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idden Currency of Incalculable Worth, By Esau McCaulley
작성 2023.08.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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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써 맥컬리는 칼럼니스트이다.
가난은 가장 무자비한 시간 도둑이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부모는 돈을 버느라 자녀와 보내야 할 시간을 매일 몇 시간씩 빼앗긴다. 자녀의 스포츠 경기나 합창대회, 발레 공연에 가지도 못하고, 학교에서 돌아온 자녀가 집에서 숙제하는 것도 도와주지 못한다.
가난은 토요일 아침에 잠옷 바람으로 아이와 소파에 앉아 만화 볼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렇다는 잘못된 믿음은 끈질기게도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는 가운데, 현실 속 수많은 부모들은 오늘도 자식들에게 안정적인 의식주와 더 나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낮은 급여를 마다하지 않고, 시간표를 마음대로 짤 수 없는 장시간 노동에 뛰어든다.
학자들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시간의 빈곤이라고 부른다. 사실 무언가를 할 시간이 없는 걸 빈곤의 징표로 삼는 것이 다소 낯설 수 있다. 그러나 가난이란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귀중한 것을 앗아간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시간의 빈곤”은 의미 있는 통찰이다.
내 어린 시절 내내 어머니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에서 야간 교대 조로 일하셨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 새벽 2시부터 정오까지가 어머니가 일하는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딱 하루 쉴 수 있는 일요일이면 어머니는 무척 피곤하셨을 테지만, 늘 우리 손을 꼭 잡고 교회에 가셨다. 어쩌면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일주일에 얼마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이 어머니한테는 정말 소중했을지 모른다. 어머니는 자식을 늘 직접 보살필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하나님께 나와 형제들을 굽어살펴달라고 기도하셨다.
나와 동생들이 어렸을 때 우리 등하교를 책임진 건 어머니의 이웃, 친지들이었다. 이따금 이모나 사촌 형, 누나 혹은 할머니가 오셔서 저녁때 우리를 봐주셨다. 한부모 가정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힘든 일이며,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다면 주변의 도움 없이 아이를 기르기는 그야말로 불가능하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이웃과 친지가 끝없는 품앗이를 통해 곡예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해야 간신히 하루하루를, 매주를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어렸을 땐 이런 상황이 특별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아는 또래 아이들은 어차피 대개 전자기기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반대로 물질적인 빈곤은 매번 나를 아주 괴롭게 했다. 이웃 사람 중에 어머니가 일하느라 나를 자주 돌봐주지 못하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내 운동화가 나이키가 아닌 걸 지적하는 사람은 더러 있었다. 심지어 학교에선 그걸 놀려대는 친구들도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지낼 만한 곳으로 전학 갔는데, 그렇게 팍팍하게 사는 나를 조롱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모두 내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던 셈이다.
미래를 꿈꿀 때 나는 한 번도 시간 부자로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대신 손에 쥘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을 나와 내 가족에게 줄 수 있기를 갈망했다. 내 아이들의 자존감을 뒷받침해 줄 만큼 단단한 재정적인 벽을 쌓아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옷장에 있는 몇 벌 안 되는 옷들을 바라보며, 뭘 입어야 그나마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꿈꿨다. 초라한 집을 보여주기 싫어서 친구를 선뜻 집에 초대하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나 생일에 원하는 선물을 받아 들고 정말로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대개 일찍 철이 든다. 변변찮은 선물을 받고도 부모가 미안해하지 않도록 실망스러운 감정을 감쪽같이 숨기고 정말 기분이 좋은 척 연기하는 법을 익힌다. 우리 집 형편이 얼마나 팍팍한지 새삼 일깨워 주는 선물을 받고도 우리는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법을 안다. 나는 내 아이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그렇다면 그런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은 어디 있을까? 여기서 다시 시간이 등장한다. 경제적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오르는 가장 확실한 길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서 대학교 졸업장을 따는 거다. 때로는 석사나 박사 학위가 있으면 더 좋다. 공부를 잘하려면 많은 것이 필요한데, 여기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시간이다. 좋은 일자리를 얻고,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려면 또다시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우리는 부모 세대와 달리 생존을 위해 시간을 거래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희생하곤 한다. 누구도 우리한테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지 않았다. 어느 시점이면 월급을 좀 덜 받더라도 나와 가족을 위해 시간을 확보하는 편이 더 나은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항상 지금 사는 집보다 더 좋은 집, 지금 자녀가 다니는 학교보다 교육 환경이 더 좋은 학군이 있기 때문에 돈은 늘 다른 것을 제치고 우선순위가 된다.
