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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역에 전단지(삐라)를 살포하는 일로 요즘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는 탈북자 朴相學(박상학)씨가 울었다. 2008년 12월 6일 한나라당 朴熺太(박희태)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다. 그날 그가 흘린 눈물은 기쁨의 눈물도, 서러움의 눈물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날 그 상황에서 그가 흘린 눈물은 그의 답답한 심정을 외부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박씨는 盧武鉉(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년부터 北(북)에 삐라를 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삐라를 풍선에 담아 보내기 때문에 ‘풍선사업’이라고도 한다. ‘사랑하는 북녘의 동포들에게!’로 시작되는 이 삐라에는 6·25 전쟁이 북한의 南侵(남침)에서 비롯됐다는 ‘6·25 전쟁의 진실’, 南(남)과 북의 현실을 비교한 ‘북조선이 망한 리유’, 金正日(김정일) 家系(가계)의 부도덕성을 폭로한 ‘김정일 출생의 비밀’ 등이 ‘조선(북한) 인민해방전선’이라는 단체 이름으로 실려 있다.
삐라에 실린 예민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박씨 등이 벌이는 ‘풍선사업’은 지난 수 년간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하게 진행돼 왔다. ‘풍선사업’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며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북한이 북한민주화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대표 崔成龍·최성룡)이 보내는 삐라를 핑계로 남한 사회에 위협에 가까운 시비를 걸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매국단체’
북한은 2008년 10월 2일 열린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삐라 살포가 계속될 경우 개성공단에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북한의 ‘위협’에 가장 먼저 화답(?)한 곳은 대한민국 정부의 통일부다. 통일부는 같은 달 8일 북한에 삐라를 살포하고 있는 對北(대북) 단체에 “대북 삐라 살포 자제”를 요청했다.
북한의 위협과 통일부의 자제 요청이 이어지며 ‘대북 삐라 살포’가 사회 이슈로 등장하자 삐라 살포를 주도하고 있는 북한인권단체에는 보수진영으로부터 들어오는 후원금이 급증했고 격려전화도 쏟아졌다. 통일부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북한인권단체의 북한 지역 삐라 살포는 계속됐다. 10월 10일에는 북한 인권운동가인 미국의 디펜스포럼 수잔 숄티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西海(서해) 무의도 앞바다에서 삐라를 풍선에 실어 북한 지역으로 날려보내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삐라 살포 자제를 요청하는 정부의 대응 수위도 높아졌다. 정부는 10월 19일 통일부, 외교통상부, 국방부, 경찰, 국정원 등 유관기관 국장급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북 삐라 살포와 관련 범정부 대책회의를 열었다. 범정부 대책회의 후인 24일 통일부는 북한인권단체에 관계자를 보내 또 다시 삐라 살포 자제를 요청했다.
북한의 위협 후 급증했던 북한인권단체에 대한 후원금은 이 무렵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보수를 자처하는 일부 진영에서도 “북한이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을 우리 정부에 떠넘기게 하는 구실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대북 삐라 살포 자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북한인권단체에 대한 야당과 좌파 단체들의 공격이 본격화됐다. 민주당 崔宰誠(최재성) 대변인은 2008년 10월 29일 브리핑에서 “일부 극우단체들의 대북 삐라 살포는 시대에 뒤처진 불장난”이라고 비난했다. 같은 당 宋永吉(송영길) 의원도 11월 3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삐라에 실린 내용에 대해 “지저분한 이야기”로 표현했다.
이후에도 북한인권단체의 삐라 살포는 계속됐다. 2008년 11월 24일 북한은 “12월 1일부터 남북간 육로통행 제한 및 차단조치를 시행한다”고 예고했다. 같은 달 26일 민주당 최재성 대변인은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 등을 ‘매국단체’라고 비난했다. 박상학씨는 이에 맞서 12월 1일 “오는 12월 2일 삐라 10만장을 살포하겠다”고 발표하자 최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 현안 브리핑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삐라를 계속 뿌리는 한 분명히 매국단체”라고 또 다시 맹비난했다.
‘중단’과 ‘자제’ 사이에서
12월 2일 오전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은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삐라 10만장을 풍선 10개에 달아 날려보낼 계획이었지만 한국진보연대 등 좌파단체들의 저지로 1만장을 매단 풍선 한 개만 북쪽으로 보냈다.
