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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2월 4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
(마르 6,30-34)
His heart was moved with pity for them,
for they we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and he began to teach them many things.
말씀의 초대
솔로몬은 기브온에서 한밤중 꿈에 주님을 만난다. 솔로몬은 주님께 지혜와 분별력을 달라고 청한다. 주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셨고, 과연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지혜로운 임금이 되었다(제1독서). 예수님과 사도들은 많은 사람들 때문에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많은 군중을 보시고 착한 목자로서 그들을 가엾이 여기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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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늘 가난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딱한 처지를 보시고 그들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그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이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시고, 외로운 사람과 함께 외로움을 나누신 자비로우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온 생애는 ‘남을 위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헨리 나웬 신부가 쓴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한 라삐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고대하는 메시아는 언제 옵니까?” 그러자 스승은, “네가 직접 가서 알아보아라.”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누구를 찾아가야 합니까?”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문 앞에 있는 불구자들을 찾아가거라. 그들은 모두 온몸에 상처를 입어 붕대를 감고 있단다. 그들은 하나같이 붕대를 한꺼번에 풀었다 감았다 한단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상처의 한 부분만 풀었다 감았다 한다. 그 사람은 ‘누군가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곧바로 가서 도와주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상처의 한 부분만을 풀었다 감았다 한단다. 바로 그 사람이 우리가 고대하는 메시아란다.”
내 몸에 상처가 있더라도 누군가 내 도움이 필요할 때 바로 가서 도와주는 사람이 메시아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형태는 다르지만 자기 나름대로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픔만을 어루만지며 산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내가 아프지만 남의 아픔도 헤아릴 때, 내가 어렵지만 남의 어려움을 살필 때,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더욱 살맛 나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시대의 작은 메시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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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다닙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능력을 체험했고, 하느님의 현존을 확인했습니다. 삶의 또 다른 에너지인 ‘희망’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사 제쳐 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눈빛으로 대하십니다. 그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계속해서 희망을 주십니다. 병자들을 낫게 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시며, 악령 들린 이에게는 자유의 기대를 갖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 또한 언제나 희망을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희망은 하늘의 힘입니다.
얼마만큼 희망을 안고 살고 있는지요? 가까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지요? 희망은 ‘덕’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투자 없이 가만있는데 삶의 에너지를 만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먼저 뛰어들고, ‘먼저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누구나 건강한 삶과 행복한 노년을 바랍니다. 재산이 많고 통장에 돈이 넉넉하다고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셔야’ 행복한 삶이 가능해집니다. 복음의 군중은 이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희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성체 안에서 ‘삶의 에너지’를 받아야 합니다. 불공평한 현실에서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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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보고합니다. 모두가 놀라운 일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낫게 했으며,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기쁨을 준 일입니다. 이 모든 행동은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기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쉬게 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에 대해 감사할 시간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면 누구나 교만해집니다. 본인은 평상시처럼 행동해도 사람들은 금방 느낍니다. 감사와 겸손한 자세만이 그분의 능력 안에 계속 머물게 합니다.
봉사자에게서 주님의 능력이 빠져나가면 자신의 능력만으로 일하려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자연히 역정을 내고 강압적이 됩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 서로가 지칩니다. 교회 봉사자들이 가끔씩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이유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스승님의 넓고 따뜻한 배려입니다.
신앙인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도 ‘당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겸손과 감사와 열정을 지니면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그분의 능력’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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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보고하러 온 사도들에게 조용한 휴식의 시간을 가지라고 배려하십니다. 활동과 휴식은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의 양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의 균형이 깨질 때 생명은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성 생활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사에 온 정신을 집중하여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영적인 휴식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영성의 대가들은, 영혼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진정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영적인 휴식이란, 잠시만이라도 현실에서 벗어나 조용히 머무르는 침묵의 순간을 말합니다. 곧 온몸의 긴장을 푼 상태에서 모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몸의 움직임을 정지하고 자신의 영혼을 텅 빈 상태로 만드는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10분만이라도 오감의 자극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그 빈 공간을 주님께서 영혼의 충만함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마음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바쁘다 하더라도 하루에 10분이나마 영혼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통하여 충만한 영성 생활의 맛을 느껴 보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측은지심
- 이진원 신부 -
성경을 읽어보면 하느님께서 특별한 자비를 베푸는 상황은 사람에게 ‘측은지심’?을 가지실 때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하느님께 저주받는 순간에도 두려움에 떠는 카인이 앙갚음을 받지 않도록 표를 찍어주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무리 잘못을 했다 해도, 그 잘못 때문에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통쾌해하는 것이 아니라 측은한 마음으로 그들을 구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도 측은한 마음이 드시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얻고 싶다면, 우리 삶의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측은해야 한다. 오늘 복음의 군중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것처럼?….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나약하지만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순간순간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비난을 감수한다면,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기 위해 궁핍한 중에도 내 것을 나누며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분명 측은하게 보시고 큰 선물을 주실 것이다. 잘 살지는 못해도 어떻게든 사제로 살아보겠다고 매달리는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측은해서라도 날 구원해 주시지 않을까??