온 사회와 문화가 우리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한다. 뒤돌아보지 말고, 아니 옆도 보지 말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라고, 계속 더 많이 일하라고 다그친다. 그렇게 했을 때 주어지는 성공의 결과물도 확실하다. 내 아이들은 나는 비싸서 못 신었던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는다. 또 어릴 적 나는 꿈도 꾸지 못했던, 상대적으로 부유한 동네에서 자란다.
반대로 시간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숨겨진 화폐와도 같다. 대신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수많은 연구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부모가 아이들과 보낸 시간은 아이들의 정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부모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아이일수록 학교생활도 잘하고, 새로운 환경에도 잘 적응한다.
시간이 중요하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시간을 인식하고 아껴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이 알게 모르게 시간을 허비하며 산다. 자녀가 어릴 때 부모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기에 더욱 귀한 자원이다.
어느 날 나는 우리 가족에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당시 일곱 살이던 딸아이가 내게 자꾸 이렇게 묻고 있었다.
“아빠, 오늘 또 일하러 가셔야 해요? 또 출장 가세요?”
처음에는 아이가 어른의 일을 몰라서 그러는 거라고 여기도 딸아이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이렇게 고생해서 열심히 일하는 게 다 내 자식들 잘되라고 이러는 거 아닌가?
그런데 아빠가 일이 바빠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을 때 딸아이가 내게 지어준 억지웃음이 왠지 낯이 익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스웨터를 받아 들고 내가 지었던 웃음이 딱 그랬다. 그 스웨터는 밖에 입고 다니기엔 창피한 수준이었다.
딸아이가 열두 살 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지금보다 20% 더 많은 물건을 가질 수 있거나 20% 더 많은 시간을 누릴 수 있다면 둘 중 어떤 걸 택할 거니?”
딸아이는 지체 없이 답했다.
“아빠랑 보내는 시간인 거예요? 그럼 당연히 시간이죠. 물건이야 지금보다 더 많아 봤자 어디 둘 데도 없는걸요?”
아이들의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부모가 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해서 배우고 고쳐나가야 하는 일이 생기는 법이다. 우선 출장이나 예정된 강연, 간담회 중에 꼭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추려냈다. 그런데 작가에게는 출장이 그냥 출장이 아니긴 하다. 나만의 브랜드를 구축하는 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쉼 없이 해야 하는 일이다. 작가들은 글을 쓰고 콘텐츠를 만드는 동시에 세상과 소통의 끈도 놓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소셜미디어가 그냥 시간만 잡아먹는 게 아니라 진을 빼놓고 그날의 기분까지 좌우한다는 점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에 의견을 내고 댓글을 달면서 아이들과 신경 써서 대화하고 교감하며 양육하는 건 불가능하다.
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의 재산은 어느 정도일까? 들이는 품과 뽑아내는 결과를 비교했을 때 어느 시점부터 돈보다 시간을 더 귀하게 여기라는 답이 나올까? 내 어머니는 생각해 보지 못했을 질문이 꼬리를 문다.
나는 지금 “워라밸”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일과 삶의 균형을 제대로 잡는 것도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보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우리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커다란 부를 쌓아도 언제나 우리가 번 것보다 더 벌 수 있는 여지는 있기 마련이며, 그러는 사이 우리에게 돈보다 훨씬 더 소중한 자식을 시야에서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고민이 어쩌면 실존적인 질문을 숙고할 여유가 있는 특권층이나 겪을 법한 딜레마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거다. 일리 있는 비판이긴 하지만, 동시에 꼭 그렇게만 볼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스스로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을 남을 위해 소중히 여기는 건 엄연한 모순이다. 돈이 많은 부모가 반드시 좋은 부모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형편이 어려운 가정을 지원할 때 돈을 더 많이 주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즉 자식과 함께 마음 놓고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 주는 것도 빈곤층 부모를 향한 지원에 포함돼야 한다.
건강한 사회를 누구나 머물 곳이 있고, 먹을 음식이 있으며, 노동의 대가를 부양하는 가족과 충분히 즐길 시간이 보장된 사회로 정의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을 위한 노동의 대가로 생활 임금이 보장돼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너무 많은 미국인이 가난을 어딘가 부족한, 모자란 거라고 믿는다. 가난한 사람을 벌하고, 채찍질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결국, 이런 믿음에서 비롯된다. 가난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들어지면, 가난한 사람이 더 열심히 일해서 어떻게든 가난에서 벗어나려 할 거라는 가정이다. 그래서 냉대를 다 잘되라고 하는 이야기이자, 심지어 사랑의 표현이라고 미화한다. 그럼 자연히 가난한 사람은 여가와 같은 사치를 누려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다.
내 어머니는 가진 게 많지 않은 상황에서도 나와 우리 형제를 돌보고자 정말 열심히 일하셨다. 내 어머니 같은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도 좀 더 건강하고 나은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