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만 대중 부르는 소리에 젊은 가슴 붉은 피는 펄펄뛰고 반만년 역사 씩씩한 정기에 광복군의 깃발 높이 휘날린다 칼집고 일어서니 원수 치 떨고 피뿌려 물든골 영생탑 세워지네 광복군 의 정신쇠 같이 굳세고 광복군의 사명 무겁고 크도다 굳게 뭉쳐 원수 때려라 부셔라 한맘한 뜻 용감히 앞서서 가세 독립 독립 조국 광복 민주 국가 세워보자
-광복군 행진곡-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에 창설되었던 직속 군대로, 육군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위키피디아 등 외국 매체에서는 보병부대, 특수부대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독수리 작전'을 세우는 등 게릴라전에 매우 강한 군대들중 하나였다고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이다. (아래 참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이전과 달리 공동의 적 일본제국을 상대해야 하는 장제스은 태도를 바꿔 임정이 무력수단을 갖출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하였다. 그리하여 1939년 창군된 한국 독립당 당군을 기반으로 충칭에서 1940년 9월 17일 결성되었다. 초기 인원은 30여 명이었으나 이는 한국독립당 내부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장교급 인사만 참여한 것이었으며 이후 사병을 모집하였다. 1942년에는 김원봉과 함께 잔류하던 조선 의용대 300여 명을 흡수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1,000명에 즉 지금의 연대정도 밖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1]실질적으로 규모는 작았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많이 안타까운 사실인데, 사실 광복군은 김원봉의 조선 의용대의 규모보다도 못했던 게 현실이었다. 광복군 창설 초창기에는 청년들이 모여들지 않아 30명의 장교들로 편제만 짜서 결국 '사병은 거의 없는 군대'를 만들었던게 시초였다. 나중에 1942년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300여명이 합류한 것이 광복군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전력'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한 김원봉은 화북에 파견된 조선의용군[2]과 통합시켜 규모를 확대시키고자 노력했으나, 임정의 원로계 인사들의 반발로 이게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남의사출신도 많다.
때문에 전면전의 전투 역할은 참여하지 못했으며, 중일전쟁이나 미얀마 전선에서 첩보와 통신, 한국인 회유 등의 업무를 맡았다. 중국국민당은 "한국 광복군 9개 준승 사항" 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했으며, 이러한 제약은 1944년 말에 가서야 풀렸다. 즉, 초창기에는 중국군의 지휘를 받다가 광복 직전에 지휘권을 환수받은 것. 사실 이에 대해 뭐라고 하기도 힘든 것이,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아프리카 어느 망명 정부가 들어와서 산골짜기에 사령부를 차리고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군사활동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닌 셈이다.[3]
버마전선에서 전구공작대 대원 일동. 이들은 제1지대 소속이다. 가운데 있는 인물은 한지성으로 그는 김원봉의 최측근이었다.
임팔 전투 당시, 버마 전선의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현지 영국 육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한 인면전구공작대가 사실상 유일한 실전 참가 부대라 할 수 있는데, 국민당 정부로부터 눈칫밥 먹으며 연명하던 것에 비해 영국군은 현지 사령관이었던 영국 해군원수마운트배튼제독이 직접 이들을 언급할 정도로 관심을 가졌고, 또한 지속적으로 이들의 파견 및 증원을 요청하고 자신들이 숙식은 물론 급여와 피복 등까지 자진해서 부담하는 등 매우 후한 대우를 받았다. 인면전구공작대 역시 이러한 대우에 걸맞은 활약상을 보여줬는데, 포위된 줄 알고 현지에서 죽을 각오로 싸우려던 영국 육군 사단 하나를 포위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감청을 통해 알아내어 퇴각 타이밍을 놓치지 않게 해 전력을 보전케 하는 등으로 호평을 받았다.관련 이야기
1945년 8월, 미국 OSS(오늘날의 CIA)와 접촉해 연합 훈련을 받고 50여 명의 대원을 서울 진공 작전에 투입하려 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한편 일부는 임팔 작전에 영국군과 함께 참전하기도 하였다. 김구의 비서인 선우진 및 고려대학교 전 총장이었던 김준엽 등의 인사들이 광복군 출신.
