수고일 뿐만 아니라 우주의 도덕적 법칙에도 위배된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 증거를 강화시켜주는 것은 형제애니 뭐니 하며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지구상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며, 이 진리를 인정하려면 영적으로 성숙하고 신앙적으로 단호해야 한다. 진리와 행복을 모두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토저는 행복보다는 진리를 택하겠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진리를 택하면 천국에서 얼마든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3장: 막대사탕만 핥는 신앙에서 깨어나라
질병에 원인과 증상이 있는 것처럼 신앙의 문제에서도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데, 어떤 것이 원인이고 어떤 것이 결과인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병의 원인을 그대로 둔 채 증상만 치료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목회자들이 적을 향해 포탄을 쏘지 못하고 적이 지나가면서 일으킨 먼지 구름에 포탄을 발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예를 들어 신앙의 권태는 문제의 원인일까 증상일까? 토저는 신앙의 권태를 문제의 증상으로 본다. 권태는 아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에 억지로 흥미를 느껴보려고 발버둥칠 때 생긴다. 재미가 없으면 그만두면 된다. 그런데 재미가 없는데도 그만두지 못하고 참고 계속하려니까 지겨운 것 이것이 권태다.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기 위해 산에 올라간 모세가 그곳에서 오래 지체하자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권태를 느껴서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신’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 후에 그들은 만나에 싫증을 느껴 ‘단조로운 먹을거리’ 에 대해 불평했고 고기를 달라고 졸랐고 그리하여 고기를 먹게 되었으나 결국 그들은 멸망당했다.
이처럼 오늘 날 복음주의 신자들조차 점차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에 대한 인내심을 잃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현세적인 것들’을 요구하며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 성경적이지 않은 시도들을 함으로 말미암아 신조는 정통인데 신앙의 습관은 이단인 ‘이상한 기독교’를 만들어냈다.
마침내 교회는 신앙적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 비싼 대가를 지불했고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은 끊임없이 교회를 비난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교회가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과 너무 비슷하게 산 것을 회개해야 한다고 토저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세상을 향해 지도력을 발휘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더러움에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와 자신을 깨끗이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4장: 믿음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붙잡아라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입술로 신조를 고백할 때에는 인간의 영적 부패를 인정하는 것 같아도 우리의 본질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신이 부패한 존재라는 생각이 너무 부담스러운 나머지 그들이 입술로 고백한 신조를 마음으로는 부정한다.
모든 종류의 기만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자기기만이다. 사도 바울은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 6:3), 야고보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약1:26) 하였다. 자기기만에 빠질 가능성이 훨씬 높은 사람은 신앙을 가벼이 여기며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매우 경건한 사람이다.
타락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상숭배를 좋아해서 “나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하더라도 실제로 우리는 자신의 우상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 예를 들어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이며 이런 기도의 유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기도가 자기기만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를 단호히 거부하셨고, 야고보는 신앙인들이 잘못 구하기 때문에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깨끗하고 정직해야 한다. 가슴 속에 바벨론의 황금 우상을 숨긴 채 십자가로 숨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회개하는 죄인을 지켜주지만 죄인과 그의 우상을 모두 지켜주지는 않는다. 때문에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도 악이 선이 되고, 죄가 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마리아와 요셉이 한 참 가다가 자기의 일행에서 어린 예수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우리는 의가 없는 종교도 가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기 쉽다. 다양한 대중 매체는 “종교는 고통당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와 평안을 줄 뿐이다” 라는 사상을 퍼뜨리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잘못된 세뇌작업에 저항해야 한다.
너무나 많은 곳에서 ‘믿음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는 새로운 그리스도인 세대가 탄생했다. 그러나 성령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신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약 4:4)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 2:15)
5장: 참된 신앙에는 의지적 결단과 능동적 선택이 뒤따른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신자들의 공동체로 들어간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문제는 그들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없고 그들의 윤리적 수준도 ‘보통의 교양 있는 시민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토저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에게서 가정 먼저 일어나는 변화 중 하나는 관심의 변화로 땅에서 하늘로,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이생에서 영원으로 그리고 세상의 부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로 관심이 바뀌며, 그런 내면의 변화는 그에 상응하는 생활방식의 변화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에 따라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을 고민에 빠뜨리는 질문 중 하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왜냐면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원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경건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매우 실망하며,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사랑이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 중 가장 자유롭고 가장 비이성적인 감정으로 본질상 ‘자발적인’ 것이며 의무감으로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강제로 사랑하도록 만들 수 없고 누군가에게 겁을 주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사랑에는 ‘감정적 사랑’과 ‘의지적 사랑’이 있는데, 전자는 감정에 기초하며 후자는 의지에 기초하는 것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의지적 사랑이다. 의지적 사랑이란 의지적 행동이 반복됨으로써 완전히 체질화된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유일한 선은 오직 의지에서 나온 선이며, 의지에서 나온 거룩함만이 진정한 거룩함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가 만들어낸 우리를 인정하실 뿐이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사실이 아닌가! 따라서 회심의 첫 번째 요소는 의지를 바로 잡는 것이며 이것이 회개다.
