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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세 총기사-
이토오 히로부미 제거했던 브라우닝 권총
----안 중근 의사의 놀라운 사격술 분석
케이블 방송을 보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오늘이 10월 26일이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
러시아 재무 장관 코코프체프와 일단의 관리들은 곧 기차로
도착 할 일본의 거물 정치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년전 러일 전쟁에서 그간 원숭이라고 부르며 내심 경멸하던
일본인들에게 크게 패해서 대일 감정이 안 좋았던 러시아군들은
그런 경멸감을 감추고 엄숙히 도열하고 있었다.
기차는 곧 도착했다.
러시아 대신 코코프체프는 열차 안으로 들어가 손님을 영접했다.
조금 뒤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의 안내을 받으며 긴 외투를 입고
중절모를 쓴 하얀 수염의 한 동양인이 제법 위엄을 부리며 역으로
내려섰다.
군악대의 환영 연주 속에 그 일본인 신사는 모자를 벗어 도열한
러시아의 의장대 앞을 지나며 사열을 받고 의장대 끝에서
일장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일본인 거류민들에게 답례를 하고
뒤로 돌아서서 걸었을 때다.
2 열 횡대로 도열한 러시아 병사들 사이로 5 미터 거리
후방에서 총성이 들렸다.
의장대는 양팔 간격으로 서 있어서 병사들간 사이가 넓었다.
그 간격을 뚫고 앞의 일본인 노인에게 총탄이 쏟아졌다.
총성은 연달아 들렸다.
러시아 병사들은 자기들 후방의 총성에 기겁을 하고 우르르
뒤로 물러섰다.
러시아 병사들을 뒤에 뒨 형태가 된 저격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앞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첫 총성이 퍼짐과 동시에 노신사는 움찔했다.
이어서 연달아 터지는 총성에 그는 세 발의 실탄을 맞고 역의
프래트폼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쓰러지고도 총성은 서너발 더 들렸다.
사격을 다한 저격자는 권총을 땅에 버렸다.
그러자 러시아 경찰서장이 그의 팔을 잡았고 이어 얼이
빠져있던 러시아 의장대 중에 두 명의 러시아 군인이 그를
덮쳐 손을 뒤로 포박했다.
그 사이 그 저격자는 태극기를 꺼내 들고 “코레아 우라!
( 대한민국 만세!)” 를 목청껏 외쳤다.
역 앞의 러시아 군 헌병대 사무소로 연행 되어간 그는 그가 쏜
하얀 수염의 일본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가슴에 성호를 긋고
천주께 감사했다.
그는 기본적이 조사가 끝나자 일본 영사관에 넘겨졌다.
총을 맞은 일본인은 긴급히 타고 온 열차 안으로 옮겨져
응급 처치를 받았으나 얼마 안 되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 하얼빈 역의 사건은 안 중근 의사가
일본의 공작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한국 역사의 중대한 대의거였다.
안 중근 의사- 거사 뒤 목에 두른 칼라와 모자를 압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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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은 기울대로 기울어 이미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조선은 왕조가 문을 닫고 망하는
카운트 다운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러일 전쟁이 끝나고 이제 동아시아에서 거칠 것이 없던 일본은
한국 식민지화 정책에 착수했다.
이 조선 접수의 흉계와 실행에 앞장선 자가 이토이다.
그는 통감이라는 감투를 쓰고 우찌다 료헤이라는 일본 낭인을
데리고 와서 조선 조정을 마구 뒤흔들어대며 공작을 진행했다.
조선인들의 사무친 원한을 샀던 이토오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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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대신들을 매수하여 을사오적이라는
매국노들을 집단을 형성 한 뒤 식민지화의 일단계로 외교권과
경찰권, 군권을 빼앗아 버렸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그 작업의 과정은 거칠고 야비하기
짝이 없어서 이토오는 조선 민족의 증오가 한 몸에 찍힌 원수가 되었다.
한복을 입은 이토오 - 그는 교활하게 궁중의 왕과 대신들에게 접근
했다. 앞줄 오른 쪽에서 두번째 한복입은 여인도 그의 아내 우메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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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840년 지금의 야마구찌 현인 조오슈의 하기 촌에서 태어났다.
한국과 가까운 이 지역은 유달리 한국인을 닮은 일본인들이
많은 곳이다.
