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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의 명령을 따라
20240410 / 에 3:7-15
7 아하수에로 왕 제십이년 첫째 달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8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9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그들을 진멸하소서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맡겨 왕의 금고에 드리리이다 하니
10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며
11 이르되 그 은을 네게 주고 그 백성도 그리하노니 너의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라 하더라
12 첫째 달 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어 하만의 명령을 따라 왕의 대신과 각 지방의 관리와 각 민족의 관원에게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되 곧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치니라
13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14 이 명령을 각 지방에 전하기 위하여 조서의 초본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여 그 날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라 하였더라
15 역졸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급히 나가매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되 수산 성은 어지럽더라
더 3:7-15 / [하만의 유다인 말살 계획] 하만은 아하수에로왕 12년 1월에 그해의 열두 달 중에서 가장 좋은 날을 주사위로 찾아내도록 현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주사위를 그 나라 말로는 부르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하만은 자기의 거사를 위하여 가장 좋은 날을 가렸다. 그렇게 해서 12월 13일이 택일되었다. 8) 그러자 하만은 아하수에로왕을 찾아가서 이렇게 고발하였다. `지금 이 나라 안에는 모든 백성들 속에 흩어져 살면서도 그들과 동화되지 않고 유별나게 사는 한 민족이 있습니다. 그들의 법과 풍속은 다른 모든 민족들의 것과 달라서 임금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도 전혀 없습니다. 그들을 그대로 두신다면 임금님께 아무 유익도 없을 것입니다. 9) 그러므로 임금님께서 이 일을 옳게 여기신다면, 그들을 전멸시키도록 조서를 내리십시오. 그러면 제가 1만 달란트의 은을 임금님의 재정 관리인들에게 달아 주어 내탕고에 넣도록 하겠습니다.' 하만은 유다인의 재산을 몰수하여 왕의 사유 재산으로 바칠 작정이었다. 10) 이때에 왕은 손가락에 끼고 있던 인장반지를 뽑아 유다인의 원수인 아각의 후손으로 함므다다의 아들인 하만에게 주었다. 하만은 그 인장으로 왕의 전권을 쥔 대리자가 되어 유다인을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11) 그리고 왕은 하만에게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그 엄청난 은도 그대가 다 차지해 두고, 그 백성도 그대가 좋게 여기는 대로 처치하시오’ 12) 1월 13일에 하만은 왕의 서기관들을 소집하여 대신들과 각 지방의 총독들과 각 민족의 우두머리들에게 보낼 조서를 쓰게 하였다. 이 조서는 각 민족의 언어와 문자로 작성해서 아하수에로왕의 이름으로 서명되고, 왕의 인장반지로 결재되었다. 13) 그 조서는 보발들을 통하여 바사 제국의 모든 지역으로 전달되었고, 그 내용에는 이런 명령이 담겨있었다. `앞으로 꼭 11개월 후인 12월 13일, 바로 그 하루 동안에 유다인은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여 버리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 14) 이 조서의 사본은 고을마다 법령으로 미리 공고되어, 모든 민족이 그 날을 위하여 무장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15) 이제 보발들은 직접 왕의 지시를 받고 급히 달려 나갔다. 그 조서는 수사 도성에도 공포되었다. 이때에 왕은 하만과 술자리에 앉아 먹고 마셨으나, 수사 도성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하만은 유대인들을 멸절시키기로 작정한 후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모함과 뇌물로 왕의 허락을 받습니다.
제비뽑기 하는 하만(7) 유대인을 멸절하기로 작정한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 제 십 이년, 1월인 니산월에, 먼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가장 좋은 날을 제비뽑기로 정합니다. 성경에서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뜻을 결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잠 16:33; 레 16:8; 민 26:55; 수 14:2; 삿 20:9; 느 10:34; 행 1:26). 그러나 여기서는 바사에서 제의를 담당하는 점성술사들로부터 직접 유다 민족을 멸절하기에 좋은 길일을 받습니다. 그래서 12월인 아달월 13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유다 민족이 이러한 어려움을 대처할 수 있는 유예기간이 11개월 주어진 것입니다.
왕의 재가를 얻어내는 하만(8-11)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아니한 것을 가지고 유다 민족 전체가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한 것처럼 꾸며 아하수에로 왕에게 유대민족을 고발합니다. 뿐만 아니라 왕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은 일만 달란트를 뇌물로 바칩니다. 은 일만 달란트는 약 340톤으로 바사 제국의 1년 수입의 약 65%에 해당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그 동안 하만이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해 놓은 재물이 얼마나 많은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이면에는 앞으로 유대인을 전멸하고 탈취할 제물로 그 금액을 충당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암 2:6). 하만의 이러한 악한 계략을 알지 못한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의 전권(全權)을 상징하는 왕의 반지를 빼 주고 하만의 계획대로 실행할 것을 허락합니다.