또 우리가 주님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할 마음도 ‘측은지심’?이다. 약자를 배려하고 내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며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곧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측은지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같은 계명이
기억을 부르는 쉼
-김효준신부-
똑같은 행동이라 할지라도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하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행하는 것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갓난아이가 엄마를 향해
손을 휘젓는 행동과 다 큰 성인이 상대방을 향해 손을 휘두르는 행동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동은 목적 없이 하는 행동과는
달리, 그 행동 안에 이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귀한 목적을
갖고 시작했더라도 이 행동이 장기간 반복되다 보면, 행동에만 정신이 쏠려서
본래의 목적을 잊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봉사활동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활동만 남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의미 있는 결과를 맺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 행동의 목적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 숭고한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한 ‘쉼’을 제안하고 계십니다. 한 발 물러설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한 발 물러선 후 내 모습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행동 속에 묻히기 쉬운 숭고한 의미를 순간순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영적 모라토리움(Moratorium)
-김찬선신부-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란 말이 있습니다.
라틴말로서 ‘채무의 지불 정지’, ‘유예 기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을 때 지불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
일정 기간 유예 기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말에서부터 모라토리움 신드롬이란 말도 나왔습니다.
지적, 육체적, 성적으로 한 사람의 몫을 다 할 수 있으면서도
성인으로서 그리고 사회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못하는
미성숙한 사람의 현상을 일컫는 것으로
이때의 모라토리움은 이런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될 때까지
사회에 대한 기여를 일정기간 유예해 주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인 모라토리움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사람들이 너무도 몰려들어
먹을 겨를도 없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일종의 휴업 공지처럼 잠시 쉬겠다고 선언하고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일들을 유예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안식일과 같은 개념입니다.
일을 쉬지만
사실은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일을 단순히 쉬는 것과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쉼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다시 찾고
자기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다시 찾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방향성을 다시 찾고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상황인식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힘을 다시 얻고
새로워진 나로 사람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영적 모라토리움을 한 번 선언해보지 않으시렵니까?
나의 일, 남의 일
-전삼용신부-
개신교 신자들은 주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천주교 신자들도 요즘엔 많이 주일을 지키며 주님을 찬미하지만 아직도 주일에 일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전에 직장에 다닐 때는 주일은 결단코 쉬어야 했던 사람들도 자신의 사업을 가지면 주일에 쉬지 않습니다. 잘 될 때는 밤을 며칠 세어도 수익이 늘어나는 기쁨으로 그 힘듦을 이겨냅니다. 만약 남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면 못할 것입니다. 나의 이익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 힘듦을 잊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일’을 할 때는 ‘남의 일’을 할 때보다 몇 배의 힘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복음전파를 마치고 예수님께로 다시 모여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하시며 배를 타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함께 떠나십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성인은 사막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도 도시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막으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도시에 머물지 않고 왜 자꾸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으로 돌아가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지요.”
성인에게는 사막이 바로 물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면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친밀히 만나는 것은 힘들어집니다. 정신이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당신의 제자들을 데려가신 이유는 번잡한 세상을 떠나서 사도들이 당신과만 머물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다시 힘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만 있는 것을 보고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께 동생도 좀 일을 하라고 말씀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 참으로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진정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외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머물 줄 아는 영성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도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알지만 우리는 사랑으로 그것까지도 넘어설 수 있어야합니다.
사람들은 배가 떠나는 것을 보고는 육로를 통하여 배가 도착할 곳에 먼저 가서 기다립니다. 배보다 어떻게 사람의 발걸음이 더 빨랐는지는 미스터리하지만, 어쨌든 좀 쉬려고 했던 사도들은 사람들을 보고 놀라고 어떤 면에서는 밥 먹을 시간도 주지 않는 사람들이 짜증까지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아서 당신이 직접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스승이 일을 하는데 제자들이 어찌 쉴 수 있겠습니까? 그 귀한 기도와 쉼의 시간도 한 영혼을 더 구하시기를 원하는 예수님의 뜻 앞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치지 않으시는 이유는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힘들고 짜증난다면 과연 지금 하는 일이 혹시 ‘남의 일’처럼 억지로 하고 있지는 않는지 뒤돌아보아야합니다.