이날 좌파단체들과의 몸싸움으로 박상학씨는 목에 깁스를 하는 부상을 당했다. 좌파 인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박씨는 지니고 있던 가스총을 꺼내 공중 발사했다가 경찰에 압수당했다. 이날 삐라 살포를 방해한 진보연대 핵심인사들은 2002년 ‘효순·미선양 범국민대책위’, 2005년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 ‘맥아더 동상 파괴시위’, ‘미국산 쇠고기수입반대 촛불시위’를 주도했다.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은 다음날인 12월 3일 같은 장소에서 국민행동본부 등 우파단체들이 참석한 가운데 삐라 10만장을 다시 북으로 날려보냈다. 이날 박씨는 “좌익 세력을 뿌리 뽑고 북한 동포를 해방시키는 날까지 전단 살포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이틀 후인 12월 5일, 박상학씨는 납북자가족모임 최성룡 대표와 함께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를 면담했다. 박 대표와 30분간 면담한 후 합의문을 발표했다. 그 합의문의 일부다.
‘박희태 대표는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의 충정을 이해하고, 대북 전단 살포가 헌법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어긋남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북한 측이 대북전단을 구실로 각종 대남 강경조치를 취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대승적 차원에서 대북전단 살포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권유에 따라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은 대북 전단 살포를 당분간 자제하고 북한의 태도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 합의문은 한나라당 박 대표와 박상학씨 측의 면담이 이루어지기 직전 결정된 내용이다. 삐라 살포를 잠시 멈추겠다고 한나라당과 합의를 해놓고도 박씨는 왜 눈물을 보였을까.
이날 박희태 대표와 박씨 일행의 면담 전 양측은 합의문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고 한다. ‘자제’와 ‘중단’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이었다. 박 대표 측은 ‘살포 중단’을 합의문에 넣고 싶어했고 박씨 측은 ‘살포 자제’를 고집했다고 한다. 박씨 측의 요구대로 ‘자제’라는 단어를 합의문에 넣기로 한 후 박 대표와의 면담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박씨는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정부가 관련기관 대책회의까지 열어가면서 ‘삐라 문제 대책’을 논의한 후에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면서 보수 진영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보수’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도, 한나라당도 중단하라고 말하니까 이제는 ‘보수’라고 알려진 목사님들까지 나서서 중단하는 게 어떻겠냐고 해요. 입 가진 사람들이면 다 중단하라고 말합니다. 노무현 정부 때도 하던 일인데 왜 보수 정권이라는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북한에 전단지를 보내면서 요즘처럼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기는 처음이에요.”
박상학씨의 눈물은 북한을 탈출한 후 남한 사회에 와서 북한 민주화 운동을 벌이고 있는 탈북자들의 孤立無援(고립무원)의 심경을 대변하는 눈물은 아니었을까.
부친은 北送된 재일교포 출신
박상학씨는 1968년 중국과 접경 지역인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나 김책공대를 졸업했다. 北送(북송)교포 출신인 박씨의 부친은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35호실) 소속이었다. 일본 나가노현(長野縣)에서 태어난 부친은 스무 살 때 공부를 하고 싶어서 박씨의 모친과 함께 북송을 택했다고 한다.
북송 후 김책공대 체신학부를 나온 박씨의 부친은 무선통신 분야 과학기술자로 일하면서 인민군 무전기 현대화, 無線(무선) 폭파장치 등 군사 분야에서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 또 소련 기술자들과 함께 초단파 중계소를 설립했다고 한다.
박씨 자신도 아버지가 졸업한 김책공대 체신학과 출신인데, 학교에 다닐 때 부친이 쓴 저서로 공부했다고 한다. 당시까지 북한에서 초단파 공학에 관한 저서는 박씨 부친이 쓴 것이 유일했다고 한다.
박씨의 부친은 1980년대 중반에는 노동당 과학기술부에 들어가 코콤(COCOM·對공산권 수출조정위원회) 관련 일을 했다. 코콤은 공산권의 위협을 막기 위해 수퍼 컴퓨터 등 軍需(군수) 물자가 공산권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다. 박씨의 부친이 맡은 일은 서방 세계로부터 공산권으로의 유입이 금지된 기술들을 입수하는 일이었다. 이 일 때문에 박씨 부친은 중국 베이징에 주재하면서 소련, 유럽, 일본 등을 왕래했다고 한다.
