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바람에 일면
김왕노
달밤이 아니더라도 화창한 오후 메밀꽃 바람에 일면 막소금 같이 흩어진 메밀꽃이 바람에 일면 자잘한 송이송이 그리움도 일어 먼 이름 하나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미친 듯 불러도 좋지 않겠나. 장진주사 부르며 불콰한 얼굴로 일필휘지로 바보야 정말 너 보고 싶다 적으면 밀주 익는 냄새 묵향처럼 피어오를 테고
메밀꽃 바람에 일면 순풍에도 메밀꽃 바람에 일면 지겹도록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 수평선, 기어이 월경하듯 넘어가며 그간 소홀했던 이름, 나탸샤니 윤심덕, 순이, 전우로 비상도로 타다가 죽은 성삼이, 경호, 현석이, 김하사 꺼이꺼이 부르며 하얀 국화 송이송이 던지며 그들을 달래도 좋고 새들이 죽으러 가는 페루의 해안으로 로맹가리의 이야기로 밀항해도 좋고
메밀꽃 이는 계절이면 어느 별에도 메밀꽃이 일어서 시인이 별의 언덕에 앉아 갓 손톱 깎은 긴 손가락으로 메밀꽃 향기 나는 단정한 시를 쓸 테고 별 밭의 마늘엔 매운 맛이 들 테고
차라리 달밤이 오고 메밀꽃 바람에 일면 메밀꽃 이는 소리가 잔잔한 음악으로 가슴에 붐비면 어느 골목에서 우연히 만났으나 통성명도 없이 헤어진 사람 또 우연히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나도 좋고 사랑하지 말아야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반역이라 메밀꽃 이는 언덕에 멸문지화로 푸른 무덤하나로 남아도 좋고
메밀꽃 바람에 일면 잔잔했던 가슴에도 반짝이는 물비늘 일면, 하던 일 다 팽개치고 미친 듯 노를 젓고 강을 건너서 청동 빛 말갈기를 휘날리며 말 달려도 좋고 아버지 할아버지 나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종마 같은 아버지 저의 숨결은 뜨겁고 이대로 달려 북벌하고 왜를 수장하러 떠나도 좋다며 말 달려도 좋고 갈채처럼 일어나는 하얀 메밀밭을 지나 말 달려도 좋고 재갈 같은 함구령을 팽개치고 죽창가 불러도 좋고
메밀꽃 바람에 일면 화전을 부치며 꽃 노래해도 좋고 실밥 터진 그리움 한 땀 한 땀 기워도 좋고 메밀꽃 바람에 이니 먼 네 가슴에도 수천수만 그루 그리움이 바람에 물결친다는데 네 있는 마을에 밤이 오면 태몽이 깊어가고 삼신이 점지해준 아이하나 얻으려 정결했던 몸을 여는 소리, 아아아 들린다는데, 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라 아득한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는데
메밀꽃 바람이 이니 한 나라도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이 일어 너는 어쩔거나, 나는 그리움으로 미쳐 백수광부로 강이 아니라 저 시퍼런 바다에 뛰어들거나, 메밀꽃 바람에 이니, 어쩔거나 너는 나는 현실에 고삐매여 조랑말처럼 푸르릉 대는 너는 나는, 메밀꽃 이는 언덕에서 말똥 냄새 나는 사랑을 해도 좋은데
오늘도 메밀꽃 바람에 이니
웹진 『시인광장』 2022년 3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에서 출생.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꿈의 체인점〉으로 당선.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 『그리운 파란만장』,『사진속의 바다』,『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게릴라』 등이 있음. 2003 년 제8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6 년 제7회 박인환 문학상, 2008 년 제3회 지리산 문학상, 2016년 제2회 디카시 작품상 2016년 수원문학대상 등 수상.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금 등 5회 수혜.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주간,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