조오슈 출신으로 나중에 육군 대신으로 출세한 야마가다 아리도모
(山縣 有朋)원수라던가 러일 전쟁의 영웅이 되었던 역시 조오슈 출신이었던
노기 마레스케(乃木 希典)대장등이 그들 조상이 조선인이었다는
소문을 달고 다닐 만큼 한국인들을 닮은 용모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20세기 초 조선을 침탈을 할 때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한국 식민지 공작을 위한 인선을 할 때 일부러 한국인들과 비슷한
이 곳 출신들을 선발하여 보냈다는데 조선으로서는 반도에서
건너간 한국인들의 후예였을지도 모를 이들에게 유린당한 것이
비통 할 노릇이다.
작가 시바 료타로가 그의 역사 소설에 등장하던 때의 젊은 이토오를
조선인을 닮은 사람으로 묘사했던 것처럼 그도 한 민족과 비슷한
용모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최하층 계급인 농부도 못 되고 농부의 집에서
머슴을 살던, 성도 없었던 미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조선으로 치면 자손 대대로 벗어 날 길 없이 세습되는
노비의 신분이었다.
천민 중에서도 최하층 천민이었던 것이다.
이토오는 천한 신분임에도 어린 시절부터 야망은 컸었던가, 치졸한
솜씨로 그린 도요도미 히데요시(豊信 秀吉)의 초상화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매일 경배를 했다고 한다.
독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히데요시는 농민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말몰이 시동으로 시작하여 출세가도를 달려 일본 천하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해서 막중한 고통을 안겨 주었던 조선민의 원수였다.
그러고 보니 조선이 두 번이나 일본의 최하 천출(賤出)들에게
능멸당한 셈이다.
이토오에게 운이 따랐던 것은 집 근처에 일본 메이지 유신의 한 정신적
분기점이 되었던 요시다 쇼잉(吉田 松陰)의 학숙(學熟)이 있었고
이토오가 이곳에서 천민의 신분에도 불구하며 어깨 너머나마 공부를
하며 학숙의 사무라이들인 선후배들과 친근해질 수 있었다는 계기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요시다 쇼잉 (吉田 松陰)은 과격한 막부 부정사상으로 처형되었지만
이 사무라이 제자들이 나중에 메이지 유신의 조슈(長州)파 근간이 된다.
붙임성 좋은 이토오는 이들 조오슈 지사 무리의 총 우두머리인
가쓰라 고고로(桂 小五郞- 후의 木戶 孝允)의 몸종이 되어서 활약했다.
막부 말의 혼란기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 무사 계급이 되었고 막부
타도의 유신에서 꽤 활약을 하다가 나중에 유신 정부가 들어서자
승승장구의 출세 가도를 달려 귀족의 최상위 작위인 공작 작위를
받았었고 총리를 네 번이나 하는 관운을 누린다.
허나 그가 천한 출신임은 상상을 뛰어 넘는 그의 호색함이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출세 한 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여자를 밝히고
돌아 다녀서 주변의 빈축이 끊이지 않아 메이지(明治) 일왕이
주의를 주기도 했었다.
그런 천한 인간에게 양반들이던 조선의 대신들이 능멸당하고 삼천리
강토가 유린당했으니 이를 알면 당시의 조선 유학자들은 치를 떨며
분을 삼켰을 것이다.
그를 저격한 안 중근 의사에 대해서 소개한다.
1879년 9월 2일에 전 진해 군수 안 인수의 손자이며 진사 안 태훈의
장남으로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천석군으로 부유했던 지방 명망가였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안진사 이야기가 소개된다.
백범 소싯적에 안 중근의 아버지 안 태훈 진사가 사는 청학동을
찾아가서 그와 대면했었다.
백범은 안 진사를 시골에서 보기드믄 그릇 큰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안 의사의 부친 안 태훈 진사. 안 의사 의거 5년 전 사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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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중근은 어린 시절부터 활달하여 무인의 기상이 보였었다.
안 중근의 나이 16 세 때에 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비적화해서 노략질을
일삼고 다니는 사이비 동학군을 아버지와 함께 토벌대를 일으켜
토벌해서 지역민의 치안을 도모한바있다.
안 중근은 하얼빈 거사 전 이미 300명의 의병을 일으켜 두만강을
넘어 경흥을 공격하는 무장 투쟁을 했었다.
그러나 포로로 잡은 일본인을 없앨 수 없어 놓아준 것이 화근이 되어
포로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부대는 흩어지고 안 의사는 노령으로 피신했다.
