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골목투어!”
이런 투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
나 역시도 서울에 있는 동료를 통해 알았지만 내심 부끄러웠다.
익숙함이 준 무지인지 무관심인지. ‘현장, 아는 것만치 보인다.’고 했던가.
그래서 사이트를 대충 훑어보고선 동산의료원에서부터 시작하는 골목투어를 하기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니까 100년 전 개화기 암울했던 시간으로 여행을 떠나는 거다.
동산의료원 은혜동산에는 우리가 잘 아는 박태준 선생의 가곡 <동무생각>노래비가 있다.
< 동무생각 >
박태준 곡, 이은상 시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여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은 사라진다.
(청라는 푸른 담쟁이덩굴을 말하고 백합은 신명학교 그 여학생이리라.)
작곡가 박태준 선생이 계성학교를 다닐 때 신명학교의 한 여학생을 몹시 짝사랑했단다.
하지만 숫기가 없는 그는 끝내 고백도 못하고 각자의 길로 가게 되는데, 후에 이 얘기를
전해들은 시인 이은상 선생이 친구의 맘을 생각하며 노랫말을 지었고 박태준 선생이
곡을 붙였단다.
(문득 고삼 때 잠시 다녔던 신암동 청구교회에서 본 그 여학생이 생각났다.
잘 살고 있는지... 큭)
언덕에서 지척인 그 신명여고 정문이다.
특이하게 교복바지 끝단을 묶고 다녔던 이 학교를 우린 SM이라 불렀었지.
아마, 이글을 읽는 분 중에도 이 학교출신이 있으시겠지만...
근데 “담배 연기 없는 건강한 신명고등학교”라는 저 현수막 글귀는 뭘 의미하는 걸까.
‘담배 고만 피우자’는 궐기일까.... ‘청정지구 교정’이라는 시위일까...ㅎ
이 땅에 공식적으로 기독교선교사가 들어 온 것은 갑신정변 때 알렌이 일본 낭인에게
칼을 맞은 민영익(민비의 오빠)을 서양 의술로 살려준 일로 그가 왕실 주치의가 되면
서이다.
이에 쇄국의 문이 열리는 기폭제가 되어 이듬해인 1885년, 미국 북 장로교단에서 파송
된 언더우드선교사와 감리교단에서 파송된 아펜젤러 선교사부부가 입국하게 된다.
이들은 가난하고 어둡던 이 땅에 자신들의 삶을 모두 던졌다.
아펜젤라는 서울 쪽을 언더우드선교사는 대구지방을 선교지로 정하고, 뒤를 이어 들어
온 선교사들과 함께 계성학교, 신명학교, 제중원(현 동산의료원)을 지어 교육과 의료
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동산의료원 은혜의 동산엔 그 당시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주택 3동이 남아 있다.
대구시는 이를 시 문화재로 지정하고 박물관로 활용하며 탐방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동산의료원 남문 오솔길을 오르면 이국적 풍경의 뽀족한 지붕의 주택이 나온다.
1910년경에 지은 선교사 챔니스 주택이다. 누군가가 밖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라도
부르면 창문이라도 열 것 같은 주위환경이 고즈넉하다.
당시 국내 생산이 없었던 붉은 벽돌은 모두 중국에서 수입했다한다.
지금 선교 의료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제일교회 쪽에서 잡았다. 담쟁이 넝쿨이 세월의 무게를 더하는 것 같다.
유독 이곳 은혜의 동산엔 담쟁이 넝쿨이 많다.
선교사 주택 정원에는 시멘트로 깁스를 한 채 힘겹게 서있는 사과나무 한그루가 있다.
동산의료원 설립자인 존슨 선교사가 가져왔던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씨가 발아한 종자라고 ...
여기서 대구사과나무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동산의료원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이다.
대구시 담장 헐기 일환으로 헐게 되면서 정문에 있던 종각을 이곳에 옮겨 놓은 거다.
