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부산일보/오늘을 여는 詩』2023.08.01. -
그리운 것은 그때일까, 그 사람일까? 부모님과 소꿉친구를 포함한 유년은 그리운 사람과 그 시절이 분리되지 않는다. 거기에 내 존재성의 근원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유년에 대한 그리움은 추억을 넘어 회한으로 뻗어간다.
시 속의 아이는 조금이라도 엄마의 ‘배추잎 같은 발소리’를 빨리 들으려 문 가까이 앉아 있을 것이다. 오지 않는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아이의 심정은 선득한 쓸쓸함, 그래서 슬프고도 애틋한 ‘내 유년의 윗목’이 된다. 그런데 ‘엄마 걱정’은 누구의 걱정일까? 시장에서 지쳐 돌아와야만 했던 엄마에 대한 ‘아이의 걱정’인가, 빈방에 ‘찬밥’처럼 담겨 어둠에 떨고 있을 아이에 대한 ‘엄마의 걱정’인가? ‘걱정’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게 한다. 요절 시인 기형도는 ‘엄마 걱정’을 통해 시인은 그립고 아픈 사람을 걱정하는 사람임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