왕의 조서를 쓰는 하만(12-15) 왕의 전권을 부여받은 하만은 제국 내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조서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왕의 반지로 도장을 찍어 조서를 완성한 후 각 도로 신속히 전달합니다. 이처럼 악을 행하는 자들은 주저 없이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로 인하여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술을 마시고 수산성은 어지럽더라”고 했습니다. 모함과 뇌물에 넘어간 왕과 악한 계략을 꾸민 하만에게는 그들의 일상생활일지는 모르지만, 성내에 있는 주민들로서는 조서의 내용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적용: 이때까지만 해도 하만은 자신의 계략이 성공했을 것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함과 뇌물로 만들어진 계획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옳은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선해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악해질 수 있는 자유도 있는 법입니다. 악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이 자유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까요?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 의지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 또한 자유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를 통해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입니다.
< 설 교 >
하만의 유다인 학살 음모
에스더 3:7-15 / 염두철목사
에스더가 왕후가 되고 얼마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사람 하만을 높은 벼슬자리에 앉힙니다. 대궐 문에 있는 신하들은 하만이 드나들 때마다 왕의 명령대로 꿇어 절을 하였지만,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무릎 꿇지도 않고, 절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대궐 문의 신하들이 왜 왕의 명령을 거역하냐고 하며, 하만에게 절을 하라고 권하였으나 모르드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신하들은 그가 유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가 보려고 하만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하만은 아말렉 왕 아각의 후손입니다. 아말렉족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원수 같은 사람들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말렉 사람에게 절을 할 수 없었고, 더구나 하나님외에 사람에게 꿇어 절하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만은 자기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을 하지도 않는 모르드개를 보고 몹시 화가 났습니다. 더구나 그가 유대인이라고 하자 하만은 모르드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그 나라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을 진멸할 찾았습니다.
하만의 이러한 악한 행동은 단순히 한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유다인을 진멸하는 일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사탄은 유다인 학살을 위해 어떻게 했을까요?
첫째로, 사탄은 분노에 찬 하만을 이용했습니다.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아하수에로 왕 제십이년 첫째 달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하만은 유다인들을 진멸할 날짜를 결정하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시행하기 위하여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모르드개의 일로 한 민족의 학살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모르드개의 절하지 않는 일이 하만으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었고, 하만은 모르드개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분노는 이렇게 악으로 치닫게 합니다. 가인은 분노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에서도 분노 때문에 동생 야곱을 죽이려 했습니다. 야곱의 자녀들은 디나의 사건으로 분노 하여 세겜 부족들을 모조리 학살했습니다.
오늘날도 분노 때문에 다툼과 살인이 일어납니다. 한국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어도 분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생기는 화병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병입니다. 그래서 1995년 미국의 정신의학회에서는 우리말의 화병(Hwa-byung)이라는 명칭을 정식 명칭으로 채택했습니다.
잠언 16장 32절을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노를 잘 통제하고 극복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성화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의 분노를 이용합니다. 분노는 마귀가 사용하는 치명적인 무기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6-27절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분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분노로 인해 사탄이 역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분노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사탄은 거짓말로 과장하는 하만을 이용했습니다.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로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하만은 왕에게 거짓과 과장된 말로 아뢰며,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않는 한 민족을 용납하지 말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사탄을 가리켜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하셨습니다. 거짓말로 에덴동산의 하와를 유혹했던 사탄은 언제나 거짓말을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만이 살인을 꾸미며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과 동일한 것입니다. 결국 하만의 배후에는 사탄이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만은 어떤 거짓말을 했을까요? 하만은 유다인이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라고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유대인에게 매우 가혹했지만, 그 뒤를 이은 페르시아는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을 돌려보내 나라를 재건하게 하고, 느부갓네살이 약탈해 왔던 성전의 기물도 돌려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만은 ‘한 민족’이라고만 말하고 유다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진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자기들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한 방어적인 침묵이고, 하만의 경우는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악한 침묵이라는 점에서 동일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법이 만민과 다르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만민과 달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소를 당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만은 여기에 자신의 편견과 거짓을 덧씌워서 고소를 합니다. 만민과 다른 법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단순합니다. 모르드개라는 한 사람이 하만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 한 가지를 어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만의 고소는 모든 유다인들이 왕의 모든 법률을 어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7절을 보면 선지자는 포로가 되어 끌려갈 백성들에게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고 전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서 반란 일으키지 말고 평화롭게 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만은 전혀 사실과 다른 거짓말로 살인을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사탄은 탐욕에 눈이 먼 왕을 이용했습니다.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그들을 진멸하소서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맡겨 왕의 금고에 드리리이다 하니.”