노령으로 피신한 안 중근은 일단 노령의 애국지사 최 재형이
실제 소유주 였던 대동공보 촉탁 기자로 일하면서 일제에 대한
증오감을 불태워 왔었다.
이토오가 1910년 10월 26일 하얼빈에 온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본
안 중근은 곧 최 재형에게 이토오 제거의 의거를 제안했고 여기에
신문사의 경리 사원인 우덕순이 가세했다.
우라지보스톡의 큰 재력가였던 최 재형의 지원이 있었기에
하얼빈 거사가 가능했다.
후에 일본군에게 피살되었지만 최 재형은 한국 독립 운동사에
크게 기록될 거목이었다.
안 중근 의사에게 조 도선이 가세하여 거사 인원은 총 세 명이 되었다.
최 재형은 권총 세 정과 필요한 경비를 제공했다.
이토오가 하얼빈에 오기 전 채가구(지야이지스코)에 중간 정차 할 것에
대비해서 이곳에 우 덕순과 조 도선이 배치되었으나 이토의 기차는 바로
중간 정차없이 하얼빈 역으로 들어와서 안의사의 결의를 가능케 했다.
최 재형이 제공한 권총은 세 자루 였지만 종류는 두 가지였었다.
벨기에 제 브라우닝 M1900 2정과 다른 한 정의 리볼버였다.
한 한국 기록은 우덕순이 러시아 군용 리볼버(육혈포)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그가 가진 권총을 압수해서 일본에 넘긴 것은
안 의사와 같은 브라우닝 자동 권총이었다.
그리고 희미한 사진으로 보니 리볼버도 러시아제
군용 나강 리볼버가 아니라 유럽제로 추측되는 소형 리볼버였다.
이 리볼버는 우 덕순과 같이 체포 된 조 도선이 가지고 있다가
압수당한 것이다.
이날 이토오에게 세 발이나 총탄을 퍼부은 것은 안 의사가 사용했던
브라우닝 권총이었다.
브라우닝은 미국인 존 모세 브라우닝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생산 한 것이었다.
존 모세스 브라우닝 - 자신이 발명한 M 1917 수냉식 기관총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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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모세 브라우닝은 가히 천재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이미 13살에 직업이 총공(銃工)이었던 아버지의 총 수리 공장에서
스스로 만든 첫 작품을 내놓았으며 그의 일생동안 128개의 총
기 관련 특허를 따냈고 헤아릴 수없이 많은 무기를 디자인했었다.
브라우닝 M 1900 7.65mm 권총
미국 중고 총기 시장에서 8-900불에 판매되고 있는데 전쟁 기념관에서
이 권총을 구입해서 구입해서 전시하면 어떨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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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생산 시설을 가지지 않고 특허를 낸 자신의 디자인을
팔거나 판매 수수료만 받았다.
그의 디자인을 받아 총기를 생산한 회사들은 대서양 양쪽으로
다양하다 .
미국의 윈체스터나 레밍턴 그리고 콜트사등이 그가 제공한
디자인의 무기를 제조해서 재미를 본 주요 미국 총기 생산업체들이다.
그 히트 상품의 종류는 권총, 엽총에서 물론 군용의 공용화기까지
다양했었다.
한국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브라우닝의 무기가 많다.
군에 다녀온 남자 분들이라면 잘 알 수 있는 50구경 중 기관총이라던가
또는 아직도 일부 군경에서 쓰고 있는 콜트 45구경 권총,
그리고 옛날 국군 보병의 BAR과 LMG도 등이 그의 발명품이다.
그의 디자인은 바다 건너 벨기에의 Fabrique Nationale, 쉽게 줄여서
FN사에서도 받아 들여져 여기서도 그의 이름이 붙은 권총과 엽총들의
명품이 탄생했다.
벨기에의 FN사에서 만든 브라우닝 권총들은 여러 가지로
획기적인 디자인을 담고 있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존 브라우닝이 디자인하고 벨기에의
FN사에서 출시 된 권총이 위의 사진에서 보는 브라우닝 M 1900이다.
이 권총은 세기 말 1897년 브라우닝에 의해서 그 시제품이 완성되고
그 특허가 벨기에의 FN사에 매도되어 약간의 개량을 거친 끝에
브라우닝 M 1900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출시되었다.
세기의 시작과 함께 선 보인 이 권총은 혁신적인 특징들을 기록한다.
