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한달에 한 번 정도는 올라야지!
지난해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 하며 당시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쓴 한 편의 시가 뒤늦게 알려져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주인공은 올해 전북 부안여중 신입생인 이슬 (13)양.
이양은 지난 해 2학기 연필로 쓴 시 로 전북도교육청이 주최한 글쓰기 너도나도 공모전에서 동시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전북교육청이 가정의 달을 맞아 지난 4일 도교육청 블로그에 이 시를 소개하면서 알려졌다.
당시 심사위원을 맡았던 임미성 익산 성당초등학교 교감은 동시를 처음 읽었을 때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사위원 세 명이 작품을 고를 때 만장일치로 가장 좋은 작품 으로 뽑았다.
무엇보다도 일기처럼
써 내려간 아이의 글씨와
지웠다 썼다가 한 종이 원본이 정말 마음에 깊이 남았다고 말했다.
[가장 받고 싶은 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짜증 섞인 투정에도
어김없이 차려지는
당연하게 생각되는
그런 상
하루에 세 번이나
받을 수 있는 상
아침상 점심상 저녁상
받아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안 해도
되는 그런 상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때는 왜 못 보았을까?
그 상을 내시던
주름진 엄마의 손을
그때는 왜 잡아주지 못했을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을까?
그동안 숨겨놨던 말
이제는 받지 못할 상
앞에 앉아 홀로
되뇌어 봅니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 고마웠어요”
“엄마, 편히 쉬세요”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엄마상
이제 받을 수 없어요
이제 제가 엄마에게 상을 차려 드릴게요
엄마가 좋아했던
반찬들로만
한가득 담을게요
하지만 아직도 그리운
엄마의 밥상
이제 다시 못 받을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울 엄마 얼굴.
뜻밖의 사정으로 백운대길은 당분간 통제되었다.
낙석으로 인한 안전조치였다.
그런사정도 모르고 평일이다 보니(金)등산객이 적은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런 사정이라 백운대로 향하다 상운사에 갈림길(통제)에서 상운사를 거쳐 원효봉에서 아미타사를 돌아보는 코스로 오늘 산행을 마쳤다.
구파발 버스 승강장앞 건축현장. 무슨 건물인지는 몰라도 잘 올라가고있다.
북한산성행 버스를 기다리는 등산객이 바글바글할때인데 왠지 조용해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
버스에서 내린 사람도 고작 댓명 정도라 이상하다 싶기도 했지만 시간이 좀 이른편이라 그렇겠지 생각하고 올라갔다.
어쩐지 조용한 분위기라 때맞춰 잘 왔다라고 생각하며 ,
입구에서 사진 한장 찍어주고 는 도로따라 올랐다.
계곡길은 하산시 이용하려고,
그저 우리 부부 뿐이었다.
아카시아꽃이 만발하니 향기가 진동한다.
대서문을 지나,
천하대장군 돌장승도 보고,
무량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법화종에 속해 있는 사찰로 1895년(고종32) 고종의 후궁인 순빈 엄씨가 창건하였으며 순빈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올려 후에 영친왕이 된 이은을 낳았다고 한다.
그 뒤부터 이 절은 백일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 주는 사찰로 알려져 원당(願堂)이라고 하였으며, 경내에 약수가 있어서 약수암(藥水庵)이라고도 불리웠다.
북한산성 대서문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사찰에는 대웅전, 약사전, 범종각 등의 건물이 조성되었으며, 유물로는 1895년~1906년 사이에 제작된 약사전의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있다.
무량사 불두화도 보고.
사람하나 볼 수없는 북한동 입구다. 여태까지도 사람들이 없는 이유를 몰랐다.
그래도 우리는 이곳에서 스틱도 조립하고 백운대에 오를 꿈을 꾸고 있었다.
보리사에서 인증사진 찍고는
막 오르려는 순간 현수막에 등산로통제 출입금지다.
내용을 읽어보니 어쩜 갈수도 있을것 같아 올라가는데 외국인 학생다섯명과 등산객 한명이 가기에 아무런 생각없이 올라갔더니 대동사 일주문이 없어지고 그 뒤로 새로운 목책이 등산로 폐쇄를 알리고 초소도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다시 내려가기도 그렇고해서 대동사를 거쳐 원효봉을 오르기로 작정했다.
백운대를 오르면서 눈팅만 했는데 절을 찾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런 콘크리트집을 어떻게 지었을까? 싶었는데....,
상운사 뒤 염초봉(662m)
백운대(836m)와 만경대(801m).
고려시대의 유물(석탑).