탕자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겠다”(눅 15:18)라고 했을 때 그는 돼지우리를 떠나 아버지께로 가는 회개의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과거에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겠다는 의지적 선택을 했듯이, 이제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겠다는 의지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 후에 그가 보여준 행동은 그의 회개가 참된 것임을 증명했다. 그는 아버지께 돌아왔다.
따라서 온 마음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우선 그렇게 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결심하면서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우리의 감정이 점점 더 안정될 것이고 우리의 의지적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점점 더 뿌리를 내려서 완전히 체질이 되어버릴 것이다.
* 2부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체험
6장: 하나님의 임재 처소는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는 ‘은밀한 방’이 있는데 거기에는 그의 존재의 신비로운 본질이 거한다. 이 신비한 본질은 인간의 복잡한 여타 다른 본성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그를 창조하신 지존자로부터 선물로 받은 그의 고유 본질로 성경은 이것을 ‘인간의 영’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는 말씀에서 보듯이 참 종교의 본질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연합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담의 타락의 결과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은밀한 방’에서 떠나신 것인데,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은밀한 방’으로 다시 들어오시기를 원하신다.
이곳은 극도로 내밀하여 다른 어떤 피조물도 침입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곳으로 들어오실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을 초대할 때에만 이곳으로 들어오신다. 계3:20절 말씀이 그 의미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지 않으셨다면,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혼에게는 외형적 종교 행위가 의미를 가지지만,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영혼에게는 그것도 아무 쓸데없다. 심지어 해로울 수 있다. 왜냐하면 외형적 종교 행위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착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어떤 자세로 지켜야 하는가?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우리의 내면적 영적 생활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성과 속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인간의 수많은 행위는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다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그 행위를 할 뿐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니콜라스 헤르만 같은 수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일하는 시간과 기도하는 시간은 전혀 차이가 없다.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로 시끄러운 주방에서 사람들은 물건을 건네 달라고 동시에 소리를 지르곤 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나는 마치 성례전 중에 무릎은 끓고 있을 때만큼 지극히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느꼈다.”
우리도 니콜라스 헤르만이나 아시시의 프랜시스 같은 영혼들처럼 세속적인 것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거룩한 것을 세속화함으로써 행악을 끼친다.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사고방식을 따르고, 세상의 행동양식을 모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머리 위에서 비추는 영광의 빛을 어둡게 하고 말았다. 이 땅을 하늘의 심판대 앞에 세우는데 실패한 우리는 오히려 하늘을 세상의 심판대 앞에 세웠다고 하면서 토저는 이렇게 기도한다. “오, 주여!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7장: 하나님께 거룩한 상처를 구하라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저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7, 18) 토저는 상처를 주는 분은 종이 아니라 주인이시다라고 하면서 이장에서 친구가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약 600년 전에 살았던 ‘줄리아 여사’를 예로 드는데,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오, 하나님! 저에게 세 가지 상처를 주옵소서. ‘회개의 상처’, ‘긍휼의 상처’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를 주소서.” 그녀는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 가지 상처를 구했다.
모든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상처받은’ 영혼들이었다. 야곱, 엘리야, 이사야, 에스겔같은 구약의 인물들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연단 때문에 고통당했다. 우리의 자신감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우리를 어린애로 만들어버리고, 어느 누가 보기에도 자신을 한없이 작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그것이 바로 ‘상처’이다.
토저는 먼저 ‘회개의 상처’를 말하면서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상임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을 만큼 상처를 줄 때, 그 상처가 우리를 깨뜨리고 부수고 우리의 인간적인 자신감과 전의를 무너뜨릴 때,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자신이라고 믿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회개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너무 쉽게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 진심이 결여된 회개 또는 불충분한 회개를 경계하라. 자신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아는 지식으로 상처받은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입으로만 전적 부패의 교리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회개는 “상처받는 것”이다.
둘째로 긍휼은 “고통당하는 사람과 자신을 감정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므로 긍휼의 상처를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고통을 당한다. 우리 주님에게는 몸이 둘인데, 하나는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허락하신 몸이며, 다른 하나는 이 땅 위에 있는 그분의 몸 즉 교회이다. 이제 이 몸, 즉 교회 안에서 주님은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끌기 위해 고난을 당하고 계신데, 우리가 이 점을 본받는 것 이것이 ‘긍휼의 상처’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해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라고 말했다. 따라서 ‘상처 받는 것’과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일맥상통한다. 거룩한 사람은 “긍휼의 상처‘를 통해 유용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런 사람이 결국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따라서 거룩함과 유용성을 거부하고 단지 행복하기만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육신적인 사람이다.
셋째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란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상사병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우리의 모든 전도의 열심은 오직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게 전부다. 성경공부 모임 안에서 조차 주께서 주신 복의 수를 헤아리기만 한다. 주님이 많은 복을 주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만 있을 뿐 그 복을 직접 체험하여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은행 계좌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을 찾아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맛보지 못한 채 이런 저런 성경공부 세미나에 열을 올린다.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이 공부하고도 영적으로 나약하고 기쁨에 메말라 있는가?
우리가 즐겁고 행복하기만을 원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거룩한 갈망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라는 말씀의 의미를 체험적으로 알도록 노력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교리를 다시 세우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교리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만큼이나 정통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을 찾아 헤매고 싶은 갈망이 급류와 회오리바람처럼 몰아치는 것이다.