성당 봉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나와 가정을 생각한다면 봉사하는데 쓸 시간을 찾기가 힘듭니다. 아마도 성당 신부님들이 가장 힘든 것이 봉사자를 찾는 일일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를 ‘나의 일’처럼 하는 몇 분만 계시면 어떤 성당이든 활기 있게 잘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이 나의 일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그만큼 사랑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타볼산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영광의 장소입니다. 베드로는 천막을 치고 그 곳에서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바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오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왜 인간을 위해 내려오셨는지 잘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원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나의 일’처럼 하시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대표하는 베드로는 그냥 그 휴식에 머물고 싶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직은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배워야 했던 것은 기도 안에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었느냐를 묻고 그 뜻을 ‘나의 일’처럼 수행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기도를 하면 그냥 오래 앉아있는 것을 넘어서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지만 하지 못하시는 일을 마치 ‘나의 일’처럼 해내야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하늘입니다>
-양승국신부-
얼마 전 무지 바쁘게 보낸 하루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시외에서 있었던 한 그룹피정을 따라갔다가 귀경길이 막혀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였습니다. 이런 저런 뒷정리를 끝내고 시계를 보니 3시였습니다.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지만 시간은 이미 3시 반이었습니다.
형제들 눈이 무섭기에 어떻게 해서든 새벽 6시 공동체 미사에는 나와야 했습니다. 묵상까지 끝내고 또 형제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야지요. 억지로 아침 식탁에 앉지만 모래알을 씹는 듯 합니다.
형제들 학교가고 나서, 오늘 내로 끝내야할 숙제 한 가지 빨리 끝내고, 아이들에게 눈도장 찍고, "점심 먹기 전에 한 시간만 눈 좀 붙여야지" 하고 침실로 올라가는데, "반가운 상담전화"가 한통 걸려옵니다.
"오전은 안 되겠군" 하고 포기하면서 점심을 먹습니다. "빨리 먹고 올라가야지" 하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결국 사랑하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할 수 없이 축구화로 갈아 신었습니다.
재미있게 한 게임 뛰고 나서 "이제는 정말 눈 좀 붙여야지" 하고 올라가는데, 사무실 앞에는 "공포의 면담 고백성사"를 청하는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한 분 한 분 사연을 들어보면 정말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기막힌 사연들입니다. 그분들을 가신 후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3시였습니다.
"이제 드디어!" 하고 올라가는데, 또 다른 전화가 걸려옵니다. "어제가 원고 마감 날인데, 어떻게 된 일이냐"는 전화입니다. 또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갔습니다. 침실에는 잠시도 올라가지 못한 채 하루를 마감하고 고개를 드니 시간은 또 다시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눈꺼풀이 무거운 하루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 중에 "살레시오 회원이 되면 내가 3가지는 반드시 책임질 것이니 염려들 말라"고 하셨는데, 그 3가지는 일과 빵과 천국입니다.
살레시오 회원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한 것은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처럼 언제나 때가 되면 식사가 마련된다는 것 외에도 늘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찾아오는 사람들,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점심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지나친 과로로 인한 심각한 스트레스 상태에 빠져있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동안만이라도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납니다. 그러나 귀신같은 군중들은 족집게처럼 예수님 일행의 거처를 알아 맞춥니다. 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청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볼 일이 있습니다. 과중한 업무로 인한 지속적인 스트레스, 탈진상태에 빠져있었던 예수님과 제자들이었지만 그 상황에서도 짜증내지 않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백성들을 향한 측은지심을 발휘합니다. 단 한 사람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한 선배 신부님의 말씀이 늘 제 귀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신부로 살아가면서 사람을 위해서 손해 보는 시간을 절대로 아깝게 생각하지 마라. 사람을 위해 쓴 시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보낸 시간과 마찬가지다. 네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의 말을 정성껏 귀 기울여서 들어주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라. 사람에게 투자해라. 지금 자네를 찾는 사람이야말로 자네를 향해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네."
결국 인간이 보물입니다. 인간이 복음입니다. 인간이 하늘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 법이다. 나이가 많아 죽을지라도 젊어서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피네로)
일과 놀이
-오상선신부-
해설판 공동번역 성서를 출간한 춮판사의 이름이
<일과 놀이>이다.
첨에 이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일과 놀이라니???
그러나 이 제목이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휴식에서 비롯된 우리말다운 표현임을 알게 되면서
정말 멋진 표현이구나 생각한 적이 있다.
현대인은 갈수록 일과 놀이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요즘 거세지고 있는 주5일 근무제에 대한 요구도
일과 놀이간의 조화가 윤택한 인생을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고도 보인다.
오늘날 가정문제 또한
직장생활과 가정공동체의 생활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그리고 학생들의 교육문제 또한
입시준비에만 치우쳐 있음으로 인성교육의 장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데서
오는 단순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교회 안에서의 생활은 어떠한가?
평신도들은 가정생활, 사회생활의 고단함 때문에
기도생활과 애덕생활이 영적인 쉼의 차원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단순한 악세사리로 전락하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도자들 또한
사도직 생활이 주는 압박 때문에
내적생활, 기도생활이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자꾸만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직자들 또한
사목활동과 그에 따르는 부차적인 일들 때문에
영적인 휴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착한 목자로서, 영혼의 아버지로서의 이미지가 자꾸만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혜출중한 왕 솔로몬은
하느님께 부귀영화와 재물을 구하지 않고
지혜를 청한다.