먼저 이 권총은 20세기의 첫 해에 선보였다는 상징적 의미가
실질적으로 크다.
19세기는 세기 중반에 미국 콜트사가 만들어 내던 6연발
리볼버 권총이 주도했었다.
이어 개막된 20세기에는 자동권총의 시대였다.
자동권총은 우리가 지금 각국 군대의 권총에서 보듯 탄창이 있고
위의 슬라이드를 당겨서 장전과 방출을 하는 형태의 권총으로
작동 원리는 기관단총과 같이 반동식이다.
반동식은 총탄이 발사될 때 발생하는 반동력을 이용하며 총신이
대개 발사와 함께 전후로 움직인다.
20세기 원년에 선보인 획기적인 스라이드 작동식의 브라우닝의
M1900 권총은 현대 자동 권총의 출발점이 되었다.
오늘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소련, 일본,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거의 모든 나라의 군용 권총은 이 슬라이드 방식이다.
브라우닝 M 1900이 이룬 또 다른 신기원은 소위 말하는 ‘은익 휴대용’
포켓 권총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포켓 권총이란 문자 그대로 권총을 포켓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소형이라는 뜻이다.
외부에 나타나지 않고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권총에 대한 시장의
욕구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19세기경 콜트의 리볼버 시절에도 이런 소형 권총이
생산 되어 왔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총이 소형화 되려면 탄도 소형화 되어야 했다.
그러나 19세기 폭발력도 약한 유연화약 시절에 이렇게 소형화 된 탄은
위력도 약하고 성능도 불완전해서 탄과 총기의 크기를 소형화하기도
한계가 있었다.
1880년대부터 실용화되기 시작한 강력하고 연기나 총강 내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무연 화약은 90년대 들어와서부터 유연화약을 몰아내고
본격적으로 화약계의 안방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브라우닝은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이 화약을 이용하면 잠재 시장이
큰 소형 포켓 피스톨을 개발할 수 있으리라고 예측하고 7.65 밀리 탄을
먼저 개발하고 이어서 이 M 1900 권총을 디자인했다.
실탄이 먼저 나오고 총이 나오는 드문 사례였다.
브라우닝의 예측대로 M 1900은 잠재된 포켓 피스톨 시장의
큰 호응을 얻으며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약 10년 가까이 생산된 이 권총은 더 개량 된 포켓 피스톨에 밀려
1908년 생산이 중단되기까지 70만정이나 판매되었다.
소형인 포켓 피스톨이 전투 상황에 쓰기에는 위력이 약했던 관계로
군의 제식 권총으로 채택하지 않았으나 유럽 각국의 경찰 등
사법 기관 근무자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사복 차림에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숨겨서 소지하기에 이 브라우닝
권총보다 더 이상적인 권총은 그 무렵 없었다.
(안 의사도 거사 날 권총을 외투 안주머니에 넣고 역에 나갔었다.)
브라우닝이 포켓 피스톨용으로 직접 개발한 실탄 7.65미리에 대해서
권총 자체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미국에서는 이 탄은 32구경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M 1900이 단지 10년 정도의 상품 생명을 가진 반면 이 실탄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인기도는 비슷한 시기인 1902에 탄생하여 지금은
군용 총기의 표준탄이 된 9mm탄에는 할 수는 없지만 미국의
민수용 권총 시장에서는 7.65실탄 권총은 아직도 스티디 셀러이다.
7.65미리 실탄 -32 ACP 카빈 실탄을 짧게 축소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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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탄은 독일에서 더욱 사랑을 받았는데 7.65미리를 발사하는 가장
유명한 권총은 독일의 권총 왈서(발터 Walther) PP 권총이다.
7.65미리 탄과 한국과의 인연도 상당히 길다.
7.65 미리 탄과의 인연은 안 중근 의사의 결의 후에 세월을 한참
건너 뛰어 한국의 역사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남한 도발이 극심했었다.
그 무렵 남한에 침투하던 무장 간첩들은 VZ 61 Scorpion이라는
첵코제 소형 기관단총을 휴대하고 침투 했었다.
이 기관단총은 브라우닝의 7.65 미리 탄을 사용했었다.
체코제 미니 기관단총 - 7.65미리 탄을 발사한다.
남파 간첩들이 들고 내려 왔었는데 김 일성의 경호실인 호위총국에도
지급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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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실탄은 기막히게 극적인 역사의 현장에 얼굴을 내민다.