하만은 왕의 허락을 얻어내기 위해서 뇌물을 썼습니다. 왕에게 은 일만 달란트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페르시아 제국의 연간 세수가 일만 오천 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헐다면 일만 달란트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러니 왕이 거절했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그 민족이 어떤 민족인지 묻지도 않고 당장 자신의 반지를 빼 주면서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1절을 보면 왕은 “이르되 그 은을 네게 주고”라고 말합니다. 이 말로 인해서 왕이 은 일만 달란트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동양에서는 준다고 덥석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한두 번 사양하는 것이 에티켓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로 쓰기 위해 헷 족속에게 땅을 사면서 땅값을 주겠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몇 번이나 안 받겠다고 사양을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안 받겠다는 뜻이 아니고 그저 거래상의 예절일 뿐입니다.
하만이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다인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면 그것으로 왕에게 바치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다인을 학살하라는 조서가 왕의 이름으로 발행되고 전국에 반포됩니다.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페르시아는 효과적이고 빠른 통신을 위해서 약 8km마다 역관이 있어서 말을 타고 릴레이식으로 소식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악하고 끔찍한 계획이 온 나라에 아주 빠르게 퍼지고 백성들은 근심하며 성은 어지러운데 왕과 하만은 앉아서 술을 마십니다.
하만도 문제이지만 제국을 다스리는 왕도 문제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공의로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만이 제시한 은 일만 달란트에 미혹돼서, 탐욕에 눈이 멀어 판단력이 흐려지고 말았습니다.
통치자는 공의로 다스려야 하며 탐욕으로 인해 불편부당함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날 정부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는 임기 동안에 깨끗하게 생활할 것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하는 것입니다.
탐욕이 사람을 망하게 합니다. 탐욕 때문에 아간과 그의 가족들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탐욕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살면서 물질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 잘못된 일에 동조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멀어져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유혹의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사탄의 역사로 하나님의 백성 유다인들이 진멸을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역졸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급히 나가매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되 수산성은 어지럽더라”고 했습니다.
왕과 하만은 함께 앉아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지만 그들로 인해 수산 성은 어지러워졌습니다. 되먹지 못한 인간 하만에게 ‘너의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라’는 아무 철학 없는 왕의 말 한 마디로 정말 어이없고 기가 막힌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하만이 유다인을 전멸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다인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유다인들은 버림을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거나 혹은 그들을 구원하실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면 사탄이 이렇게 역사할 때 하나님은 뭐하고 계셨을까요? 하나님이 잠시 어디 가서 낮잠이나 주무시고 계셨을까요? 하나님은 광활한 페르시아 제국에 흩어져 사는 자기 백성을 이제 잊으셨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만이 자기 백성을 멸하려는 날짜를 택하는 일에 하나님은 개입하셨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하수에로 왕 제십이년 첫째 달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하만으로서는 페르시아 제국 내의 모든 유다인을 학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고, 그 일을 위해서 특별한 날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이것은 단순이 거사일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선택해 준 날짜를 하사받는 행위였습니다.
그때가 정월이었는데 제비를 뽑아보니 십이월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제비의 결과에 아마도 하만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모르드개와 그 민족을 몰살시켜버리고 싶은데 1년 가까이 그 꼴을 보고 참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유다인들에게 주어진 11개월의 기간은 유다인들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대비를 할 수 있는 기회의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결과였습니다. 학살을 당하게 된 유다인들이 최대한의 말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잠언 16장 33절을 보면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만이 제비 뽑는 일에 관여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이 움직이기 시작하셨다는 하나의 싸인입니다. 절망 가운데서 어찌할 줄 모르는 유다인들에게 그것은 희망의 시작이었습니다.
겨울 동안에 나뭇가지는 모두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 나무에서 다시 잎이 나고 열매가 열릴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봄이 되었을 때 그 나뭇가지 끝에 매우 작은 싹 하나가 났다면 그것은 머지않아 잎이 무성해지고 열매들이 맺힐 것을 보여주는 보증입니다.