지혜는 들을 줄 아는 자세를 뜻한다.
솔로몬은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청하였다.
이는 솔로몬이 얼마나 일(행정, 업무 등)에도 불구하고
늘 명상과 사색의 사람이었나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예수님 또한 마찬가지이다.
늘 사람들 사이에서 일에 매달리셔야 했지만
늘 쉼의 여백을 가지신 분이시다.
쉼 때문에 일을 마다하며 뿌리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일 때문에 쉼을 소홀히 하시지도 않으셨다.
나는 어떠한가?
<주님으로부터 일하는 은총을 받은 형제들은 충실하게 또 헌신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피하는 동시에
거룩한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끄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현세의 다른 모든 것들을 이 정신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이 권고말씀을 오늘 다시 묵상해보자.
기도를 넘어서
-전삼용신부-
며칠 전에 작년 제가 추천서를 써준 수녀원 입회한 자매가 휴가를 나왔습니다. 저의 첫 딸이니만큼 잊지 않고 기도해주고 있지만 결국 자신의 길은 자신이 가는 것이기에 수녀원 들어가서 어떻게 살라고 이것저것 말을 많이 해 주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기도에 맛을 들여라.’였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잘 배워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며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는 시간인 기도가 휴식과 즐거움이 아니라 의무와 일이 되어버린다면 정말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수녀원에서 의무로 해야 하는 성체조배 시간이 한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점심 설거지를 하고 잠깐 혼자 성체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함께 성체조배 하는 시간보다 더 좋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애인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나는 것보다는 단 둘이 만나는 것이 더 행복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복음전파를 마치고 예수님께로 다시 모여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하시며 배를 타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함께 떠나십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성인은 사막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도 도시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막으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도시에 머물지 않고 왜 자꾸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으로 돌아가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지요.”
성인에게는 사막이 바로 물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면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친밀히 만나는 것은 힘들어집니다. 정신이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외딴곳으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데려가신 이유는 번잡한 세상을 떠나서 사도들이 당신과만 머물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다시 힘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만 있는 것을 보고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께 동생도 좀 일을 하라고 말씀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 참으로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진정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외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머물 줄 아는 영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가 떠나는 것을 보고는 육로를 통하여 배가 도착할 곳에 먼저 가서 기다립니다. 좀 쉬려고 했던 사도들은 실망을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아서 당신이 직접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외딴곳으로 가서 사도들과만 함께 머물며 그들에게 휴식을 주시지 않고 다시 일을 시작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기도로 힘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양들이 원하면 그 기도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보다 더 큰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저도 본당에서 힘들게 일하다 잠깐 시간 내어 혼자 조용히 기도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와서 면담이나 고해성사를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나가기 싫습니다.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무엇을 해야 한다면 그것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조금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박차고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기도보다는 항상 사랑의 실천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자신의 수도원에서 성체 앞에만 앉아있는 수녀님이 있었는데 그 수녀가 성당에만 앉아있는 것을 보면 불러서 일부러 다른 일을 시키곤 하였습니다. 휴식에만 푹 빠져있어 일을 하려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영적 게으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선 시간 있을 때면 외딴곳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을 휴식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하는 것, 그리고 그 다음은, 기도 중에 혹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그 달콤한 기도도 포기할 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외딴곳의 역동성
- 이은주 수녀-
피정을 위해 익숙한 곳을 떠나 세상과 분리되어 별도의 공간에 홀로 머물러야 할 때가 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특별한 시기를 마련하시는 것은 당신과 함께 머물기를 바라는 초대다. 이 때에는 내적 침묵과, 외적 단출함이 필요하다. 영혼과 육신이 고요해지고 단순함에 젖어들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에너지가 온몸을 차지한다. 그 힘은 어떤 도전에도 굴하지 않는 자존감과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끌어올린다. 나는 이것을 ‘침묵의 역동성’, ‘외딴곳의 역동성’이라고 부른다.
일상을 떠나 피정 집으로 들어오는 환한 얼굴의 형제자매들을 볼 때는 더욱더 확연히 하느님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다. 하느님의 음성만을 들으려는 올곧은 내적 눈이 뜨이면서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간다. 기도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나누러 올 때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재창조되는 것에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자신 안에 내재된 죄의 속성, 자신을 혼란으로 몰고 간 상황,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아픔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 안에서 의미를 되찾는다. 그리고 이런 정화의 시기를 거치면 기쁨이 찾아온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나 평화와는 다르다. 마치 정화된 물처럼 맑고 깨끗하여 고요하고 은근한 평화가 침묵 안으로 잦아들어 들뜨지 않는다. 그 모습만 바라보아도 마음이 흐뭇해지며 외딴곳으로 초대하여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역동적인 창조의 힘을 느끼게 된다.