그 현장은 한국 역사에서 안 의사의 의거의 현장과는 달리
암살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안 의사 의거일인 1909년 10.26일로부터 정확히 70년 뒤인 1979년
10월26일 궁정동의 만찬장에서 중앙 정보 부장 김 재규의 독일제
왈서 PP 권총이 대통령 박 정희의 가슴에 불을 뿜었다.
이 권총의 실탄이 안 의사의 권총 실탄과 꼭 같은 7.65미리 탄이었다.
안 중근 의사가 망국민의 한을 풀어 주었던 탄과 이 어두운 암살의
탄이 같다는 사실을 연관 지어서 생각하기가 싫지만 한국 근세
무기 사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는 어쩔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
궁정동에서 박 정희 대통령의 가슴에 일탄을 가한 왈서 PPk 7.65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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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900 권총의 큰 성공으로 브라우닝은 자기 인생 후반부를
슬라이드 식 권총 개발에만 집중했다.
그의 전반부는 주로 윈체스터 사 등에서 생산한 엽총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후반기 그의 발명품은 몇 미군용 군용 총기를 제외하고
M 1900에서 시작된 슬라이드 식 자동 권총의 연속작 들이었다.
이들 권총들은 계속 벨기에의 FN사와 미국의 콜트 사에서 생산되었다.
연속된 그의 히트작들의 대표작으로 우선 미국 콜트 사에서 생산된
45구경의 1911권총이 있다.
이 권총은 한국군 창설과 장비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국산 모델이
나올 때까지 거의 반세기를 우리 군과 경찰과 함께 같이 했다.
브라우닝의 슬라이드 권총의 히트작은 또 다른 여러 종이 었다.
그가 만든 권총 중에 미국 콜트 사 또는 벨기에서 만든 브라우닝 권총이
일본군들의 장교들에게 팔려나가 상당수의 브라우닝이 제조국인
미국의 군인들을 향해서 사용되었다.
전범으로 처형 된 도조가 체포 순간 자살을 시도한 권총도 이 형이었다.
[일본군 장교들은 전용 소비조합[가게고샤]에서 개인적으로 권총을
살 수가 있었다.]
브라우닝은 죽기 전 M 1900으로부터 시작된 권총 브라우닝 권총들의
결정판인 HP P35형 권총을 디자인함으로서 천재적인 총기 발명가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이 권총에서 그는 지금 M-16 탄창과 같이 실탄이 두 줄로 장탄되어
탄의 장탄수가 13발로 늘리는 획기적인 혁신을 꾀했다.
지금의 모든 자동 권총이 이 디자인을 택하고 있지만 브라우닝의
마지막 권총이 이 두 줄 장탄[double column] 탄창의 효시였다.
.
브라우닝의 마직막 작품 - 걸작 HP P-35 9미리.
아직도 이 권총을 사용하는 국가가 여럿있고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과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가 이 권총의 애용자였다.
-북한이 불법 복제하여 사용하는 백두산 권총의 첵코제 원형
CZ-75 권총의 한 기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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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중근 의사가 사용했던 브라우닝 권총은 또 다른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1914년 오스트리아와 항가리의 연합을 깨서 세르비아 주를 슬라브 족의
국가 연합에 합류시키려고 했던 세르비아의 청년 Gavrilo Princip가
프란즈 페르디난드 황태자와 그의 황태자비를 오픈 카 퍼레이드
한 꺼 번에 암살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결국 일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이 세르비아 청년들이 사용한 권총이 안 의사의 것과 같은 형인
브라우닝 M 1900 형 권총이었다.
강자가 기록을 주도하는 역사는 이 암살을 테러의 시각으로 보지만
약소국의 민족의식이 강대국의 횡포에 저항했던 시각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 할듯하다.
그러나 요즈음은 브라우닝 후속 모델인 M 1910년 -380구경-이 사용되었다는
설도 만만치 않다.이에 반발하는 설도 있어 하여튼 여기 소개해놓는다.
또 있다.
1904년 러시아의 식민지 상태이던 핀랜드의 유진 샤우만이 이 권총으로
러시아 총독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보브리코프를 암살했다.
이것도 역시 약소민족이 강대국의 인사에게 브랑우닝을 발사한 경우다.
보니 이 권총은 전적으로 약자들이 강자들에게 항거할 때 요청하면
나타나는 구원투수 전문이었던 것같다.