온 민족이 진멸을 당하게 된 참담하고 암울한 상황에서 그 학살의 날이 최대한 미루어졌다는 사실은 바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약속하는 새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 소망의 새싹을 많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작은 싹 하나만을 봅니다. 울창한 녹음을 기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씨앗에서 커다란 나무가 나옵니다. 그 작은 씨앗을 커다란 나무와 동일시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적을 때는 세상이 우리를 갖고 놉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탄이 아무리 역사해도 하나님은 사탄보다 강하다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의 새싹
에 3:7-15 / 이정선목사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개업을 하거나 이사를 하면 고사를 지냅니다. 정보화시대를 이끌어간다는 최첨단 기업들이 중요한 행사를 치르면서 돈을 입에 물고 있는 돼지머리 앞에 두고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절을 하는 것을 보면 참 묘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동차를 새로 사면 고사를 지내더군요. 그렇게 고사를 지내는 이유는 물론 사고가 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겠지요. 그들은 과연 누구에게 사고가 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비는 걸까요? 저는 우리나라 무속신앙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왜 돼지머리가 절을 받는지도 모르겠고, 그 돼지머리로 상징되는 숭배대상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그 숭배대상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살던 사람들이 고사를 지낼 때만 절을 하고 소원을 비는 불연속적인 신앙의 행태와 시스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고사에서 절을 받는 그 초월적 존재를 믿지도 않고 염두에 두지도 않고 삽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일이 있거나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는 믿지도 않는 어떤 허구적인 존재에게 고사를 지낸다면 그 요행심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입니까?
어쨌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 밖에 있는 영역에 관해서 어떤 초월자의 힘에 의지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매우 스트레스가 큰 일입니다. 자칫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가는 낭패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결정을 신에게 위임하곤 합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신에게 위임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던 방법이 바로 제비뽑기였습니다. 날짜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한 결정이지요. 우리 사회에서도 이사는 손 없는 날을 택해서 하지 않습니까? 하만으로서는 페르시아 제국 내의 모든 유다인을 학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고, 그 일을 위해서 특별한 날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이 거사일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종교적 세계관과 신앙체계를 반영하는 행동인 것이지요.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신이 선택해 준 날짜를 하사받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때가 정월이었는데 제비를 뽑아보니 십이월이 나왔습니다. 확률이야 12분의 1이지만, 대단히 의미 있는 결과가 아닙니까? 학살을 당하게 된 유다인들이 최대한의 말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만약 유다인이 모두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루라도 늦춰진다는 것은 자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이 11개월 동안 유다인들은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대비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고 했습니다.
하만이 유다인을 전멸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다인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을 것입니다. 제삼자가 보더라도 유다인들은 버림을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거나 혹은 그들을 구원하실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가서 낮잠이나 주무시는 걸까요? 하나님은 광활한 페르시아 제국에 흩어져 사는 자기 백성을 이제 잊으신 걸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만이 자기 백성을 멸하려는 날짜를 택하는 일에도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그 백성을 향한 자비와 연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이 움직이기 시작하셨다는 싸인입니다. 절망 가운데서 어찌할 줄 모르는 유다인들에게 그것은 희망의 시작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이 다가온다는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겨울 동안에 나뭇가지는 모두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 나무에서 다시 잎이 나고 열매가 열릴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봄이 되었을 때 그 나뭇가지 끝에 매우 작은 싹 하나가 났다면 그것은 머지않아 무성한 나뭇잎들과 탐스러운 열매들을 약속하는 확실한 보증입니다. 온 민족이 멸절하게 된 참담하고 암울한 상황에서 그 학살의 날이 최대한 미루어졌다는 사실은 바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약속하는 새싹이었던 것입니다.
헝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 소망의 새싹을 많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까짓 작은 싹 하나를 보고 어떻게 울창한 녹음을 기대할 수 있겠어? 하면서 믿지 못할 때가 많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씨앗에서 커다란 나무가 나옵니다. 그 작은 씨앗을 커다란 나무와 동일시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에요. 꼭 손에 쥐어줘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지요.
우리의 삶이 고달프고 세상이 원망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비록 위기가 닥쳤을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면 우리가 사는 모습이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저도 요 며칠 이런 저런 일들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나의 믿음이 얼마나 적은 것인지 한숨이 나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데,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적을 때는 세상이 우리를 갖고 놉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날 때 세상이 우리를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제비의 결과에 어쩌면 하만은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모르드개와 그 민족을 몰살시켜버리고 싶은데 1년 가까이 그 꼴을 보고 참으려면 그것도 작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쩝니까?