-전연동신부-
꽃을 심어야 꽃밭에 여백이 생긴다고 합니다.
화선지에 점을 하나 찍어야 나머지가 여백으로 남는답니다.
짬짬이 시간을 내어 대자연의 화선지에 꽃도 심고 점도 찍어야 삶의 여백이 생겨납니다.
영혼의 여백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바쁜 일상, 기도로 영혼의 화단에 꽃을 심어보고, 성체로 영적인 화선지에 점 찍어 보면, 영혼에 여백이 남습니다.
영혼의 여백에 비로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쁜 일상, 조급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머무는 외딴 곳, 영혼의 여백을 만드는 바로 그 외딴 곳이라야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영혼에 하느님을 위한 작은 여백이라도 만드시면 좋겠습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강지원신부-
오늘 복음은 지난 목요일 복음 이였던 마르코 복음 6장 13절 이후에 이어지는 복음 내용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회개를 선포하고 마귀를 쫒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파견 명령을 받고 곳곳으로 파견되어 떠나갔던 제자들이 주님의 사명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이 후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제자들은 자신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과 행 한 모든 활동들을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모두가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도록 명령하신 일들이었습니다. 즉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낫게 해주었으며,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쁨을 전해 준 일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고자 하는 은총과 평화와 사랑을 주님을 대신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 제자들이 파견되어 서 한 주 된 일이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아주 중요하게 묵상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 사목을 제자인 우리들과 함께 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들을 당신의 벗으로, 당신의 협력자로, 당신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고자 하시는 은총과 사랑을 당신의 제자인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역할과 몫을 충실히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전해 주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마태오 복음14장 13절 이하의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안에서 분명하게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기적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저녁 무렵까지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며 난색을 표현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져오게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이 주님이 주신 그 빵을 받아서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의 빵과 물고기를 당신이 직접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시켜서 제자들이 당신을 대신하여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당신 친히 몸소 당신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직접 전해주시면서도 동시에 그 능력과 권한을 제자들에게도 주시어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당신의 사랑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과 “더불어 함께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사랑의 전달 방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나부터 먼저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수 많은 은혜와 사랑을 이제는 내가 주님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만나서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고 기쁨이라는 진리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인 나부터 먼저 전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외롭고 아프고 힘들어 하고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에게 내가 주님을 대신하여 손을 잡아 주어야 되고 주님을 대신하여 어깨를 내밀어 주어야 하고 주님을 대신하여 안아 주고 함께 웃고 울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 되는 선교 사명인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 새벽, 너무나 바쁜 하루가 될 것을 미리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봉성체, 미사, 성시간, 새영세자 첫 고백…….
틈이 없어 보였습니다. 특히 봉성체를 하게 되면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많이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저는 매일 새벽마다 하는 수영을 포기하고, 체력 보강을 위해서 그 시간에 잠을 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녁에 있을 성시간 자료를 살펴 본 뒤, 저는 취침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잠들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립니다. 조금 화가 났습니다. ‘왜 이 순간에 전화가 오는 거야?’ 전화를 받아보니 별 내용의 전화도 아닙니다. 성당에서 가장 많이 받는 내용……. “오늘 미사 시간이 어떻게 되지요?”였습니다.
전화 통화 후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잠시 뒤, 이번에는 전화 인터폰 소리가 들립니다. 사무장님이십니다.
“신부님, 세콤 설치를 해야 하는데 지금 해도 되겠습니까?”
지난 번, 성당에 도둑이 들어온 뒤 며칠 전부터 성당 무인 경비 시스템을 설치하고 있었거든요. 어제가 사제관에 경비 시스템을 설치하는 날이라서 지금부터 설치를 해도 되겠냐는 것이지요. 또 화가 났습니다. 조금 쉬려고 매일 아침마다 가는 수영도 포기했는데…….
봉성체를 다녀왔습니다. 너무나 피곤했습니다.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다행히 사제관의 경비 시스템 공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였습니다. 더군다나 침실은 모두 끝났으니, 그곳에서 쉬어도 된다고 합니다. 침대에 누었습니다. 막 잠들려는 순간, 드릴로 벽을 뚫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가 멈추고 잠들려는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립니다. 내용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오늘 미사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입니다.
결국 잠시도 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운이 없냐고…….
어제 저녁 묵상 때, 문득 하루의 일과가 떠올려 봅니다. 정말로 운이 없는 하루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감사하고 은혜로운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잠을 잘 수 없었던 순간의 시간만을 바라보면서 하루 전체가 운이 없었다고 단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쁜 한 일면만을 가지고 전부가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것……. 반대로 좋은 한 일면만을 가지고도 전부를 좋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그런 모습보다는 부정적인 것만을 내세웠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하십니다. 사실 연일되는 복음전파로 인해서 많이 피곤하셨지요. 그래서 성서에서는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군중을 보고서 짜증이 날만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지요. 오히려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고서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해서 애쓰십니다.