그래서 토저는 이렇게 기도한다. “아버지여, 이제까지 저는 어린애처럼 무책임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거룩함보다는 행복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오, 하나님! 저에게 세 가지 상처를 주옵소서. 제가 죄인임을 깨달아 상처를 받게 하소서. 고통 가운데 있는 세상을 긍휼히 보는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게 하소서. 그리고 하나님을 언제나 찾고 알고 추구하고 발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상처를 받게 하소서.”
8장: 새 십자가가 아니라 옛 십자가를 전하라
토저는 사람들이 신앙을 굉장히 강조하면서도 신앙에 대해 비성경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고 하면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신앙이 아닌지를 아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참 신앙은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한다. 그것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분’의 도덕적 완전함 이외의 다른 어떤 증거도 요구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분이 말씀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오관의 작용과 모순된다 할지라도 신자는 하나님을 믿는다(롬 3:4)
그런데 성경의 진리를 과학적 증거로 증명해보자는 운동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어났다. 그들은 성경의 주장이 참이라고 증명된다면 신앙이 더 생기고 더 강해질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 즉, 그들이 성경의 진리를 증명해줄 증거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근본적인 불신앙을 말해준다는 점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회개하는 영혼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것은 오관이나 오관이 제공하는 정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믿음은 기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믿음은 불충분하며, 결국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회개는 단지 과거의 실패와 죄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결단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거의 눈치 채지 못하는 가운데 새로운 십자가가 복음주의 진영에 슬며시 나타났다. 이 새 십자가는 옛날의 십자가와 겉모양은 비슷한데 속은 완전히 다르다. 옛 십자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 십자가는 인류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의 친구가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철학이 이 새 십자가에서 나왔다.
새 십자가는 과거와 전혀 다른 전도 방법을 권장한다. 복음 전도자는 더 이상 “새 삶을 받아들이기 전에 옛 삶을 버리십시오”라고 말하는 대신에 “기독교는 이제 달갑지 않은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똑같은 것을 줍니다. 다만 우리 것이 좀 더 고상하지요”라고 말한다.
새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지 않고 단지 그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 새 십자가는 죄인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그가 품위 있게 즐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준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겠다는 좋은 동기에서 이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거짓복음을 전한 것이다.
옛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다. 옛 십자가는 타협하지 않으며, 수정하지 않으며, 봐주지 않으며 사람을 완전히 영원히 죽인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우리를 완전히 죽인 다음 새 생명으로 다시 살리는 것뿐이었다. 복음을 전하려는 자가 자기가 그리스도와 세상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친선 사절’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주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외교관이 아니라 선지자이며 우리가 전달해야 할 것은 타협안이 아니라 최후통첩이다.
옛 십자가를 전하라. 하나님의 정당한 진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한 다음 부활하신 구주를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죽은 자들로부터 주님을 다시 살린 능력이 이제 그 사람을 다시 살려서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9장: 깊은 고독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라
인생을 제대로 꿰뚫어보려면, 위대함을 명성과 동일시하는 잘못된 풍조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이 둘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교회 역시 이런 풍조에 영향을 받는다. 현재 교회에서는 교회활동의 홍수 속에서 경건한 사람들이 완전히 잊혀졌다. 사람들은 목소리가 큰사람, 주제넘게 나서는 사람, 코미디언처럼 자신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주변으로 몰려든다. 그 결과 이런 사람들에게는 헌금과 선물과 명성이 쌓인다.
그러나 대부분 위대한 신앙인들은 고독했다. 토저는 고독은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라고 생각된다면서 “그리스도가 계신데 뭐 그리 외롭습니까?”라고 쉽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주변의 어떤 도움이나 격려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채 오직 하나님과 동행해 본 경험이 없다는 반증이라고 한다. 우리가 ‘공동으로’ 십자가를 지고 갈 수는 없다. 내가 진정 십자가를 진다면 그 십자가를 질 때 나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 내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이 내게 등을 돌렸다는 뜻이므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는 친구가 없는 법이다. 성경도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막 14:50)라고 말씀하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의 고독은 그가 경건하지 않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신령한 고독을 오해하지 말라. 그는 군중 속에서 배울 수 없었던 것을 내적 고독의 상태에서 배운다. 깊은 고독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소중한 분이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며, 그분이 우리 인생의 최고선이심을 배우게 된다.
10장: 한 마음으로 서로 교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에 동참하라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갔다”(행 4:23). 이 짧은 문장에는 깊은 진리가 담겨 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외부적 요인 때문에 억지로 어디를 가야 할 상황에서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을 때 우리가 어디를 가느냐이다.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줄 뿐 아니라 우리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드러낸다. 즉, 현재의 선택이 미래의 우리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동류와 함께’ 이렇게 한다. 즉 우리는 ‘혼자’ 흥하거나 망하는 것이 아니라 ‘동류와 함께’ 흥하거나 망한다.
