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도 되나요?
전영순
적막한 어둠과 뿌연 안개 속에 가로등만이 올빼미 눈 마냥 빠끔하다.
이 어스넉한 밤거리를 삼 모녀는 잰걸음으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아보려고 어둠이
주는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마음으로 고요한 야산을 오르고 있다. 맨 앞에는 친정어머니
가 어둠을 헤치며 걸어가고 그 뒤로 딸애가 훌쩍훌쩍 거리며 걷고 있다. 나는 딸애의
뒤를 어둠이 주는 공포와 산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따른다.
어둠이 싸인 매봉산 기슭에 자리를 잡아 촛불을 밝힌다. 완연한 봄이었지만 서늘
한 산바람이 촛불을 사정없이 흔들어 대고 있다. 어쩌면 저 촛불이 지금 딸애의 심정(心
旌) 같아서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애써 신문으로 막아 앉았다. 달무리에 가려 어스
름한 초승달이 솔잎 위에 얹혀있고, 그 소나무 아래 깔아놓은 신문지 위에 북어 한 마
리, 네잎 클로버, 수양버들, 팥, 딸애가 입고 다니던 팬티 등을 차려놓고 친정어머니는
손바닥이 닳도록 외손녀를 위해 염원(願)을 비신다.
삼신할머니, 산신령님, 달님, 칠성님, 조상님들…………. 지구상에 있는 신들은 마치 다
불러들인 것 같다. 어디 그 뿐인가,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신을 향해 딸애의 눈
물을 거두어 달라 애원하신다.
그 기도에 감응이라도 하듯, 솔잎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딸애는 그저 엉엉 울며 외할
머니의 기도의 힘에 의지하여 두 손을 비비며 허리를 폈다, 숙였다 정신없이 반복하고
있다. 나는 적막한 어둠이 두렵고 어머니의 기도소리를 의아해 하며 흔들리는 촛불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딸애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로 엉엉거리며 울음을 달고 다닌다. 아직 1학년이지만
올해부터 내신 성적이 대학입학에 반영된다는 뉴스에 학업성적과 친구관계로 신경이 많
이 쓰이나 보다. 입학한 이후로 웃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다 욕심도 많지만 중2 때까
지 외국에서 생활한 탓으로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고, 남에게 지
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고충이 더 큰 것 같다. '엄마 나 대학 갈 수 있을까요? 나, 공부
하면 잘 할 수 있을까요?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끊임없이 걸려오는 조바심의 전화 딸
애는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어 하지만 엄마인 나도 목소리가 높아지는 걸 보면 이젠 나
도 지쳐버렸나 보다………. 생각 끝에 외할머니한테 “저를 위해 좀 빌어주세요. 저 힘들
어 못살겠어요.” 하며 매달린 모양이다. 딸애는 외할머니의 비원(願)이 저에게 큰 힘
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친정어머니는 생년월일을 따져보시더니 날을
잡아 오신 것이다.
어느 누구의 기도소리도 친정어머니의 구성진 기도에는 미치지 못한다.
시적인 미사여구, 철학적인 언어, 애절한 기도 소리는 아마 하늘도 외면하지 못하리
라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딸애의 모습을 힐끗 보니 조금 전과는 달리 평온을 찾은 것
같다.
결혼을 한 후 아이들이 아플 때나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친정어머니한테 제일
먼저 물어본다. 얼마 전 일이다 남편이 상갓집에 다녀온 후로 머리, 얼굴에 문둥이처
럼 부스럼이 돋아 눈두덩이가 밤송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되어 있었다. 아프고 가렵기도
하겠지만 몹시 신경질적이고 예민해져 있어 건드리면 금방 화산처럼 폭발할 태세였다.
하는 수없이 친정어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우서방은 양밥(미신)하는 것 싫어하니 잠잘
때 몰래하라 귀띔을 해 주신다.
나는 그날 밤 남편이 코를 골고 자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잠이 들었다 싶어 어릴 적 친
정어머니가 아버지한테 하신 것을 떠올리며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섬뜩한 칼을 남편이
자고 있는 머리맡에 몰래 갖다 놓은 다음 정화수를 한 사발을 떠 젓가락을 열십자로 올
려놓고 남편을 깨워 젓가락 끝 쪽으로 물을 마시게 하였다. 젓가락 하나는 당신, 다른
하나는 나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한 번 마셔보라고 겨우 설득하였다. 남편은
억지로 마신 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다시 자리에 눕는다. 나는 밤새도
록 칼이 신경 쓰여 밤잠을 설쳤다. 날이 밝아오자 남편이 알새라 제일 먼저 칼을 치워버
렸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이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은 것을 보고 친정어머니는 약밥을
한 덕이라 말하시지만 난, 병원에서 치료받아서 그렇지 않나 싶다.
친정어머니는 정갈한 자세로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계신다. 난 아직 어머니의 기도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도 우리 사남매가 온전하게 잘
자란 것이 어머니의 간절한 비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도 친정어머니의 그 '믿음'을 이어받아 간절히 빈다면 내 기도도 하늘은 들어 주
실까?
2005/ 21집
첫댓글 난 아직 어머니의 기도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도 우리 사남매가 온전하게 잘
자란 것이 어머니의 간절한 비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도 친정어머니의 그 '믿음'을 이어받아 간절히 빈다면 내 기도도 하늘은 들어 주
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