사람들은 하얼빈 역에서의 안 의사가 이룬 의거의 애국적 의미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지만 그 날 안 의사가 행한 사격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술적 분석이 없어 왔었다.
안 중근 의사를 기소한 일본 미소부치 (溝淵 孝雄)검찰관은
그의 논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 피고는 권총을 다루는데 노련한 자로서, 빗나간 총알이
한 발도 없었다.”
그의 사격술에 경탄하는 구절이다.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권총은 M 1900 브라우닝은 탄창에 7 발까지
장탄 할 수 있다.
그러나 약실에 한 발을 더 장전할 수가 있다.
이 상태는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발사대기
상태의 장탄이다.
탄창에만 실탄이 있으면 슬라이드를 왼 손으로 후퇴 전진 시켜야 했다.
발사가 늦어 질 수밖에 없다.
안 의사로부터 압수한 탄창은 다 비어 있었으나 권총 약실에 아직
발사되지 않은 실탄이 한 발 남아 있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현장에서 일곱 발의 탄피를 수거해서 일본 당국에
넘긴 것으로 보아 안 의사는 이 7 발 장전 권총의 약실에 한 발을 장전한
발사대기 상태의 8발들이 권총을 가지고 거사를 했다고 판단된다.
그는 이토오를 저격 할 때 단지 안전장치만 풀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서 쐈다.
M 1900 브라우닝 의 구조 - 탄창에 7발을 장탄하고 약실( 총신 후부)
에 한 발을 더 장탄 할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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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안 의사는 원수 이토오의 후면에 세 발을 쏴서 그를 십여 분 뒤에
죽게 만든 뒤에 행여 자기가 사람을 잘못 보고 쏘지 않았나 하는 염려에서
이토오 후방의 일본인들에게 더 총탄을 퍼 부었다.
미소부치는 논고문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피고는 공작(이토오)이라고 생각하여 선두에 네 발을 발사하고
혹시 공작이 반대 방향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방향을
바꾸어 세 발을 더 쏘았다. "
이토오를 맞추고 다음 세 발로 가와가미(川上) 하얼빈 총영사,
모리(森) 궁내부 대신 비서, 다나카(田中) 만철 이사 등
일본인 세 명을 추가로 쏴서 명중 시켰다.
( 전원 부상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은 수행원 나카무라(中村)와 무로다(室田)의
바지를 관통했다.
미소부치의 말대로 일곱 발 발사에 한 발도 헛발이 없었다.
이토오는 피격된 세 발 중 폐에 맞은 두 발이 치명상이 되어
15분 뒤 사망했다.
나중에 그의 사체에서 수거된 실탄을 보니 탄두가
십자형으로 금이 파여져 있던 소위 ‘덤덤’ 탄이었다.
이 탄을 맞으면 탄두가 버섯 모양으로 크게 찌부러지면서
타격 손상 부위를 크게 만든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효과를 보려면 실탄의 구경이 크던가, 탄도가
빨라야 되는데 브라우닝 탄은 탄의 위력이 약해서 탄두가
파열 하지 않았다.
안 의사는 일본 검찰에게 그렇게 금이 그어진 실탄을 샀다고 간단히
말했지만 안 의사가 필살의 의지를 가지고 있던 손칼로 탄두에
금을 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체포된 뒤 이 손칼을 압수당했다.)
안 의사는 그날 대단한 속사를 했다.
사격의 속도를 보니 거의 자동화기가 발사 하듯 발사한듯하다.
군중 사이에서 저격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재빠르게 제압해
버리는 것이 사실이다.
1975년 육 여사를 저격한 문 세광도 단 세 발을 쏘고 제압당했는데
안 의사는 무려 7 발을 쏘고 권총을 땅에 팽개칠 때까지 얼이 빠진
러시아군의 아무도 그를 제지 할 염두를 내지를 못했었다.
그 저 총소리에 놀라 뒤로 물러나서 멍하니 그의 사격만
구경했을 뿐이었다.
안 의사 사격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반 민간인들이 아니라
훈련 받은 러시아의 군인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제압당하기 전
이렇게 빠르게 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을 지경이다.
권총은 사실 소총과 달리 다루기가 힘든 총기이다.
정확히 쏘기가 아주 어려운 총기다.
더구나 안 의사는 두 손 파지(把持)가 아닌 한 손 파지를
하고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었다.
그는 일본 검찰 진술에서 한 손 파지로 사격을 했다고 진술했었다.