이제 하만은 왕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 일을 꾸밉니다. 주님은 사탄을 가리켜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요 8:44)라고 하셨습니다. 하만 역시 살인을 꾸미며 거짓말을 합니다. 하만은 유다인이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한 민족이 왕의 나라에 흩어져 거한다고 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유대인에게 매우 가혹했지만, 그 뒤를 이은 페르시아는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을 돌려보내 나라를 재건하게 하고, 느부갓네살이 약탈해 왔던 성전의 기물도 돌려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만은 유다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자기들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었습니다. 그것도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한 방어적인 침묵이고 하만의 경우는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악한 침묵이라는 점에서 동일시될 수가 없지요.
유다인들의 법이 만민과 다르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만민과 달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고소를 당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만은 이 팩트에다 자신의 편견과 거짓을 덧씌워서 고소를 합니다. 만민과 다른 법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뭔가 하면 모르드개라는 한 사람이 하만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 한 가지를 어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만의 고소는 모든 유다인이 왕의 모든 법률을 어긴다는 것이지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포로가 되어 끌려갈 백성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렘 4:7). 포로로 잡혀가서 반란 일으키지 말고 평화롭게 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만은 이처럼 거짓말로 살인을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허락을 얻어내기 위해서 뇌물을 씁니다. 왕에게 은 10,000달란트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페르시아 제국의 연간 세수가 15,0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0,000달란트라면 어마어마한 액수 아닙니까? 그러니 왕이 거절하겠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민족이 어떤 민족인지 묻지도 않고 당장 자신의 반지를 빼 주면서 허락을 합니다.
왕이 그 은을 네게 주고 그 백성도 그리한다고 말한 것을 보고 그 은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동양에서는 준다고 덥석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한두 번 사양하는 것이 에티켓이지요.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로 쓰기 위해 헷 족속에게 땅을 사면서 땅값을 주겠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몇 번이나 안 받겠다고 사양을 하지 않습니까?(창 23장) 그런데 진짜로 안 받는 줄 알고 안 주면 곤란하지요. 옛날에 우리 풍습도 그랬습니다. 손님이 오시면 식사 하셨느냐고 묻습니다. 그럼 손님은 먹고 왔다고 대답하지요. 그 말을 듣고 주인은 곧 밥상을 내옵니다. 지금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오해가 쌓여서 인간관계가 이상하게 되겠습니다만, 그것이 옛날의 의사소통 방법이었어요. 왕과 하만의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하만에게 그 은 안 받겠다고 했으니까 하만이 은을 안 냈을까요? 4장에 보면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 기가 막힌 일을 전하면서 하만이 왕에게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수효를 언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그 은을 너에게 준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단 말이지요. 하만이 무슨 돈이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다인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면 그것으로 왕에게 바치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다인을 학살하라는 조서가 왕의 이름으로 발행되고 전국에 반포됩니다.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페르시아는 효과적이고 빠른 통신을 위해서 약 8km마다 역관이 있어서 말을 타고 릴레이식으로 소식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악하고 끔찍한 계획이 온 나라에 아주 빠르게 퍼지고 백성들은 근심하며 성은 어지러운데 왕과 하만은 앉아서 술을 마십니다. 정말 악한 상황 아닙니까? 백성들만 불행하고 불쌍하지 않습니까? 춘향전에서도 탐관오리를 꾸짖는 시가 있지요?
金樽美酒 千人血 금준미주 천인혈
玉盤佳肴 萬姓膏 옥반가효 만성고
燭淚落時 民淚落 촉루락시 민루락
歌聲高處 怨聲高 가성고처 원성고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에 담긴 맛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대에 촛물 흐를 때 백성의 눈물 흐르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 높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해 수고하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것은 정말 축복입니다. 엊그제 국회에서 대통령의 탄핵을 결의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기들이 가진 기득권, 지금까지 누려오던 특권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국민이 탄식하든 말든 나라가 어지럽든 말든 극단적인 일을 저지르는 소위 국민의 대표자들을 보면서 우리 국민도 참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페르시아 제국의 백성들 불쌍한 거야 옛날 이야기라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 우리 국민들의 불행을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불행을 막는 일이 될 것입니다.
민족적인 대위기
에 3:8-11 / 이규왕목사
오늘 설교는 위기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위기란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미국 동부와 중서부 지역에 눈보라를 동반한 겨울 폭풍이 몰아치면서 23명이 숨지고 1백만 가구 이상이 정전 사태를 빚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눈과 얼음을 동반한 겨울 폭풍은 미국 중.남부 지역에서 동부 해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정전 사태를 일으켰고, 항공편 취소나 지연도 잇따르고 있다. 이에 따라 겨울 폭풍 경보가 28일 남부 텍사스주에서 동북부 뉴잉글랜드주까지 내려졌고, 일부 주에서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사망자 대부분은 얼어붙은 도로를 운전하다 발생한 교통사고 관련 희생자로 전해졌다.