경기도 고양시의 북한산에 있는 사찰
경기도 고양시 북한동의 북한산에 있는 사찰로 신라 때 원효대사가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는 삼천사(三千寺)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조선 중기 이후 승병들이 머물렀던 절로 알려져있다.
서울시와 고양시의 경계를 이루는 북한산 원효봉 남쪽 중턱에 위치하며, 1722년 사찰 옛터에 승병장 회수가 130칸의 큰 절을 지어 한때 노적사라 하였다가 1813년 이후에는 상운사로 바뀌었다.
현재 경내의 건물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고려시대 제작된 석탑과 석등 부재가 남아있으며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삼존불 있다.
어쨌던 신도가 많은절은 아닌것 같다.
향나무.
대웅전.
천불전(목조 아미타삼존불)
상운사를 둘러보고 원효봉(510m)으로....,
북한산성 북문.
북문은 원효봉(元曉峰 505m)과 염초봉(廉峭峰 662m)사이 해발 430m 지점 안부에 위치하고 있다. 염초봉은 원래 영취봉靈鷲峰이었다. 영취봉은 석가모니가 묘법연화경 설법을 한 영축산(靈鷲山)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영축봉이다.
북한산성 북문은 본래 성문 위에 문루가 있었으나 1764년 방화에 의해 불탄 이후 복원되지 않았다.
「북문」 안내문이다.
<원효봉과 영취봉 사이 해발 430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산의 능선이 말안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형태를 보이는 안부鞍部지점에 자리한다. 주변에 상운사와 훈련도감 유영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훈련도감 유영과 상운사에서 북문지역의 수비와 관리를 맡은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산성에는 대서문, 대남문, 대동문, 대성문, 중성문, 북문 등의 6개의 대문이 있었으며, 큰길은 ‘대서문-중성문-대남문·대성문’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였다. 대문 중 북문과 대동문은 간선도로에서 벗어나 있는데, 이는 한양 도성과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문으로서 북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던 것은 북문만이 대大자를 붙이지 않은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북한지」(北漢誌 1745년 간행)를 보면 북문에만 도로망이 연결돼 있지 않다.
성문은 석축기단 부분인 육축부陸築部, 그 위에 올린 문루門樓, 출입을 위한 개구부開口部,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문짝 등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북문에는 문루와 문짝이 없는 상태로 육축부와 개구만이 남아있다. 문루 자리에는 초석만이 있으며, 개구부에는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장군목을 건너질렸던 방형의 구멍이 남아있다.
북한산성의 대문이 완성된 때는 1711년(숙종 37년)인데 30여 년 후에 간행된 「북한지」에는 북문의 문루가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18세기 전기에 이미 문루가 없어졌으며, 그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져왔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북문에서도 인증샷.
북문은 이렇게 이중문이다.
백운대 정상(836m)
노적봉(718m)
성벽.
시구문.
별칭으로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軀門)'이 있다. 전자는 인접한 청계천의 오간수문에서 이어지는 물길 중 하나가 이쪽으로 빠져나갔다는 이유에서 광희문 건축 당시부터 불려왔고, 후자는 조선 시대에 한성부 내에서 사망한 시신을 도성 밖으로 운구할 때 통과하던 문이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광희문을 따라 내려가면 당시 묘지가 많았던 수철리(현 금호동)가 나왔기 때문. 시신의 운구가 이루어진 문이기 때문에 자주 곡소리가 들렸으며 일반 백성들도 지나가기 꺼리는 관문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빛(光)처럼 빛나다(熙)'는 이름과는 달리 어두운 분위기가 짙은 '통곡문(痛哭門)' 또는 '시신문(屍身門)'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문 밖으로 나온 망자들을 위해, 유족들은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며 넋을 위로했다.
중흥사와 태고사로 향하는 계곡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보면 왼쪽으로 계곡 건너편에 마치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을 상징하며 서있는 것처럼 북한산 사찰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거대한 석불이 우뚝 솟아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아미타사이다. 이전의 이름은 덕암사(德岩寺)였는데, 근래 아미타사로 새롭게 사명을 바꾸었다.
아마도 ‘덕암’이라는 이름은 서울의 고려대학교가 위치한 안암동, 종암동의 지명처럼 원래는 신령스럽다고 여겨지는 바위로 인해 생긴 이름일 것이다. 안암동에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큰 너럭바위가 있어 편안한 바위란 뜻으로 ‘안암’이란 지명이 붙었던 것인데, 이 바위는 아파트 개발로 사라지고 말았다. ‘종암’은 종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덕암사라는 이름 역시 이곳에 자리한 바위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말하는 덕스러운 바위란 ‘거북이 바위굴’로 불렸던 큰 바위를 일컬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 바위는 뒤편 산신각 언덕에서 바라보면 큰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생겼다.
서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