바로 한 일면을 보고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큰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삶을 본받아 우리 역시 변해야 할 때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짜증내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목자의 동반자
-이정호신부-
수도원에 피정오시는 분들이 꽤 계십니다. 본당 단체나 신심단체의 회원들이
교육이나 영혼의 쇄신을 위해서 조용한 수도원을 찾아 피정을 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강의 후에 자신들의 삶을 나누기 위해 소모임으로 나누어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장 어려운 것이 모임을 주재하는 분과
발표할 분을 선정하는 것입니다. 서로들 피하고 싶어하고 미루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정작
발표할 때 보면 너무나 조리 있게 잘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앞장서고 싶지 않고 주목받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이 어쩌면 예수님께서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목자없는 양들 같지 않은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끌림을 받는 양이 되기는 쉽습니다. 오라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책임지고 앞장서 가는 목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와 성사생활을 통해서, 교육과 피정을 통해서
사랑의 책임을 나누어 지는 목자의 동반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쉬어라
-윤인규 신부-
제자들은 화려하고도 초라한 세상, 행복하고도 불행한 세상을 보고 돌아왔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눈에 세상은 예전 같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도 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 가난하다고 착하지도 않고, 지체가 隻鳴?거룩하지도 않은 세상이었다.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마르 6,17-29)에 대한 보도에 이어 나오는 제자들의 활동 보고(마르 6,30), 그리고 돌보는 이 없이 굶주리는 이들(마르 6,35-44)의 이야기는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순과 딜레마에 빠진 세상과 제자들의 처지가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스승께서 보시기에 제자들은 지치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나무는 쉬면 나이를 먹는다. 나이테는 묵은 시간과 새로운 시간을 구분 짓는 금이다. 쉬었다는 것은 성장했음을 말해준다. 나이테가 없는 나무는 크게 자라지 못하고 켜도 무늬가 없어 아름답지 않다. 쉼은 시간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쉼은 과거를 사라지게 하지 않고 영혼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고 삶을 하느님 것으로 숙성시킨다. 하느님께서도 6일 동안의 창조를 완성하시고 쉬셨다. 세상을 보고 혼란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가서 좀 쉬라’고 말씀하신다. 끝은, 아니 완성은 외딸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쉬는 것이다.
연중 제4주간 토요일
- 차성현 신부-
오늘 우리 예수님의 마음은 '가엾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사람도 가엾고 저 사람도 가엾고 온통 그 마음 뿐입니다. 예수님의 파견 명령을 받고 복음을 전한 후 돌아온 제자들이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습니다. 여행 길의 제자들이 고생하며 힘들었을 터인데 돌아와서도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밥 먹을 겨를 조차 없습니다. 수고한 제자들이 너무 가여워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도 참 대단합니다. 불붙은 그 열정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온 동네에서 떼거리로 몰려와 먼저 와서 기다립니다. 갑자기 예수님의 마음이 또 가엾은 마음으로 가득찹니다. 그래서 직접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사람들도 가엾고 또 그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제자들도 가엾고 사람들만 보면 온통 그 가엾은 마음 뿐 입니다. 지금의 우리를 보시고도 예수님께서 그 가엾은 마음을 가져 주셨으면 좋으련만, 사람들이 가졌던 그 열정도 또 제자들이 보여주었던 그 열심도 모두가 다 부족할 뿐입니다. 부족함만으로도 부끄러운데 눈에 딱 들어오는 한 글자가 부끄러운 우리를 더 얄밉게 만들어버립니다. '가서 좀 쉬어라'
며칠 전 신문에 '휴가 위해 일하는 직원들'이란 제목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회사 사람들의 우선 순위는 '일' 이 아니라 '놀기' 였습니다. 무슨 회사가 일을 먼저 해야지 놀기를 어떻게 먼저 합니까? 그런데 지난 수요일에도 그 회사는 직원의 반인 12명이 말레이시아로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일보다 놀기를 우선으로 하는 회사, 정말 다니고 싶은 회사이지 않습니까? 그 회사 대표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에 치이면 결코 창의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업무의 우선 순위는 당연히 놀기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너무 존경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놀기'라면 우리 신부들도 결코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놀기'라고 부르기 보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선물로 주셨던 것처럼 '휴식'이라고 즐겨 부릅니다. 우리들처럼 자유롭게 휴식을 누리면서 사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대개 월요일에 우리 신부들은 휴식의 시간을 가집니다. 무엇이나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산으로 바다로 운동이며 등산 혹은 낚시를 즐기기도 하고 다양한 문화생활도 함께 즐깁니다. 때론 쿡 쳐박혀 실컷 잠을 자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기에게 필요한 휴식을 취합니다. 이렇게 하루의 휴식을 만족하게 보내고 나면 나머지 일주일도 행복하게 지나갑니다.