그러면 동류 간 교통을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사옵나이다”(사도신경) 이 구절이 사도신경에 포함된 것은 대략 5세기 중반의 일인데, 당시 교부들이 무슨 생각에서 이 구절을 사도신경에 포함시켰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사도행전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일이 교회 역사 최초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2:41,42)
때때로 ‘교제’(fellowship)라는 단어가 오용되고 있지만 이것은 ‘교통’(communion) 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뜻을 갖는다. 즉, “여러 사람들이 함께 공동의 복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도의 교통’이란 신자들이 깊은 사랑의 관계 가운데 똑같은 자격으로 영적인 복들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교통’이 있으려면 먼저 ‘연합’(union)이 있어야 한다. ‘교통’에 참여하는 자는 다 하나인데 이 ‘하나됨’(oneness)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즉, 성령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우리는 ‘하나됨’에 참여하게 된다. 구원받은 영혼은 누구나 ‘다른 구원받은 영혼들’과 동일한 영적 생명으로 태어나며, 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그 공동체의 모든 권리를 누리게 된다. 이처럼 성도의 교통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함께 누리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복은 무엇인가?
우선 가장 중요한 복은 생명이다. 헨리 스쿠걸에 의하면 이 생명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 생명이 하나님이 주셔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의 근원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 이 생명을 받지 못한 사람이 성도의 교제에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생명 없이 조직을 만들어 그것을 ‘교회’라고 이름 붙인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교제는 또한 ‘진리’의 교제여야 한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하지만 진리는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그 뜻에 따라 묶기도 하고 풀기도 하며,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며, 들여보내기도 하고 내쫓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 사도적 교통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질문할 것이다. “침례교의 진리도 있고 장로교의 진리도 있고 감리교의 진리도 있으며, 칼빈주의도 있고 알미니안주의도 있고, 이런 식으로 다양한 진리가 있는데 어떤 방법을 따라야 한단 말이오?” 여기에 대해 토저는 겉으로 나타난 형식에 집착하지 말고 본질을 붙들면 된다고 한다.
성도의 교통의 또 다른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실체 없는 시적 은유가 아니며 신약이 매우 강조하는 진리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우주에 내재하시기 때문에 하늘과 땅에 있는 성도는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를 즐길 수 있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자신의 신성의 충만함 가운데 그들에게 임재 하신다. 그래서 나는 지상의 성도와 천국의 성도가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교통은 한다고 본다.
인간의 몸에서 혈액이 ‘몸’에 생명과 통일성을 부여하듯이 그리스도의 ‘소생케 하는 영’이 몸 전체에 생명과 통일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미 세상을 떠난 믿음의 형제자매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보편적 교제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은 단지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구원받은 자들의 무리에 속한 거룩한 영혼들이 남겨준 깊은 신앙적 사색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시대의 거룩하고 재능 있는 성도의 풍부한 영적 유산을 통해 우리의 영적 삶이 풍성해지도록 만드셨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시대의 성도에게만 관심을 갖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예를 들어 어거스틴, 클루니의 버나드, 리처드 롤, 게르하르트 테르슈테켄, 성 프랜시스 그리고 선지자와 사도, 순교자와 개혁가, 학자와 번역가, 찬송시 작사자와 작곡가, 교사와 복음전도자 더 나아가 수많은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진 빚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신앙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속하고, 우리는 그들에게 속한다. 이렇게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제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성도의 교통’을 누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이다.
* 3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안에 벌이는 영적 전투
11장: ‘자아’라는 가장 질긴 잡초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이 세상은 스트레스를 주는 일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시도 짜증과 분노에서 자유롭지 않다. 자기를 화나게 하는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떤 사람은 혈기를 부리고 그에게 공격을 퍼붓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낮추고 십자가를 지는 인내심을 발휘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지 언제나 ‘행악자들’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많은 경우에 의의 힘이 약해진 것처럼 보일 때 악인들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악한 자들에게는 언제나 돈, 재능 그리고 수적 우위가 따르지만, 의로운 자들에게는 수적 열세, 무명 그리고 가난이 따른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징조들을 잘못 해석하면서 환경을 탓하고 분노한다. 그러나 짜증과 분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행악자들을 인하여 ‘애타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시 37:1절에서 성령님은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시는 것이다.
짜증과 분노 다음으로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 자랑’이다. 상습적으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이 거침없이 지껄이는 말을 억지로 들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기 자랑은 짜증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라는 상투적인 말까지 덧붙인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많이 참으신다.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육신적인 모습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라도 하나님은 종종 참으신다. 그러나 무한히 참으시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우리의 영적 체험이 점점 깊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기 시작하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기 자랑하는 언행이 결국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되어 돌아오고, 우리의 허영심이 속속 드러나는 일을 용인하신다. 때에 따라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했던 은사가 사라지거나 그토록 뽐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일까지 허락하실 수도 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의 봉사보다도 우리의 영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자기자랑도 불쾌하지만 자기비하도 불쾌하기는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에 자기비하는 자기자랑과 정반대지만 이 역시 오래된 죄다. 이것은 자기 딴에는 굉장히 성숙한 척하지만, 실상 이기주의의 다른 모습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아직까지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자아라는 것은 그것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든 머리를 조아리든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 인간의 자아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는 역겨운 것이다.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은 “내가 더 잘할 수도 있었는데... 나같이 잘난 사람이 이 정도밖에 못했다”라는 생각 때문에 분개한다. 우리는 이점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면 만일 다른 사람이 그를 깎아내리는 말을 하면 그는 노발대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랑이나 자기비하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든 관심이 없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기를 높이거나 깎아내리는데 관심이 전혀 없다. 그런데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절반의 승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온전히 몰두하느라 자신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이처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산다는 것, 즉 ‘인생’이라는 동산에서 자라는 가장 질긴 잡초인 ‘자아’를 인간의 방법으로는 제거할 수 없다. 자신의 자아가 죽었다고 확신하는 순간 자아는 어디선가 건재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서 우리의 삶의 열매들에 독을 뿌리고 우리의 평안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승리에 도달하려면 우리에게 근본적이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근본적인 변화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일을 우리도 겪어야 한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거부당하고 포기하고 격리되고 추방당해야 한다.