가정이나 국가가 없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으며, 설령 존재 할지라도 패전국 백성이나 정치적인 망명자들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불행스러운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행복하려면 돈만 많이 벌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국가의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가 안정되어야만 개인의 평안도 보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부단히 기도해야만 합니다.
(딤전 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더구나 국가의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되고, 졸업시즌이 되었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취업 박람회를 방황하고, 중소기업들이 문을 닫고 도산을 하고, 자영업자들이 빚을 얻어 개업을 했지만 손님이 없어서 하루하루가 걱정과 시름이 가득한 현실에서, 정치가들은 민생과 경제회생을 위한 노력보다는 당리당략에 승부를 걸고, 군사적으로는 북한의 도발이 예상되는 불안한 상황은 영락없는 민족적 대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민족은 무엇을 해야 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모르드개의 자존심
지금까지 우리는 에스더를 통해서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을 물리치고 세워진 페르시아 대 제국의 흥망성쇠가 아하수에로 왕의 손에 의해 좌우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으나 분명히 살아 역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의해 좌우됨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에스더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우리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는 물론 우리 개개인의 행불행조차도 좌우하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페르시아 제국의 부귀영화와 자신의 권세를 만천하에 자랑하려다가 와수디 왕후만 폐위시키는 불상사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포로인 유다 백성 중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출신 에스더가 왕후로 간택되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장된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이 처한 고난을 통해서도 그와 같은 축복을 준비해 주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약소국이요 패전국의 백성인 에스더가 대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로 간택 받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를 포함한 전 유다 백성들의 마음은 한 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바벨론 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자유가 선포되고 위상이 높아지고 페르시아 사람들로부터 사람 대우를 받게 되었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에스더가 유다 출신으로 대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가 되었을 때 그로 인해 유대인들에게는 도리어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그것은 에스더를 친딸처럼 양육하여 에스더를 왕후가 되게 하는 일에 일등공신 역할을 한 모르드개 때문이었습니다.
1) 모르드개의 공로
모르드개는 평소 왕궁을 지키는 시위대원으로 왕을 암살하려던 자객을 색출하여 에스더에게 보고하고 에스더는 왕에게 보고하여 암살범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게 함으로 아하수에로 왕과 페르시아 제국을 위기에서 건져내는 공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에 2:22,23)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23) 조사하여 실증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그렇다면 모르드개는 특진을 하고 왕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아야 하는데 전혀 그런 바가 없었습니다.
정작 공을 세운 사람은 아무런 대접도 못 받고 그 사람을 이용하여 엉뚱한 사람이 상을 가로 채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불공평한 세상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반면에 아말렉 사람 하만은 무슨 공을 세웠는지 모르지만 왕으로부터 총애와 상급을 독차지 하였습니다.
설령 하만이 공을 세웠을지라도 왕의 목숨을 지킨 모르드개 보다 더 소중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상을 받지 못하고 하만은 왕에게 특별한 상을 받았습니다.
(에 3: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
그렇다면 큰 공을 세운 모르드개가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한 일입니까? 그러나 모르드개는 평소와 다름없이 대궐 문 앞에서 묵묵히 왕궁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바람직한 자세인 것입니다.
