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후기에 쓰인 말을 읽다가 이어령 님의 글이 생각나서
그 분의 글을 조금 옮겨 봅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 그 이후,
부제 : '한 그릇 메밀 국수' 의 일곱가지 의미,
이어령 저, p.84 ~ p.87]
일억 이천만의 눈물
1987년 5월 이 동화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별로 화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원래 이 이야기는 동화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구릿
고노 가이'라는 구전 동화 모임의 통신 판매망과 강연장의 직판 형태
로 보급되어 왔기 때문에 몇몇 동호인 사이에서나 알고 있는 정도였
다.
그러던 것이 일년 뒤 FM 동경 제작의 연말 프로 '가는 해 오는 해'
에서 이 동화가 전문 낭독되고, <산케이 신문>의 사회면 머리 기사
로 알려지면서부터 뒤늦게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방속국에
는 천 통이 넘는 청취자의 투고가 몰려들어 재방송을 하였고, 국회
에서는 질문대에 오른 공명당 의원 한 사람(오쿠보 나오히고)이 15
분 가량 이 '한 그릇 메밀 국수'를 낭독하여 시끄럽던 장내가 숙연
해지면서, 이윽고 각료석에 앉아 있던 총무처 장관이 눈물을 흘리는
뜨거운 장면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드디어 이 동화는 구리 료헤이
작품집 속에 수록되어 일반 서점에서 판매되기 시작, 일약 베스트셀
러 목록에 오르게 되고, <주간 문춘>이 '편집부원도 울었다'는 선전
문구를 달고 전문을 게재했다.
그러자 전 일본 열도가 눈물로 침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이야
기를 읽고 울지 않고 배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차 속에
서 이 책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정말 울지 않고 견딜 수 있
는지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라는 말들이 신문 잡지에 쏟아져 나오
게 되고, '나도 울었습니다.'라는 제목 아래 작가, 예술인들을 비롯
일본의 저명 인사들이 총동원되어 눈물 흘리기 콘테스트이 특집이
등장하기도 했다.
활자만이 아니고 후지 텔레비전 같은 방송국에서는 이 동화를 무려
닷새 동안이나 낭독자를 달리해 가면서 되풀이 방송, 그것을 시청하
는 사람들의 우는 모습을 실황 중계하기도 했다. 게스트로 나온 연
예인들의 우는 얼굴을 비롯하여 시내의 각 국민학교와 사친회를 찾
아다니며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눈물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공개했
다. 일본일들이 잘 쓰는 말로 하자면 '일억 총눈물'의 바다가 재현
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감동에서 끝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경시청에서는 이 '한 그
릇 메밀 국수'를 복사하여 일선 수사관들에게 배포했다. 피의자 신
문을 할 때 우선 이 동화를 읽혀 눈물을 흘리게 하고, 마음이 순수
해진 그 순간을 틈타서 자백을 시키라는 아이디어였다.
외톨이가 두려운 사람들
만약 울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이미 그것은 일본인이 아니다. 일억
이 총 울어야 한다. 남들이 다 우는데 울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것은 무라하치부(마을에서 따돌림을 받는 외톨이)가 된다. '다모리'
라는 일본의 유명한 코미디언은 방송중 이 동화를 비꼬는 말을 했
다. 울리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좀 지나치다는 의견이었다. 그러자
젊은 사람들로부터 항의 편지가 쇄도하고, 결국 다모리는 대학 강
단에서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자기 입장을 해명하는 강연회를 갖기
에 이른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일본 언론이나 학계에서는 '소바 증
후군' 또는 '가케소바 현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화 속에서는 2번 테이블의 신화가 생겨났듯이, 현실 속에서도 그
와 똑같은 '한 그릇 메밀 국수' 신화가 탄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일본인들의 신화만
들기만이 아니라 이 '한 그릇 메밀 국수'는 신화의 붕괴 과정을 동
시에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욱더 우리는 일본 문화의 특
이성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안데르센 동화 '인어 공주' 이야기를
사실 이야기로 믿었던 사람들이 뒷날 그것이 허구의 이야기라는 사실
을 알고 코펜하겐에 세운 인어상을 부수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로렐라이의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 하여 관광객이 발길을 돌
리고, 하이네의 그 유명한 노래가 불리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듣
지 못했다. 그러나 이 동화는 이토록 일본 전 열도에 눈물의 신화를
만들어 내고서도, 그것이 원래 허구를 다루는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실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금시 냉담하게 돌아서 그 뜨거웠던 바람은
언제 불었느냐는 듯 꺼져 버리고 말았다.
즉, 이 동화가 선풍을 불러일으키게 되자 그것이 진짜 이야기냐 허구
냐로 관심이 모아졌다. 더구나 이 동화의 책머리에 '이야기는 지금으
로부터 15년 전의 12월 31일 삿포로 시에 있는 소바집 북해정에서 생
긴 일로부터 시작된다.'라는 도입문이 적혀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
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동화 속의 주인공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고, 그에 대한 온갖 풍문이 떠
돌기 시작하게 된다. 형이 현재 삿포로 종합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를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느니, 동생이 교토에서 은행원으로 일
하고 있는데 곧 소원대로 메밀 국수집을 연다느니, 심지어는 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어 작가인 구리 씨가 주례를 서게 되었다느니 하고 말
이다.
허구와 사실의 갈등
그런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세상이 이렇게 떠들썩한데 그게 사실이
라면 어째서 그 모델들은 지금껏 잠자코 있는가. 이야기는 처음부터
허구를 사실인 체 꾸며 낸 작가의 사기극이다.'라는 비난이 일기 시
작했다. 뿐만 아니라 1989년 6월 2일 <석간 후지>, <동경신문>, <포
커스>지 등은 이 작가의 과거 신상 문제에 대해 일제히 폭로성 기사
를 내보냈다.
엉뚱하게도 '내가 그 소바집 주인'이라고 하며 나타난 사람은 3년전
에 작가인 구리 씨로부터 속았다는 야마오카 고오조 씨였다. 자기는
북대의학부의 소아과 의사이지만 뜻이 있어 병원을 그만두고 동화작
가가 되려고 공부를 하고 있노라고 하며, 자기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가짜 의료 행각 등이 발각되자 자기 자동차를 훔쳐 타고
달아난 사람이 바로 '한 그릇 메밀 국수'의 작가 구리 료헤이라는 고
발이었다.
실화냐 허구냐와 작가의 신상 문제가 이번에는 메스컴의 초점이 되면
서 한 그릇의 뜨거운 눈물은 점차 식어 갔고, 그 감동의 불꽃은 곧
꺼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시 1992년 이 이야기는 영화화되어 상
영되었고, 어느 지방 기업체에서는 이 감동의 이야기를 이대로 묻어
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하여 만화로 만들어 그 붐의 심지에 다시 불
을 붙이는 운동을 펼쳤다(그것이 바로 필자에게 보내 온 만화책이다).
구리 료헤이를 위한 모임이 열리고, 그의 고향에서는 특별 영화 시사
회와 강연회 등을 개최하여 그야말로 '하게마시 모임'을 가졌다. 이
이야기를 둘러싼 이상과 같은 사회적 반응에서 우리는 동화보다 더 흥
미있는 신화만들기의 양면성을 엿볼 수 있다.
카페 게시글
♡ 낙서장 ♡
Re:한 그릇 메밀 국수
산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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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2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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