두 손 파지법을 쓰면 권총의 명중률은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비록 거리가 5,6미터라고 하나 조준 사격도 아닌 단시간의
한 손 파지의 지향사격으로 이 같은 명중률을 얻은 안 의사의
사격 솜씨가 얼마만큼 좋았는지 짐작 할 만 할 것이다.
안 중근 의사는 황해도의 고향에서 어린 시절부터 부터 말 잘 타고
활 잘 쏘기로 근동에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역시 소년 시절 백범 김구 선생이 안 중근 의사의 집을 방문 했다가
머리를 수건으로 동이고 똠방 총이라는 짧은 화승총을 맨 안 의사가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기록을 남긴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사실 그는 사냥을 좋아했었고 사냥을 자주 다니며 사격술을 익혔다.
하얼빈 거사 후 일본인에게 체포 되었을 때 그는 자기 직업이
사냥꾼이고 친한 사람들은 모두 사냥꾼 들뿐이라고 이야기 했었다.
그의 체포 뒤 조사를 받은 안 의사의 두 동생, 공근과 명근도 안 의사가
사냥꾼들과 자주 교류했다고 진술했었다.
사냥을 좋아 했던 안 의사는 어린 시절부터 사냥을 통해 그날 신기에
가까운 사격술을 연마한 것 같다.
이토오는 죽기 전 자기를 쏜 사람이 조선인이라는 말을 듣고
“ 바가야로--!”라고 하고 숨을 거두었다는 뒷 보도가 있어서 지금의
한국에도 그런 기록들이 남아 있다.
현장을 철저히 조사했던 일본인 검찰관 미소부치는 이것은 와전 된 것으로
이토오는 피격 후 의식을 다시 챙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나의 견해로도 미소부치의 말이 맞을 것으로 판단된다.
폐를 두 발이나 관통 당해 호흡도 못하게 된 69살의 노인이 이렇게
기력 좋게 의식을 유지하고 말까지 했을 것 같지가 않다.
이토오가 영면했던 마지막 자리에 그의 평생 잠자리에서
빼놓지 않았엇던 여성들은 한 명도 없었다.
바가야로라는 말은 일본인 신문 기자가 이토의 최후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안 의사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를 과장해서
각색한 듯하다.
허나 이토오의 최후를 그럴듯하게 각색했던 기자가 이토오의
젊은 시절 행각을 알았다면 그런 엉뚱한 기사는 낮 뜨거워서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토오는 젊은 시절 유신을 한답시고 돌아다니며 어쭙잖은
방화와 살인을 해댔었다.
천민 출신인 그는 정식으로 검도를 배운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힘없고 늙은 만만한 자들만 골라 무참하게 죽였었다.
이토오가 지사 행세를 하며 살인과 방화를 일삼던 20대.
검술을 배우지 못해 강한 적에게는 얼씬도 못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죽이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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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지로라는 쉰 여섯 살의 장님 학자가 있었다.
별 다르게 존왕양이의 유신 파들에게 잘못한 일도 없었는데
막부에 천황에 대한 간단한 자문을 해주었다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밤길을 가다가 이토오에게 습격을 당했다.
칼도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이토오는 무저항의 장님인 그를 난도질로 죽이고
목을 거칠게 잘라 담벼락에 달고 그의 죄를 응징한다는 방을 붙였었다.
그는 이런 알량한 검술 솜씨로 해댄 잔인한 살인을 나중에 자랑삼아
주변에 해댔다고 했다 .
그의 거칠고 잔인하게 죽은 하나와에 비하면 조선에
갖은 악행을 한 그는 비교적 평화적으로 죽었다고 해야 할만하다.
그가 한국인의 원수였기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는 커다란 이유에
더해서 인과응보라는 관점에서 생각나는 그의 젊은 시절
잔악하게 저질러 대던 범죄다.
안의사의 마지막 면회.
1910년 2월 13일, 고향 황해도에서 찾아온
프랑스인 홍석구(프랑스 이름 조셉 빌렘)신부와
공근, 정근, 두 동생과 면회하였다.
홍신부는 몸을 사리는 조선교구장 뮤텔주교의 명을 어기고
안의사를 찾아왔다가 그에게 미움을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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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중근 의사는 다음해 2월 14일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는 항소를 포기하고 다음 달 3월 26일 당당히 순국의 길을 갔다.
지금도 서울 용산 효창공원에 설치된 가묘는 그의 환국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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