과학기술부에서 활동 성과를 인정받은 박씨 부친은 1990년대 초 노동당 35호실로 스카우트돼 해외 업무에 종사했다. 이때부터 박씨의 가정환경은 확 바뀌게 된다. 노동당 11과 관리 대상이 된 것이다. 노동당 11과는 대남침투 임무 중 사망한 요원의 가족 등 혁명가가족을 국가가 특별히 돌보아 주는 곳이다. 박씨 가족도 혁명가가족 대우를 받는 특수층 신분이 된 것이다.
박씨는 김책공대 졸업 후인 1990년대 중반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 산하 속도전 지도총국 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일했다. 탈북 직전에는 외화벌이를 하는 조선인민군 총참모국 38국 소속이었다. 인민군 안에서는 노른자위 자리였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엘리트 계층으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박씨 가족이 탈북을 감행하게 된 것은 해외에 나가 있던 부친 때문이었다. 해외에 체류하고 있던 박씨의 부친은 1990년대 중반 일본 NHK에서 방영된 북한 관련 프로그램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 150만명 내지 200만명의 餓死者(아사자)가 발생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시체가 두만강에 떠내려가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
그 무렵 북한에서는 ‘35호실 사건’이 발생했다. 35호실 부장이었던 권희경이 대남 공작과 관련, 숙청된 것이다. ‘35호실’사건 발생 후 해외에 나가 있는 공작원들에 대한 소환명령이 떨어졌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박씨 부친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화벌이 실적 등이 좋았던 박씨의 부친은 사업마무리 등을 핑계로 차일피일 시간을 끌면서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35호실 사건’으로 소환 명령 받은 부친
박씨의 부친은 보통 1년에 한 번씩 들어와 한 달 내지 두 달 정도 머무른 후 다시 해외로 나가곤 했다. 그런데 ‘35호실 사건’과 관련해 대외정보부 소속 해외근무요원들에게 소환령이 떨어진 것을 알 수 없었던 박씨 가족은 부친이 귀국할 시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자 애가 탔다.
1999년 5월 박씨의 부친은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사람을 보냈다. 박씨는 그 사람이 건네는 부친의 편지를 받아서 읽었다. 북한을 탈출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박씨는 부친의 편지를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처럼 지도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분이 무엇 때문에 이러시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이건 혹시 謀害(모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고요.”
박씨는 부친이 심부름을 보낸 사람이 평양을 떠나기 전날 그를 다시 만났다. 박씨는 그 사람에게 평양에 다시 올 때 부친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가져올 것을 요구했다. 그 사람은 한 달 후에 다시 오겠다면서 평양을 떠났다.
약속한 한 달이 지났지만 부친의 육성녹음을 가져오기로 약속했던 사람은 오지 않았다. 박씨는 아버지로부터의 회신을 기다리던 그때 그 시간을 “일생일대에 최고로 스트레스를 받은 시기였다”고 기억한다.
“하루가 1년 같고 잠도 오지 않았어요. 잘못하면 요덕수용소로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보위부에서 내막을 알고 밤에 덮치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안 오면 나머지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건가, 등등 온갖 걱정에 가슴이 다 타들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목숨 건 脫北
부친이 심부름을 보낸 그 사람은 평양을 떠난 지 두 달 만에 박씨를 찾아왔다. 1999년 7월 말이었다. 박씨는 그가 가져온 부친의 육성녹음을 들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부친이 틀림없었다. 그의 부친은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한 후 북한으로 왔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과 발음이 달랐다. 부친만의 독특한 사투리가 있었던 것이다. 부친은 압록강 건너 중국 쪽에 박씨 가족을 안내할 사람을 구해놓았다고 했다.
부친의 뜻을 확인한 박씨는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 설득에 들어갔다. “가지 않으면 죽고, 가다가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 땅을 떠나야 한다”고 설득했다. 다행히 가족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문제는 그의 약혼녀였다. 그는 약혼녀와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있었다.
함께 탈북을 하고 싶었지만 가다가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길이었기 때문에 차마 함께 가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연좌제로 인한 피해를 입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했다. 자신의 가족은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의 약혼녀만은 최소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박씨는 약혼녀를 고향에 남겨두기로 했다.
탈북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박씨는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가 나고 자란 고향 혜산에는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중국을 오가며 밀수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을 통해 인민군 국경 경비대 초소장을 돈으로 매수할 수 있었다. 박씨는 초소장에게 큰 물건을 날라야 한다며 박씨 가족이 지나갈 국경 좌우로 200m 정도를 비워달라고 부탁했다. 경비대 초소장에게는 중국에서 돌아올 때는 처음에 준 돈의 두 배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압록강을 건널 때 사용할 자동차 튜브도 구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9/20081219006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