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일 영원히 사는 생활
신앙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 무병장수는 환갑 잔치를 해야 했던 시대 사람들의 바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현실을 보면 장수는 축복이 아닌 거 같이 보인다. 내게 축복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더 가깝게 느낌이다.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내 신앙이 도전을 받는 중에 십자가에서 수난하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더 가깝게 느끼기를 바란다. 시메온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셨다.(루카 2,34)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표지가 되었다. 그런데 믿어서 십자가를 지게 된 게 아니라 사실 여기서 사는 거 자체가 고통이고 수고스러움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는 수고와 고통이 곧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이 지는 십자가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신앙이 나에게 지어주는 멍에와 짐 같은 거다.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다. 예수님 말씀인데,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면 그렇게 된다는 뜻으로 알아듣는다.(마태 11,29-30) 신앙이 무겁고 짐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수고스러운 삶에 신앙이라는 짐을 하나 더 짊어지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사람이 되시고 거기에 죄인이 되시기까지 낮아지셨다. 털 깎기는 어미 양처럼 그분은 반대자들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지니셨던 온유와 겸손은 그분이 이미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증언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그런데 이 말씀의 직역은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나는 있다.’ 정도가 된다. 아주 이상하지만 사실이다. ‘있는 나’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알려주신 당신 이름이다.(탈출 3,14) 즉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이다.’ ‘나는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이다. 내가 마음속으로 혹은 입으로 부르는 그분,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을 믿고 따름으로써, 그분 말씀을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내 삶으로 뿌리를 내리게 해서 나는 영원히 산다. 내 안에서 나는 점점 작아지고 그분이 점점 커져야 한다.
내 신앙은 현실적인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내세만을 바라보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여기서 영원히 있을 거처럼 살게 한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하루하루 충실하게 생활하게 돕고 격려한다. 그러면서도 하루 중 여러 번 저 높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것은 저 우주 끝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 품이며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내 마음을 두는 행동이다. 예수님도 돌아가셨고, 예수님도 불의한 세력을 쳐부수지 못하셨는데 나 같은 죄인이 불의한 세상에서 뭘 할 수 있겠나. 그분은 싸움이 아니라 죽음으로 증언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예수님 안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졌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을 알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요한 17,3) 나는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분이 하느님이시라고 믿는다. 예수님은 지금도 나 그리고 믿는 모든 이와 함께 계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미 영원히 살기 시작했다. 죽음은 단지 파스카, 건너감이다.
예수님,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리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윤리적 가르침이 인간의 참된 삶이라고 믿습니다. 국법이 다르게 말해도 믿습니다. 저희 순교자들은 모두 국법을 어긴 범법자였고, 주님은 신성모독자였음을 기억합니다. 땅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생활하면서도 마음을 드높여 하늘을 우러르는 걸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으로 기도할 때마다 하늘나라를 그리워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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