위와 같은 주장은 한국 광복군은 '승리'가 목표였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참전' 자체에 의의를 둬야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처참하게 지더라도 연합군 측에서 싸웠다는 것만으로도 후에 '우리도 일본이랑 싸우고 피해도 입었는데 무시하는거냐?'라는 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측의 의견을 국제 사회에 피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합국 전력에 큰 도움이 됐다고 보기 어려운 자유 프랑스는 2차 세게대전 당시의 노력을 인정받아 주권 회복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안보리의 국가 중 하나로 지금도 국가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만약 자유 프랑스 정부의 노력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해방후 미군정이 들어서는 등의 과정을 겪는 신세로 전락했을 것이다. 전력으로 보아 광복군의 승리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것이 맞지만, 일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거나 보급 체제에 혼란을 주는 정도의 활약은 가능했을 것이다.
설사 이마저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연합국에게 '추축군에 피해를 준 망명 정부'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충분했을 것이다. 즉,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는 공식 정부로 출범할 수 있는 것. 이렇게 되면 한반도는 임정을 주축으로 통합 정부를 구성했을 것이다. 아무리 소련이라도 이런 정당성 만렙의 정부 조직을 두고 애송이 돼지와 그 똘마니들에게 국토의 반을 주자는 명분없는 주장은 불가능 했을 테니. 그러면 자연스럽게 남북분단도, 6.25 전쟁도 김씨 왕조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도 원천 차단 됐을 가능성이 높다.[4] 즉, 친일파 청산도 훨씬 수월했을 거란 얘기. 또한 남북의 인재들이 분산되지도 않았을 것이니 좀 더 정당하고 합리적인 정치와 행정으로 국가가 운영됐을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조선에는 2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헌병 제외), 체 게바라의 경우 17명(12명이라는 설도 있다)으로 시작해서 쿠바 혁명을 완수한 바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광복군 요원들이 상륙 후 생각보다 선전했다면 어느정도의 후방 교란은 가능했을 수도 있다.
일본이 며칠 조금 늦게 항복 선언을 했다면 광복군이 서울 진공 작전(일명 독수리 작전)에 성공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의 힘으로 광복을 해서 지금처럼 분단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당시 광복군은 많아야 500명~1,000명 수준으로 광복군이 진공 작전을 했다고 하더라도 해방시킬 만한 힘이 없었다고 보아야 맞다.
당시 국내에서 나름 비밀결사 형태로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음은 염두해둬야겠지만 워낙 전력차가 압도적이고, 설령 이렇게 저렇게 일본군을 상대로 이긴다고 해도 뒤이어 진주해 오는 소련군은 감당불가이다. 큰 변수는 되지 않을 듯. 아무리 패전 직전의 일본군이라 해도 광복군 1,000명 정도 가지고는 조선 주둔군으로도 이길수 있 수준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간 광복군이 적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선전해온 것은 우수한 게릴라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국내 진공을 한다면 좁은 한반도에서 마냥 게릴라전만 할수 있는게 아니라[5]어느 시점에서 반드시 일본군과 정면대결을 했을수밖에 없는데, 이 정도 전력차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치적인 성과에 관해서 자유 프랑스를 들먹이지만, 프랑스가 승전국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전쟁 전에 세계수준의 열강이었기 때문이고, 식민지 중에 비시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역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프랑스는 엄연히 2차 대전의 초기부터 참전했던 참전국이었다. 비록 몇주만에 밀렸다지만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던 국가이기 때문에 전쟁 시작하기도 전에 식민지 상태였던 한반도와는 상황이 많이 다른 편이다. 게다가 자유 프랑스의 병력은 44년에 이미 40만명이 넘었고, 전쟁 막바지에는 130만이 넘었다. 이는 숫적으로 연합군에서 5번째로 많은 병력(미국, 소련, 중국, 영국 다음)이었다. 별로 한게 없다고 하는데 서부전선의 주력인 미군-영국군이 노르망디 상륙이후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동안 자유 프랑스군은 파리를 탈환하고 남프랑스의 독일군과 싸웠으며 만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15만 이상의 독일군을 붙잡는데 성공한다. 자유 프랑스의 상황이 이랬는데 1000명 정도에 불과한 광복군과 동치시켜 이를 근거로 승전국 대우를 받았을 것이라는건 너무나 미흡하다.