1893년에 입국한 스윗즈 선교사가 1910년경에 지은 집이다.
1907년 대구읍성을 철거할 때 성 돌을 이용해 기초 석으로 하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는
형식이다.
기와지붕에 적벽돌? 뭔가 국제결혼한 부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ㅎ
계단과 집 기초 석은 모두 대구읍성 철거 때 가져온 돌이다.
선교사 블레어 주택이다.
기초는 철근콘크리트로 하고 그 위에 적 벽돌을 쌓는 형식으로 당시 미국사회에서
유행한 방갈로풍이란다.
챔니스관을 배경삼아 한 컷했다.
은혜의 정원에는 사후에도 고국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뼈를 묻었던 선교사들과
그의 가족의 묘가 있다.
우리가 어둡고 가난했던 시절 이국만리 낯선 곳에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인술을
베풀었던 이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에 옷깃을 여미며 고개 숙인다.
‘3. 1 운동길’이라고 한다.
90여 년 전 대구에서는 1919. 3. 8일 계성고, 신명여고 대구고보 학생들이 동산의료원
솔밭 사이에 집결하여 서문시장으로 향하면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 길은 다른 별칭도 많다. 선교사들이 병원 일을 끝내고 집으로 오기위해 오르던
길이라 해 ‘선교사의 길’이라고도 하고, ‘빈처’의 작가 현진건이 오르내리던 길이라 해서
‘현진건의 길’이라고도 한다.
또 6.25전쟁에 피난 온 많은 시인들이 이곳을 왕래했다하여 ‘시인의 길’이라고도 하여
참 의미 있는 길이기도 하다.
‘3.1운동’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면 급하게 내려가는 90계단 길을 만난다.
궁금해 헤아려 봤는데 분명 90계단이었다. 영화 <여고 괴담>에서 본 그 여우계단이
생각나 이내 머리를 흔들어 털어 냈다. ㅋ
90계단 끝자락인 현 동산맨션 자리에는 100년 전 대구 갑부인 장길상의 아흔 아홉 칸
대저택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외아들 장병천에게는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서울로 유학 온 장병천은 평양기생 출신인 강명화를 만나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웬만한 돈으로 얼굴 한 번 보기에도 어려웠을 정도로 도도한 명기였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장길상은 아들의 행위를 인정할 수 없었고, 끝내 아들은 강명화를 데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빙자한 애정도피행각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유학생 사이에서도 강명화가 장병천의 앞길을 막았다는 비난이 일자 이들은
다시 귀국하고, 온양에서 동반 음독을 결행하는데 공교롭게도 강명화만 죽고 장병천은
살아남는다. 이에 안도한 장길상은 강명화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고 아들의 재기를 도우
려고 했지만 한 달 후 장병천 역시 동일한 장소에서 죽음이 되어 발견되므로 전국 기생
들의 한숨이 되었다고 한다.
개화기에 있었던 애틋한 사랑 얘기다.
다음코스로 이동하면서 ‘목숨을 걸 만한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정신 차려욧!” 이라는 외마디 소리가 기차소리처럼 시끄럽게
지나갔다. ^^
첫댓글 가까운 대구시내에 이런 곳이 있었구만요~ 학창시절 그 여학생도 생각하고~ 좋은 추억 만드셨네요~ㅎㅎ
동산병원 가시거덩 남쪽 입구에 있는 청라언덕이라도 함 가 보세요. 입구 바로 옆이예요. 내사 30년 병원 출입해도 그런 곳이 있는 줄이야 이제서야..ㅎㅎ
그렇군요 대구의 역사이고 역사속에 추억이군요~ㅎㅎ
대구도 구석구석 이색거리를 만들더라구요~.... 봉산문화거리도 얼마전 조형물을 설치했어요^^*
두분은 누구세요?????
문지현님은 누군지 아실테고...카렌스님은 카페지긴 줄 아는데...또 누구 말씀을..?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