지난번 언젠가 한번은 월요일 휴식을 잘 계획해서 떠났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별로 상쾌하지 못하게 보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먼 길을 달려와 고속도로 통행료를 낼 때 였습니다. 아가씨 같은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제 차 번호랑 자기 차 번호가 똑 같다고 했습니다. 잠깐이지만 처음으로 그런 순간에 너무도 친절한 인사를 받았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낌이 남 달랐습니다. 처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 말 몇 마디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보통 때와 달리 전혀 아깝지 않은 통행료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말 한마디에 이렇게 마음이 평화로울 수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세웠던 계획보다 한마디 말이 더 큰 휴식이었습니다. '가서 좀 쉬어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 떠오릅니다. 제자들도 아마 예수님의 이 말 한마디에 피로가 한꺼번에 다 풀렸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참 휴식이라는 것도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보다 놀기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회사가 훌륭한 회사로 성장하듯이, 휴식 가운데서도 주님의 평화를 맛볼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 더 행복한 신앙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에게는 휴식 같은 말을 정말 더 자주 많이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고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한마디 말로 하느님의 평화를 느꼈는데, 하물며 소중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것을 아낄 수가 있겠습니까? 아멘.
측은지심
-김 미카엘 부제-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맹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자신만의 싹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무한하게 넓어지고 채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仁)의 싹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측은지심입니다.
바로 예수님 마음입니다.
성서 곳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이것저것 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깊어 상대를 보며 자신이 가슴 아파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바쁜 일상생활 중에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십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하느님을 향해 정진하는 것 못지않게
휴식과 긴장 해소와 여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바쁨과 여유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지고
인생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게 됩니다.
자연이 보이고, 주변 사람들이 보이고, 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보입니다.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 보입니다.
휴식은 이렇게 우리를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깨달음으로 초대합니다.........
† 사단(四端)의 마음씨 †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파견된 제자들의 복귀와 활동 보고, 그리고 쉴 틈도 없이 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목요일 복음으로 예수께서 12제자들을 파견한 사실을 들었고, 어제 복음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기록을 접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치유와 구마의 능력을 주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도록 아주 엄중한 여장규칙과 함께 파견하였고, 파견된 제자들은 실제로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마르코는 제자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동안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과거기사를 들추어 보도하였다. 이는 제자들이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한 편집상의 묘기로 볼 수도 있고, 예수의 정체에 관하여 헤로데를 포함한 사람들의 오해와 착각을 불식(拂拭)시키는데 일조(一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은 다시 예수께로 돌아왔고, 그들의 활동내역(6,13)은 이미 복음에 언급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활동들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상기되었을 터이고, 더러는 꽤나 피곤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과 재충전이다.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재충전이란 한적한 곳으로 떠나 좀 쉬면서 음식도 먹고 편안하게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한편으로는 예수와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떠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을 찾아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예수의 일행이 이동의 수단으로 배를 이용했으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군중은 영악했다. 그들은 여러 동네에서 나온 사람들과 함께 육로를 이용하여 예수의 일행을 앞질러 배가 닿을 곳에 이미 가 있었다. 이렇게 예수와 군중은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곧 펼쳐질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6,35-44)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육신의 배고픔을 위한 빵을 먹기 전에 먼저 먹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빵이다. 무릇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마태 4,4)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로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자신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피곤해 하여 휴식을 필요로 함을 알고 계시면서도, 말씀의 빵을 내리신 이유는 군중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말씀의 빵은 인간의 영적(靈的)인 배고픔을 충족시킬 것이다. 그러나 육신(肉身)을 위한 빵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게 직접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6,37)고 명하신 것이다. 불쌍한 군중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예수님의 마음은 또한 모든 사목자가 몸에 익혀야 기본적 소양(素養)이리라.
사목자가 몸에 익혀야 할 소양에 관하여는 유교교설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맹자(孟子)에서도 엿볼 수 있겠다. 맹자에는 사단(四端)이라는 대목이 있다. 사단은 사람의 본성인 인(仁)·의(義)·예(禮)·지(智)에서 우러나오는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네 가지 마음씨를 말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사람의 형편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경계하는 마음이요, 사양지심(辭讓之心)은 겸손하여 불의(不義)를 받지 않거나 이에 응하지 아니하는 마음이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밝히고 따지는 마음이다. 이들 마음은 예수님처럼 행동에 옮겼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선 이런 마음을 우리 가슴에 사무치도록 새겨 넣는 것이다.
