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만남
오 춘자
칙칙폭폭 칙칙폭폭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이었어.
그때는 기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지
차 삯도 싸고 전국을 망라하는 철도망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유일했으니
까.
버스도 있었지만 서울을 간다거나 부산을 가려면 갈아타는 불편함도 있었고 차 삯부
터가 장난이 아니었거든.
자가용이란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있던 시절이었으니 아마 수 십 년은 됐지 싶어.
촌티가 줄줄 흐르는 내가 서울 고모님 댁에 갔다가 고향으로 오는 기차를 탔어.
서울 역에서 경부선이나 장항선 열차를 타야 천안에서 안성선으로 바꿔 탈 수가 있거
든.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가는 학생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기차 안에서 용케도 빈자리를
만나 앉았는데 내 앞자리에 조금은 허약해 보이는 보통 키의 대학생과 노란색에 베레모
까지 있는 교복을 입은 1~2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 꼬마가 앉았어. 꼬마는 대학생을 오
빠라고 부르더군.
어디쯤 왔을까. 실컷 먹고 실컷 떠들던 꼬마가 지쳤는지 눈을 감고 기차의 진동에 몸
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더군. 그때서야 대학생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어.
나는 차창 밖으로 쏜살같이 밀려가는 들녘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밭고랑에 구부정
히 엎드린 어머니를 보고 있었어. 뙤약볕아래 감자밭 북을 주고 옥수수 그루를 다독이
며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삭히고 계실 우리 어머니를 말이야 나도 어머니가 보고 싶어
내려가는 중이었거든.
책을 보고 있던 학생이 가방에서 다른 책을 꺼내더라고. 내가 말했어. 그 책 좀 볼 수
있겠느냐고 망설임 없이 건네주더군 저자는 잃어버렸지만 에세이 집이었어.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잠시 후 천안 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내리실 분은 잃으시는 물건 없이 미
리미리 준비하시고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더군.
“이 책 빌려주시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당돌했어. 난생 처음 보는 사람
에게, 언제 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책을 빌려 달라 했으니 말이야.
헌데 흔쾌히 그러라고 대답 하더군. 나는 말했지 뭘 믿고 선뜻 빌려주느냐고. 그랬더
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하는 거야.
자기 주소를 적어주더라고. 나도 신뢰를 주기 위해서 내 주소를 적어주었지.
그랬더니 며칠 후에 부산 해운대라면서 엽서가 왔고 또 며칠 후에 포항이라면서, 삼
속초 등등 가는 곳마다 엽서를 보내주더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책을 꽤 여러 번 돌려주고 빌려 받았어. 편지도 한 달이면 여러
통씩 오고 갔지.
다음 해 늦은 가을이었어. 천안에 온다는 거야. 우리는 천안 역에서 만났지. 그리고
는 수덕사에 갔어. 사찰로 오르는 길이 참 많이도 험했던 생각이 나는군. 그는 내손을
잡아주고 나는 그의 팔을 잡고 산을 오르면서 태연한 척 했지만 속내는 긴장 되고 많이
떨렸어.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더군. 태연을 가장하기 위해 나는 큰소리로 말하고 큰소
리로 웃기도 했지. 그는 조용한 성격인 것 같더라고. 그런데도 예의는 깍듯했어. 에스
코트는 잘 하던걸.
산길을 오르는데 앞서가던 그가 돌아서서 꼭 쥔 주먹을 내밀며 받으라는 거야 나는
손을 선뜻 내밀지를 못했어. 혹시 징그럽거나 놀랄만한 그 무엇일까 싶어 망설이고 있
는데 "괜찮아 받아봐. 받아보라니까." 나는 쭈뼛쭈뼛 겁을 내면서 손을 내밀었지. 그랬
더니 알밤을 하나 쥐어주는 거야. 빈 밤송이도 다 말라 일그러졌고 이파리조차 낙엽 되
어 쏟아진 지금 어쩌다 다람쥐가 놓치고 간 알밤 하나 남아서 그의 눈에 띄었던 것이지.
나는 그 알밤을 그 해 겨울 내내 책상서랍에 넣어두고 보고 또 보았어.
눈이 오는 밤이면 긴-긴 편지를 써서는 파 아란 하늘이 환히 내다뵌다는 우체국에 와
서 우표를 사서 붙이기도 했어.
아!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설레인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했던 펜팔이었고 처음으로 만난 남자였고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꼈던 사람이야 지금에서 말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해본 것이 또 하나 있어 키
스, 키스였지. 사찰의 역사와 맞먹을 듯싶은 아름드리나무에 기대 서있는 내게 그가 다
가오더니 나의 두 어께에 손을 얹고는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거야. 가슴이 졸아
는 것 같았어. 숨이 멎을 것 같았고 머릿속은 사고가 콱 막혀 정지되는 것 같았어. 그
순간이 왜 그리 길게 느껴지는지 어색해서 눈길을 얼른 푸른 하늘로 돌렸지 “시선 돌
리지 마 날 봐 날 보라고 내 눈을 봐 봐.” 돌아간 내 시선을 바로 하기 위해 그는
내 얼굴을 돌렸어. 그리고는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지.
그 후 우린 많은 추억을 남긴 채 나의 부족함으로 헤어지게 되었어. 오랫동안 노기가
배어있는 그의 아버지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지. 가슴에 호수만한 허공을 안고 살아오면
서 참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나는군. 얼굴이 핼쑥한 그가 열차에 올라서서 퀭한 눈으로
바라보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연했어 지금은 많은 세월에 퇴색해져 희미하지만 말이
야 그러고 보면 세월이 잊는 데에는 참 좋은 특효약인가 봐.
부모님의 권유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법학도가 되었다가 뒤늦게 하고 싶은 국문학
을 했다는 그는 지금 최아무개 하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소설가가 되
어있지.
그의 연재소설 속에서 우리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다룬 것을 읽은 일이 있어 그는
거기에서 아픈 만큼 아름다웠노라고 서술하고 있더군.
그가 소설가가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인생의 삶에 익숙해져 있을 때 구독했던
작은 월간지에 연재소설을 보고서야 지금 생각하면 연락 안하길 잘했지 싶어 전화를
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거든. 황홀했던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만남이 있음이 얼마나 행
복한지 몰라 아마 내 인생 다하는 날까지 영원할거야 오늘이 행복하고 가슴 설레는 이
유는 아름다운 만남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야. 언제나 가슴 설레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2005. 21집
첫댓글 황홀했던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만남이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아마 내 인생 다하는 날까지 영원할거야 오늘이 행복하고 가슴 설레는 이
유는 아름다운 만남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야. 언제나 가슴 설레는 아름다운 추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