2) 하만의 분노
아하수에로 왕은 모든 신하들에게 명령하기를 왕에게 꿇어 절하듯이 하만에게 꿇어 절하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로 하만을 총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그것이 왕의 특별한 명령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만에게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모르드개에게 주변 사람들이 왕의 명을 거역하지 말라는 권고를 들었고, 또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만을 무척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3: 5) 하만이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매우 노하더니
여기서 ‘절하지 아니함을 보고’는 미완료로 성문을 지날 때마다 보게 되는 것이며, ‘매우’라는 말은 음식 솥에 김이 가득차서 뿜어 나오며 뚜겅이 열리는 것처럼 분노가 가득한 상태를 가리키며, ‘노하더니’는 하만이 그러한 모르드개의 모습을 볼 때마다 화가 멈추지 않는 미완료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자기 한 사람만 하만에게 무릎을 꿇으면 온 민족이 편안할 것인데 왜 끝까지 자존심을 앞세우고 하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을까요?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만은 유다인들이 미워하는 아말렉 족속 아각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만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그의 내면의 애국심과 자존심과 신앙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 3:4)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
우리가 모르드개의 그러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정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수많은 신앙의 선진들이 투옥을 당하고 매를 맞고 순교를 당한 이유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십계명에 우상숭배를 금하는 계명이 있지만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애국행위라고 호도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사참배가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결정해 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하므로 피해를 당하지 않았는데도,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분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당한 이유는 신앙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사단에게 당한 시험과 유혹도 그와 같은 신앙의 자존심 대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할지라도 빵 한 덩어리와 어찌 바꿀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과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앙의 자존심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보이는 작은 유익을 위해 모르드개와 주기철 목사님들이 지킨 신앙의 자존심을 쉽사리 포기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2. 아각 자손 하만의 자존심
아말렉 자손이요 아각 사람인 하만은 모르드개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자기 민족을 멸시하고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말에 더욱 자존심이 상하여 모르드개만이 아니라 유대인 전부를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싹쓸이 대 청소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하만의 분노는 모르드개 한 사람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전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으로 발전하여 이 기회에 페르시아 전역에 있는 유대인들을 싹쓸이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습니다. 구약 시대 ‘홀로고스트’인 유태인 대학살 사건의 발단인 것입니다.
(3: 6)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여기서 ‘멸한다’는 말은 재기할 수 없도록 파괴하고 근절시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최근 국내적으로는 화황산 산불 사건과 국외적으로는 호주의 산불로 다수의 사상자와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적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산불은 매우 작은 불씨에서 시작이 되어 확산되는 것처럼 하만이 모르드개가 자기를 멸시한다는 불쾌한 감정이 마침내 전 유대인을 말살시키는 무서운 분노로 발전했한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서 공든탑을 무너뜨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혼을 하고, 친구와 원수를 맺고, 심지어 살인까지도 저지르게 되는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사단이 지옥에서 붙여온 불씨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어떤 사람에게 오해가 있고 미움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사안별로 구분해서 생각을 해야지 그 한 가지 때문에 그 사람과 관계된 모든 것을 부인하고 미워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하만은 페르시아 제국 내에 있는 전 유대인들을 진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하수에로 왕의 권력이 필요함을 알고,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이 자기에게 모든 대신들이 절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마치 전 유대인들이 거역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면서 막대한 뇌물 공세를 하면 한 민족을 진멸하자고 막대한 뇌물 공세를 하면서 제안하였습니다.
(3:8)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9)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그들을 진멸하소서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맡겨 왕의 금고에 드리리이다 하니
과연 아하수에로 왕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물론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충성심에 감동을 먹고 조서를 내릴 때 필요한 어인인 도장을 손가락에서 빼어 하만에게 넘겨 줄 정도로 신임을 하였습니다.
(3:10,11)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며 (11) 이르되 그 은을 네게 주고 그 백성도 그리하노니 너의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라 하더라
거짓과 뇌물은 불의한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다 해결하게 하는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만능열쇠인 것입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과 뇌물이라는 사단의 도구에 놀아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잠 17:8)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사 5:23)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과연 이같이 거짓과 뇌물이 통하고 진실과 정직과 신앙이 짓밟힘을 당하는 세상에서 과연 모르드개처럼 신앙의 자존심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이 지혜로운 삶일까요? 아니면 어리석은 삶일까요?
오늘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문제로 갈등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럴 때 어떤 결과물을 보고 마음을 결정하려고 한다면 다 낙심하고 말 것입니다. 신앙을 고집하며 산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거짓과 뇌물을 버리고 진실과 정직과 신앙으로 사는 것이 내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소신이 아니고는 시험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3. 유대 민족이 만난 대 위기
유대인들을 진멸하는 전권을 왕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것을 상징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인장반지(印章斑指)를 받은 하만은 유대인들을 말살하기 위한 대 학살 계획을 매우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하나 하나 진행해 나갔습니다.
1) 대학살 일
하만은 점을 치듯이 어느 날이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날이 좋은지 제비를 뽑아서 먼저 달과 날을 골랐습니다.
(3: 7) 아하수에로 왕 제십이년 첫째 달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아달월 중에 십삼일 하루를 전 페르시아 지역 안에 살고 있는 전 유대인들을 말살하는 날로 정하였습니다.
2) 어인을 찍음
전국 127 도에 왕의 법률로 조서를 내려 어인까지 찍어 보냈습니다. 대 제국이다 보니 각기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각 지방의 문자와 언어로 조서를 내려 빠짐이 없이 유대인들을 살해하도록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렸습니다.