좀 쉬도록 하여라(6, 30-34)
-유 광수신부-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도록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황량한 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었다.(마르 6, 7 참조) 지금 사도들이 예수께 보고하는 내용은 파견되어 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관계가 원만한 상태임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운 모습에서 무엇을 묵상할 수 있는가?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돌아가듯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침기도를 바칠 때 우리에게 주신 하루를 어떻게 사용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될 것인가를 계획하고, 낮에는 아침에 계획한 것을 열심히 실천하고(생활하고), 저녁에는 하룻동안 아침에 예수님과 함께 살겠다고 계획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자기가 지낸 하루의 시간들을 예수님께 보고드리는 저녁 기도로 하루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비록 각자 삶의 자리가 다르더라도 우리의 모든 생활이 이렇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같은 예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서로 일치하게 되고 서로를 더욱 사랑하면서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이다. 가족으로서 한 가정에 살면서 그리고 같은 공동체에 살면서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 아니라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가정이며 공동체인가 아니면 무엇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생활이 이루고 지고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 보자.
예수님이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도록 하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로 묵상할 수 있겠다. 하나는 제자들이 활동을 하고 돌아와서 육신적으로 지쳐있는 데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이 제자들이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라는 것이다. 즉 지친 제자들을 좀 쉬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제자들에게 휴식이 필요하듯이 우리에게도 휴식은 필요하다. 휴식은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즉 음악에 강약이 있고 높낮이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서 일과 휴식은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의 리듬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쉬지 않고 열심히 뛰는 것만을 성공의 비결로 생각하고 지금같이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더욱 바쁘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에게 쉰다는 것은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이고,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쉰다는 것은 경쟁에서 지는 것이고 경쟁에서 지는 것은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뛰어야 하기 때문에 밥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항상 그 다음 일을 생각한다. 그래서 늘 긴장한다. 이렇게 매사에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고 이런 생각들이 우리에게서 쉼을 앗아갔다.
우리가 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로는 바쁘다는 구실 외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이기적인 사고도 한몫을 한다. 즉 자기가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사사건건 모든 일에 끼어 들어 간섭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입버릇처럼 늘상 "쉬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 말 이면에는 쉬지 않고 일하는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쉬고 싶다."는 말은 "지쳤다."는 말이지만 막상 쉴 수 있는 기회를 주면 혹시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고 능력을 과소 평가받는 것이 아닌가 섭섭해한다. 쉬는 것을 말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우리는 계속 바쁘게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갑자기 병이 나서 병원 신세를 지거나 아니면 과로로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정말로 영원히 쉬게 된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수없이 경험하였고 또 보았다. 오늘도 쉰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마치 "바쁘다."라는 체면에 걸린 사람처럼 바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고 안절 부절하지 못한다. 그래서 또 바빠야 하고 바쁘기 위해서 왔다갔다해야 한다.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의 쉼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마무리하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게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 2,2-3) 하느님께서 손을 떼고 쉬신다는 것은 창조를 계속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것들에 복을 주시는 것이었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 잎이 무성해지고 가을에 결실을 보며, 겨울에 앙상해졌다가 다시 새봄이 오면 물이 오르고 움트는 것, 이 같은 일들이 하느님께서 창조를 멈추시고 쉬시는 가운데 진행된다. 만일 하느님께서 사사건건 간섭하시며 늦겨울에 피어나는 개나리를 일찍 핀다고 벌주시고, 초봄에 눈이 내린다고 탓하신다면 창조의 아름다움이나 신비스런 경이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느님이 쉬시는 시간에 온 만물이 우리에게 더욱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다가온다. 하느님께서 쉬시는 동안, 아니 하느님께서 쉬시기에 피조물은 더욱 완성으로 나아가며, 우리는 대자연의 신비와 함께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더욱더 찬양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창조를 멈추시고 쉬시는 동안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쉼을 잃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쉼과 안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고요가 없는 곳에 쉼이 있을 수 없고, 쉼이 없는 곳에는 "창조"가 있을 수 없다. 창조가 쉼을 위해 있고 쉼이 더 나은 창조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쉼이 방해받는 데서는 재창조를 의미하는 레크리에이션도 그 기능을 잃고 만다. 이런 데서 사람들의 성격도 성급하게 변해가고 있다. 모든 자연들이 봄에 파릇파릇 새 싹이 나올 수 있는 것은 긴 겨울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봄에 개구리가 나오고 온 곤충들이 땅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동면을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여유'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얼굴을 다듬는 방법은 오직 마음의 여유를 찾는 일에서 시작된다. 여유는 '쉼'에서 나온다. 찡그린 얼굴에서는 결코 창조적인 일이 나올 수 없다. 여유 있는 얼굴, 쉬는 얼굴만이 창조적인 일, 구원의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잘 쉰 얼굴인지 점검하기 위하여 가끔씩 거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예쁜지, 화장이 잘 되었는지, 주름살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그런 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잘 쉬는 얼굴인지, 얼마나 여유롭고 평안한 얼굴인지, 혹시나 지치고 찌그러진 얼굴은 아닌지 스스로 관찰하고 반성하기 위해서 말이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선택한 예수님의 모델과 한참 후에 찾은 유다의 모델이 같은 인물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쉴 줄 아는 얼굴과 쉴 줄 모르는 얼굴의 차이이리라.
20세기의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몇 분만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은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