안락의자에 앉은 채 ‘십자가의 신학’만을 이야기하고 ‘자기부정의 신학’만 읊어대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이 그분만큼 고난과 고통을 당하기를 원하셨다. 만일 그들이 이 점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께 잘못 배운 셈이다.
12장: 참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적 삶으로 전진하라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할 때 “예수를 믿기만 하면 당신의 모든 문제와 어려움이 사라지고 당신의 소원이 속히 이루어질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런 식의 전도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적은 것을 포기하라는 것으로 들릴 것이다. 이런 식의 접근은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도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적은 것을 포기하라”는 말은 이기적인 동기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활동은 대부분 그 자체로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으며 중립적이다. 그 분야의 종사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언제나 ‘높힘’(promotion)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어떤 왕에게 왕의 지위를 버리고 오지로 가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을 때, 겉보기에는 이 왕이 낮아진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대단히 높아진 것이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그는 이제까지 그가 누렸던 어떤 영예보다 더 큰 영예를 누리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다를 바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부르신다. 이도 저도 아닌 진공 같은 상태나 세상이 우리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애매한 회색지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기독교는 신약의 그리스도를 버리고 ‘새로운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유혹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사도들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그리스도’를 전한다면 우리는 즉시 그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부족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 ‘부족한 그리스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적 허구, 낭만적 상상물의 산물, 감상적인 종교적 공상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유순하고 몽상적이고 수줍어하고 유약하고 어떤 상황에나 잘 적응하는 그리스도이다.
‘사이비 그리스도인들’은 ‘사이비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도움을 바라지만 그분의 간섭은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분에게 아첨하지만 그분에게 순종하지는 않는다. 오늘 날 우리의 도덕적 연약함의 원인 중 하나는 ‘불충분한 기독론’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는데 성공했지만 그분을 ‘영광을 받으신 인간’으로 믿는 데에는 실패했다. 초대 교회의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초대교회가 믿었던 것’을 믿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인간(그리스도)이 그들을 위해 하늘에서 중보의 사명을 감당하신다고 믿었었다. 그렇다면 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토저는 그리스도인들은 죄로부터의 해방 혹은 영생 및 확실한 천국의 약속을 찾은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고 하면서 영적 성장을 위한 몇 가지 제안들을 한다.
첫째, 마음으로 바라기만 하는 단계를 극복하라. 굳게 결심하고 당신의 생활을 바꾸어라. 모든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 거룩해질 수 있다. 따라서 그 원함이 매우 강렬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모든 습관들을 버려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하나 너에게는 안된다”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셋째,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셔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마음 언저리에 계시게 하지 말라. 당신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만족을 얻을 것이다.
넷째, 성령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이 오셔서 당신을 충만케 하시도록 초청하라. 모든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당신의 마음을 비워라. 그러면 성령님이 즉시 그것을 채우실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의식하기 때문에 자기가 언제 성령으로 충만했는지를 기억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성경과 신앙 위인들의 전기가 모등 증거하는 바이다. 성령충만은 점진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다섯째, 당신 자신에게 엄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되 다른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를 지우지 말라. 하나님의 임재의 훈련을 하라. 기도, 겸손, 순종 및 절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 더 깊은 교제를 나눠라.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도록 권하라. 다함께 전진해야 한다.
13장: 성령을 힘입어 믿음의 지식과 체험의 지식으로 무장하라
토저는 우리가 다른 책들을 읽듯이 성경을 읽으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이 어려운 것이라고 믿는다. 성경은 아무나 읽으라고 주어진 책이 아니라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책이다. 왜냐면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는 것이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성경은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주어졌다. 현재 유행하는 ‘하나님 개념’이란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구원의 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안타까워하는 하나님이다.
스스로 만족하며 문제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시는 하나님,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세일즈맨과 같은 기술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붙임성 있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바로 이런 하나님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말씀은 자녀들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것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를 숨기신다. 따라서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나 뉘우침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경이 생명과 호흡과 살이 없이 뼈다귀만 앙상한 시체처럼 느껴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믿으려면 먼저 증거가 있어야 한다. 증거가 없으면 믿음이 생길 수 없다. 그러나 영의 영역에서는 이해보다 신앙이 앞선다. 자연인은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알기 위해서 믿어야 한다. 구원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고 의지한다. 이 신앙을 가진 사람은 즉시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에게 맡긴다. 그러나 자연인은 절대 이렇게 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옳은 신앙을 가지는 일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다.