폴란드의 경우, 연합군의 일원으로 60만[6]에 가까운 장병들이 싸웠고[7] 여기에 국내에서 100만에 이르는 빨치산들이 활약했으나 승전국 대우를 받지 못하고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전후 본국으로 귀국한 15,000여명의 자유 폴란드군 장교와 병사들은 나치 독일 완장 차다가 빨간 완장으로 바꿔찬 매국노들에게 반동 취급을 받았다.
병력을 보자면, 위에도 언급되어 있는 무장세력과 연결고리를 찾아야 하는데, 김구를 포함한 임정 보수파가 사회주의 냄새 나는 세력과의 연결을 거부한 경력이 오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후일 북한 조선인민군의 모체가 되는 조선의용군만 봐도 그 본체는 임정에 합류한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였다. 하지만 김원봉이 전투를 소극적으로 한다라는 이유로 대부분이 이탈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는 이름으로 만주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다. 이것이 김두봉이 이끌던 세력과 결합된 것이 바로 조선의용군이었다. 본문에도 적혀있지만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와 연결해서 임정직할병력을 늘리려고 했지만, 김구는 이것이 사회주의자 김원봉의 세력이 될 것이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 병력은 일제시대 말기 기준으로 봐도 적어도 8천여는 된다[8]. 광복군에 비하면 몇 배나 되는 병력이다. 결국 조선의용군은 일제에 함께 대항했다는 이유로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소속되어서 나중에는 국공내전까지 참여한 베테랑 부대가 되었다.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이 개인수준에서도 한국군을 압도했던 이유중 하나가 이거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국민당은 한국 광복군의 이름 아래 패전 후 포로 혹은 항복한 일본군 부대 내 조선인들을 자신들의 군사 세력으로 편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1945년 11월 장제스의 발언 마찬가지로 중국 공산당 또한 조선의용군의 이름으로 패전 후 갈 곳을 잃은 일본군 내 조선인들을 규합하였다(그리고 조선의용군은 2~3만 명 수준까지 성장하여 6.25 전쟁 때 조선인민군으로 편입되게 된다.). 장준하의 돌베개에 의하면 아편장수나 일본군 위안부 조선인 포주도 있었다고 한다.
6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논하기는 복잡하지만, 이러한 일들의 영향으로 가짜 광복군 서훈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
광복 이후 광복군들 대부분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고 국방경비대 창설에서 본위주장으로 광복군들 스스로가 반발하여 입대를 대거 거부하는 사태도 벌어졌다.[9] 하지만 광복군들 대부분이 대한민국 국군에서 장교와 부사관에 입대함으로서 한국전쟁 때 한국군에서 활동했다. 거의 대부분의 광복군 출신들이 한국군에 입대했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숫자 자체가 워낙에 적은 탓에 군에서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이 많았지 광복군들도 분명히 참여했다.[10]
이후 광복군이 조선을 광복(해방)시키기 위한 거였지만, 해방 이후에는 건국실천원양성소에 참여해서 건국실천원을 양성하는 일을 했다(주로 강사로써 교육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나재하, 조소앙, 엄항섭 등. 김학규도 강사로 있었다. 건국실천원양성소 강사명단 언항섭은 사실 엄항섭인데, 오타가 났다. 평화재향군인회에 있는 명단을 보면 장덕수나 김활란도 있다. 졸업생(1~2개월 단기 강습형식)은 건국실천원양성소 졸업생 명부는 해당논문 후반부에 있다.#
월북, 양민학살최덕신 : 그는 광복군출신으로 장준하나 김우전과 달리 중국군관학교 출신으로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했다. 그래도 해방 이후에는 육군사관학교에 입소(…)해서 소위가 되었다가 3년도 안 되어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는 초특급 승진을 한다. 그래서 한국전쟁때 사단장도 되었지만...거창학살 사건과 관련되었다(…). 물론 신성모도 책임이 크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선 반정부 활동(후술)을 하다가 1986년, 부인과 함께 월북했다.