우리의 종교적 지식은 세가지로 구분되는데, 이성이 주는 지식, 신앙이 주는 지식 그리고 영적 체험이 주는 지식이 그것인데 이 세가지 지식은 성막을 이루고 있는 바깥뜰, 성소 그리고 지성소와 각각 일치한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불’(세키나)만 빛을 발하고 자연의 빛이 들어갈 수 없었다. 오직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분의 순수한 빛만이 지성소를 비췰 뿐이었다.
성소는 말 그대로 ‘거룩한 곳’이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와는 구별된 곳으로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언제나 들어갈 수 있었고, 그곳을 비춘 것은 햇빛과 달빛이 아니라 7개의 금촛대였다. 반면에 ‘제사장의 뜰’은 지붕이나 벽 없이 노출된 장소였기 때문에 자연의 빛이 그대로 들어왔다. 이처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것이었지만, 예배자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정도의 차이는 났다.
물론 구약의 지성소, 성소 그리고 바깥뜰이 본래 그리스도의 ‘신 지식’의 세단계를 상징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 설명의 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은 큰 선생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하고 고상한 것을 자연의 발아래서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관찰하여 얻을 수 있는 지식을 초월하는 지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 분이 지금 하늘에서 주권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런 진리는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데 그 진리들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지식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지식보다 더 순수한 지식이 있는데, 바로 직접적 영적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지식이다. 이것은 정보와 자료에 근거하여 이성적 판단을 통해 습득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없다. 성령님을 통해 영혼은 내세의 능력을 보고 느끼고 맛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런 지식은 습득되지 않고 체험된다. 말 그대로 그는 하나님을 안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를 만나주셨기 때문이다.
14장: 영적 체험의 건전성을 시험하라
오늘 날에는 자만에 빠지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보다 뜨겁고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에게 더 큰 영적 위협이 찾아온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새로운 체험과 깊은 깨달음을 몹시 갈망하기 때문이다. 즉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무기력한 신앙의 모습’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자신을 끌어올려줄 수 있는 성령님의 역동적인 활동을 갈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새롭고 신기한 종교적 현상’에 쉽게 마음을 연다. 여기서 토저는 우리에게 제시되는 종교적 도덕적 교훈들을 판단하고 영들을 시험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첫째, “그것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하나님에 대한 나의 개념에,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언제나 모든 신앙의 문제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 (사 42:8, 계 4:11, 시 145:3)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신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는 교리와 종교현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인간의 육신이나 사탄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악기에 비유될 수 있는데, ‘인간’이라는 악기는 때로는 성령님에 의해, 때로는 악한 영에 의해, 때로는 자신의 영에 의해 연주되기도 한다. 누가 연주하든지 우리의 종교적 감정 체험은 대동소이할 수도 있다. 저급한 예배 또는 우상에게 드리는 예배도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킬 수 있다.
둘째, “나의 새로운 체험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이다.
(마 3:17, 행 2:36, 요 14:6, 행 4:12)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만물의 으뜸이시며(골 1:18),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2:9).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참된 교리의 실천과 체험의 중심에 계셔야 한다. 아무리 감동적이고 만족스러운 체험이라고 해도 성경의 그리스도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망상일 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현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 중 많은 것들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신적 동기에서 시작되어 육신적 방법을 사용하면서 육신적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그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육신적 활동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순진한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반면에 새로운 체험으로 그리스도를 더욱 더 의지하게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체험 때문에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갔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셋째, “그 체험이 성경에 대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이다.
우리는 성경에 비추어 그 교리적 건전성을 확인한 다음에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 아무리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그 건전성을 증명해주는 성경구절을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설교와 모든 간증은 ‘최종적인 권위의 말씀’, 즉 성경에 의해 그 건전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가 사도들보다 지혜롭고 초대교회의 순교자들보다 더 거룩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하며 이런 사람들을 대하는 최고의 방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떠나는 것이다. 입씨름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성경이 모든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신실한 사람들 사이에도 성경해석의 문제에서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 이 때에도 “그것이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내게 더 많이 불어넣어주는가?”가 우리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참된 영적 능력은 성경 본문의 문자적 기록에 있지 않고, 거기에 영감을 불어넣으신 성령님께 있다. 그러나 성령을 성경의 기록에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성경을 떠나서 일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가까워지는 사람은 성경을 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담겨 있던 것이 이제 성경의 문자 안에 담겨있다. 따라서 새 교리, 새 선생의 영향 그리고 새로운 감정적 체험이 내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싶은 갈망을 불어넣어준다면, 나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믿을 것이다.
넷째, 그 체험이 나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피는 것이다.
성령님과 타락한 인간의 자아는 서로 완전히 적대적이다. (갈 5:17, 롬 8:5,7) 이 진리를 염두에 둘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아에 대한 태도가 어찌하여 그의 종교적 체험의 건전성을 시험하는 좋은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체험을 통해 내가 나를 ‘보잘 것 없는 천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면, 그 체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체험 때문에 내가 자만에 빠진다면 그것은 나의 자아나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다.
다섯째, “그 체험이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을 향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이다. 이런저런 영적 체험을 한 후 어떤 사람이 자기의 체험이 보다 우월하며, 자기가 좀 더 높은 수준의 은혜의 단계에 있으며, 다른 교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가 생각한 대로 그가 놀라운 체험을 한 것이 사실이며, 성경의 어떤 부분에 대해 깊이 깨달은 것도 사실이며, 전에 모르던 기쁨을 얻은 것도 사실이고, 그가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세속적이고 둔감하고 열심히 없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가 잘못된 것은 이런 사실들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사실들에 대한 그의 반응이 육신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적으로는 뜨거워졌을지 몰라도 바로 그것 때문에 사랑을 잃었다. (요일 3:28, 29; 4:7,8; 요일 5:1; 요 13:35)
은혜가 충만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육신이나 사탄에게서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여섯째, “그 체험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태도와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여기서 토저가 말하는 세상은 요일 2:16-17절에서 말하는 세상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리라.”
바로 이런 ‘세상’을 판단 기준으로 우리는 영들을 시험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세상’은 육욕적 즐거움, 불경건한 쾌락 그리고 부와 명예와 죄악으로 가득 찬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의 지혜를 따라 그리스도 없이 돌아가는 세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세상과 어울리는 것이 어색해진다. (요일 2:15, 고후 6:14) 따라서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도록 용인하는 영은 거짓 영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지 세상을 모방하는 기독교 운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배반하고 마귀의 편에 서는 것이다.
일곱째, “그 체험이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신자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은혜는 그가 죄에서 멀어지고 거룩함에 가까이 가도록 만들 것이다.(딛 2:11-13) 그는 “내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은혜를 받은 이후에 내가 나의 삶 속의 죄를 미워하는가?”라고 묻고 스스로 정직하게 대답하면 된다. 만일 죄를 미워하고 거룩함을 더욱 사모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 4부 하나님의 복된 임재를 체험하는 자의 승리
15장: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보물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 자체이시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많은 보물들 중 하나가 아니시며, 심지어 그중 최고의 보물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수단으로 이용되는 분이 아니시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노력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한 코미디언이 거듭된 실패 후 이렇게 약속했다. “하나님이 저를 연예인으로 성공하도록 만들어주시면 병든 아이들을 위한 후원금을 두둑이 내는 것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얼마 안되어 그는 나이트클럽과 텔레비전의 황금시간대에 출연하게 되었고, 그는 아동병원을 짓기 위해 거액을 모금하는 것으로 약속을 지켰다. 여기서 토저는 수많은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이 연예인과 실제로 이런 거래를 하셨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저급하고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배에 기름 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토록 인기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이유로 사랑을 받으셔야 한다. 오직 그분 자신을 위해서 사랑을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마찬가지로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받으셔야 한다. 그 분이 만물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실 분이라고 믿기를 바라신다. 주님을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렇다면 이제 이 정신을 기도에 적용해보자. 아무 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치명적인 함정이 곳곳에 숨어있는 분야가 기도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의 응답 그리고 역사적으로 신앙의 위인들이 경험했던 기도의 응답은 어떤 것인가? 이런 기도의 응답이 성립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가 구한 것을 주셨다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
첫째 조건에 대해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에 역행하여 행동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확신해야 우리는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릴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은 세상적이고 육욕적이고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요청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실 뿐이다. (요일 3:21,22; 요 15:7)
잘못된 기도생활은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기인한다. 기도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영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모르며, 자기가 제대로 믿는 것인지 아닌지 모른다. 왜냐하면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지 않을 때 그는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응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내가 구한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셨다”라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응답하신다. 이 진리를 벗어나는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된다.
16장: 진리의 정원을 가꿀 뿐만 아니라 담대히 진리의 편에 선다
지금의 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회담이 많은 시대이다.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불화한 이유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대의 생각을 정확히 알게 되면 자신의 생각과 상대의 생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매우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르므로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미소 짓고 악수하고 집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면 된다.” 이런 사고방식의 바탕에 깔린 철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은 형제이다”라고 믿는 사상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고방식이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믿지만 그것은 완전히 착각이다.
협상의 열풍은 교회에도 불어 닥쳤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세상을 닮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신흥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인 새 십계명이 있는데, 그 제1계명은 “너희는 반대하지 말지어다”이다. 또한 그들이 받아들인 새 팔복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관용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은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을 것이요”라고 시작한다. 이제 사람들은 “상대의 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도 않고 상대를 개종시키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는 전제 하에 종교 간의 대화에 몰두한다. 이런 대화의 목적은 진리를 찾고자 함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이 서로의 신앙을 확인하고 서로 배우기 위해서다.
그러나 진리가 더 중요하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주제로 이스라엘 백성과 공개토론회를 하는 데 동의했다고 상상해보라.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신사적인 대화에 나섰다고 상상해보라. 우리 주님이 바리새인들과 서로의 차이점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셨다고 상상해보라. 진리와 의를 희생하면서까지 화해를 시도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교리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얻을 수 없듯이, 건전치 못한 교리에서 건전한 인격이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첫째 신자로서, 그 다음 선생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념이 진리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확신해야 한다. 신념과 진리가 완전히 일치할 때 교리는 건전해진다. 진리에서 벗어난 신념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그들의 교리를 점검해야 한다. 진리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진리가 새어나갈 수도 있고 반대로 오류가 흘러들어와 진리를 변질시킬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이단을 좋아하게 되어있다. 정원을 방치하면 잡초가 자라듯이, 우리의 마음을 실피지 않으면 이단의 잡초가 뿌리를 내린다. 개인, 교회 또는 교파가 이단에 오염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자기들이 믿는 교리가 절대 이단에 물들지 않을 것이라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이단에 빠지는 지름길이다.