대한민국 육군 - 뭔가 좀 웃길 지 모르겠지만, 건군기 당시 대다수의 인원이 일본군학병 및 지원병, 조선인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더라도 광복군과 군인 출신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국군 창설에 참여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정부와 군 스스로도 일단 국군의 뿌리를 대한제국군과 구한말 의병, 광복군이라 자처하고 있다.# 더군다나 현 대한민국 정부 또한 구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 법적으로 명시하고 있다.[12] 논란이 있을진 모르나 어쨌든 일단은 그렇단 얘기다. 아무튼 쉽게 말해 정리하자면 이렇다. 대한제국군,구한말 의병->한국 광복군이 계승->대한민국 국군이 계승 : 즉, 서로 이렇게 해서 이어지게 된다. 이들 가운데 공군으로 들어간 소수를 제외하면 육군으로 들어갔으며, 공군 또한 육군 항공대 시절부터 참여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실상 거의 대부분 육군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대한민국 해군 - 가장 광복군과 거리가 있는 조직이지만, 창군시부터 일본군 출신자들이 아닌, 독립운동가인 손원일 제독을 위시한 상선사관들이 주류를 이루어 도리어 일본군 출신들이 가장 많이 배제된 군종이다. 일본 해군이 조선인을 받아들이길 극도로 꺼렸기 때문에 수가 적고, 함정 근무자는 거의 없다시피했기 때문이다. 소수의 일본 해군 출신들은 이후 대부분 해군 육전대 경험을 근거로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시 이쪽으로 옮겨졌다. 한국 해군은 국군으로 묶어 언급될 때를 제외하면 역사에서 광복군과의 연관성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한편 한국 광복군에 함선이 완전히 없었다고 할수는 없는데 영국 국적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독립 운동가였던 조지 루이스 쇼는 계림호라는 배로 광복군이나 임정 요인들의 이동이나 군수물자 이동을 도왔다.
[1]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의 규모는 쭉 줄어드는 추세였다. 1920년 경 독립군은 약 4,000여 명 규모였으나 일본이 만주를 점령해 퇴각하고 이어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반토막 이하로 줄어들었고, 만주에서 게릴라전을 펼칠 당시 한국 독립군의 병력은 약 1,600여 명 정도였다. 그나마 한인 거주자가 많았던 만주에서 이 정도였는데 중국 본토, 그것도 한참 내륙인 충칭에서 사람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2] 광복군보다 병력도 많았고 실제전투 성과도 있었지만, 후일 북한 인민군 모체가 되어 6.25 전쟁시 남한침략의 선봉이 되었기에 남한에서는 이들을 인정할 수 없다. 가슴아픈 현대사[3] 단 한국이 중국 침략의 선봉기지 역할을 했고, 장개석은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윤봉길 의사 의거를 보고 독립운동을 나름대로 도와주던 상태였다.[4] 임정이 미국, 소련의 도움을 받더라도 민족반역자 등용 반대 의견 정도는 강하게 피력할 수 있었을 것이다.[5] 애초에 독립군이 만주로 나가서 활동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다.[6]영국으로 망명한 자유 폴란드군과 소련에 포로로 잡혀 있다 친소 폴란드군으로 개편된 병력을 합한 수이다.[7] 이는 서부 연합국 한정으로 4위에 이르는 수치이다. 프랑스는 막판에 프랑스가 해방되면서 크게 몸집을 불린 것이었다.[8] 선전상으로는 8만이지만, 이건 과장이다. 5개 지대로 구성되었는데 각 지대가 1600명을 기본으로 편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망한 다음에는 혼란기의 세력을 확장해서 1지대의 경우는 5천명 이상으로 확대되었다는 기록이 있다.[9] 덕분에 한국군 초기 고위장교단의 형성에서 광복군의 비중이 극도로 낮은 것은 이 이유때문이다.[10] 국사편찬위에서 낸 건군기 장성들의 회고 책자에 따르면 광복 당시에 군경력자를 보면 일본이나 만주에서 군생활을 경험한 사람은 약 40만, 중국 등에서 경험한 사람은 3만5천 수준이었다고 한다.[11] 참고로 이 양반, 타국에 대해 저지른 전쟁범죄는 전무하다! 괜히 독립군 칭호가 붙은 건 아닌 셈 자국 군인을 간접적으로 학살해서 그렇지[12]대한제국의 경우 대한제국의 법통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승함을 임시정부 헌법에 명시했다.[13] 물론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 출신 김정렬,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장지량 등 일본군 출신도 있었다. 항공계 인물들이 중국과 일본을 빼면 극소수인 탓. 다만 일본 항공계 출신이라 해서 무조건 일본군 출신자들은 아니고 안창남과 같은 일본 민간비행학교 경력자들도 많았다. 최용덕 장군도 중국군에서 복무하면서 동시에 광복군 참모처장을 겸했고, 김구의 아들이자 6대 공군참모총장인 김신 또한 중화민국공군 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