몽테뉴는 “거지말쟁이는 하나님을 향해 담대하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겁쟁이가 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쟁이는 하나님에게 대들고 사람들 앞에서는 움츠러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속으로 “눈에 보이는 인간들을 불쾌하게 만들면 내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차라리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를 소홀히 여기는 이유가 결국 불신앙에 있음을 보여준다.
교리적으로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언제나 자유주의자들의 특징이었다. 오늘날 자유주의적 교회들에서는 이성과 정서의 혼합이 성경의 권위를 대신한다. 자유주의적 교회들은 성경을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어떤 것이라도 진리가 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아무 것도 확실하게 믿지 못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현대주의자들은 성경, 과학 그리고 인간의 정서를 뒤섞어서 혼합물을 만들어냈다. 사실 이것들을 섞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잘못될 것이 없다. 본래 조화될 수 없는 이것들을 섞어서 ‘우유처럼 뿌연’ 모호한 사상을 만들어낸 것이 문제이다. 이것들은 서로 상쇄하고 죽이기 때문에 ‘죽도 밥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교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도덕적 힘이 나오는 법이다. 위대한 성도들은 언제나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들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으로 포용적 태도를 취하며 동시에 ‘영원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위에 굳게 서는 일이다.
17장: 진노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지 않는 불신앙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결정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결정하려고 한다. 우리는 멋대로 그분의 말씀을 수정하고 삭제하고 편집하고 그것에 다른 것을 첨가한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배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며,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사랑만큼이나 거룩하며 하나님의 진노와 그분의 사랑이 서로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거룩함에 비추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훼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영원히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거룩하지 못한 것’에 대적할 때마다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 싸움에서 하나님이 취하시는 태도와 행동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이다. 우주가 ‘돌이킬 수 없는’ 도덕적 붕괴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악을 진멸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도덕적 부패를 방지하고 우주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방부제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18장: 기쁨에 찬 영광스러운 소망을 바라보라
주님의 재림을 열망했던 과거의 신자들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잘못이라면 ‘종말의 시기’가 문제였다. 그들은 다만 주님의 재림 시기를 실제보다 앞당겨 잡았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누군가 말했듯이 ‘허황한 소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으려고 돌아가다가 너무 멀리 나아가 ‘절망의 광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종말론적 신앙의 쇠퇴를 야기한 원인들이 많지만, 그 중 큰 원인은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 부요한 사회가 되었다는데 있다. 현재의 삶보다 더 안락한 삶을 상상하기 힘든데 어찌 ‘장차 올 더 좋은 세상’을 소망하겠는가?
그러나 종말론적 신앙을 쇠퇴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은 신학의 문제로 거짓 선생들이 그리스도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그분을 인간화하고, 그분의 지위를 강등시킴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이 ‘새 질서의 세계’를 이루시리라고 더 이상 기대하지 못하게 만든 점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현대인들의 조급함 때문이다. 그들은 ‘새 질서의 세계’가 그들의 시간표가 아닌 주님의 시간표를 따른다는 것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기다림을 포기하고 다른 것들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다.
종말론에 관한 구구한 해석들도 종말론적 신앙의 쇠퇴를 야기한 또 하나의 원인이다. 사람들은 종말론에 관한 복잡하고 따분한 논쟁에 신물이 났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교리’와 재림에 대한 ‘소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토저는 재림의 소망 없이 재림의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많은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고 기대하며 기쁨으로 충만한 승리의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은 것을 한탄한다.
첫댓글 토저의 날카로운 진단에 공감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정규교욱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토저의 설교는 한마디 한마디가 명문이라 했는데 직접 들은적은 없고
오래전에 책은 몇권 읽었습니다.
교회의 타락과 썩을대로 썩은 부패상, 세상과 타협하는 싸구려 크리스챤 신자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깊이있는 그의 사상들은 성경과 성령님께로 부터 배운 것이라는데에 의심이 없습니다.
아, 토저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셨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예리하게 볼 수 있을까요?
@어린양 대부분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도 세상을 뒤엎은것과 같겠지요.
썩을대로 썩어 악취가 나는 기독교의 부패의 현실을 깊숙히 보고 외친 토저의 글들은
가슴을 치는 글들로 가득 찼었습니다.
애석하게도 A.W 토저 사후(1963년)엔 이만한 사람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겁니다.
토저가 평생 세상적 크리스챤들의 삶의 개혁과 부흥을 외쳤으나 "그곳에서 나오라"는
말씀까진 가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래도 흔치않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생각 되며
그의 묘비엔 담백하게 이렇게 새겨져 있다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A.W.Tozer"
읽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읽으면서,, 우릴 만나주신 하나님.
체험케하시며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안에 우리가 살고있다는 감사를 다시 확인하는 좋은시간을 누렸습니다.
주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길인지...
우리의 일생을 다룬 귀한글 가져오셔서 감사합니다.
토저님이 주님과 동행한 신앙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