(3:12) 첫째 달 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어 하만의 명령을 따라 왕의 대신과 각 지방의 관리와 각 민족의 관원에게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되 곧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치니라
그러므로 만일 이웃에 있는 유대인들을 죽이지 않는 것은 아하수에로 왕의 명을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3) 학살 방법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명분을 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하만은 유대인들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다 죽이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고 하였습니다.
(3:13)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타락한 인간은 돈 때문에 부모 형제도 청부살인을 하고 불을 질러 죽이는 세상에 유대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탈취하라고 하였을 때 얼마나 신이 나서 죽이겠습니까?
4) 준비하게 함
하만은 그 계획한 일을 급하게 시행하지 않고 미리 시간적인 여유를 준 것은 전국 방방곡곡에 다 전해지기 위함이고 그것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3:14) 이 명령을 각 지방에 전하기 위하여 조서의 초본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여 그 날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라 하였더라
이는 유대인들을 말살하고자 하는 하만의 계략이 얼마나 주도면밀한가? 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모르드개는 무슨 대비를 하였습니까?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무슨 대비를 할 수 있습니까?
하만에게는 대 페르시아 제국의 이인자라는 막강한 권력이 있었습니다. 하만에게는 막대한 돈이 있었습니다. 하만에게는 거대한 조직이 있었습니다.
하만은 무소부재한 지존처럼 보였을 것이고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더욱 무기력하고 무능하게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 때 유대인들의 숫자는 대략 75만 정도로 추산을 한다면 모르드개 한 사람의 자존심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유대인들이 미치광이 하만에게 몰살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유대 민족의 대 위기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백성들은 아무런 대안이 없다는 것은 더 큰 위기인 것입니다.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은 유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어떤 약속이나 신호도 보내지 않고 있으시다는 것은 더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하만의 계략이 통하는 세상이라면 과연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세계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신지 의문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과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유익이 있는지? 회의가 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보아도 아무런 답이 없습니다. 전 유대민족이 하루 아침에 몰살을 당하고 재산을 다 빼앗기게 될 민족적 대 위기의 날이 확정되었을 때 설령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모르드개가 하만을 찾아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애걸을 한다고 해도, 유대 민족이 단합하여 봉기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니느웨 도성의 죄악으로 심판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죄한 12만명의 어린이들을 보시고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75만의 유다 백성들을 버리시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 양심을 가지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라볼 때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심상치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경제위기에 국민들이 고통 받고 있는 상황인데, 여기에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마저 고조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남북 간에 군사적 충돌이라도 발생하게 될 경우, 지금 같은 환경에서는 경제에도 직격탄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관계는 경색의 도를 넘어 군사적인 대결 구도로 갈 수 있는 불안한 징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북한 최고 군수뇌가 직접 군사적 대결을 선언하고, 함경북도 무수단리 미사일 기지에서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2호 발사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거리가 4천300~6천㎞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대포동 2호가 미국 일부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도 긴장을 하고 요격태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편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군사훈련 횟수를 증가하고, 최근 사거리 20㎞의 76㎜, 100㎜ 해안포를 사거리가 30~40㎞로 늘어난 개량된 해안포로 교체한 것으로 알려져 군 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남북 함정 간 충돌이 발생할 경우 북한 해안포로 인해 함정간 교전을 했던 과거 두 차례의 연평해전과 같은 아군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 당국은 북한이 우리 함정을 향해 해안포 공격을 감행했을 경우에 해군 함정은 물론 공군력을 이용한 무력화 방안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만일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고 서해안에서 교전을 벌리게 된다면 어느 편이 이기고 지는 것을 따지기 전에 당장 경제에 대한 불안심리가 확산될 것이고, 국제신인도에도 문제가 생겨 투자가 중단될 것이고 외국자본이 한국을 떠나게 날 것입니다. 그로 인해 누구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가난한 국민들이 받는 고통과 불안은 더 가중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우리들 보다 외신들이 더 걱정을 하는 가운데 경제만이 아니라 군사적으로 6. 25 사변 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이 지금 전혀 두려움이나 염려가 없는 것이 과연 믿음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무지한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럴 때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답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기독교를 비웃고 조롱하는 안티세력이 급증하고, 국민은 정부를 불신하고, 단체들마다 나라와 민족보다 개인의 이권에만 급급하여 집단이기주의가 난무하고, 사회는 폭력과 부정과 불법이 난무한데, 교인들마저 민생고를 빙자하여 교회를 떠나고, 예배와 기도를 소홀히 하는 신앙인의 자존심을 돈이나 명예 앞에 무릎을 꿇고 신앙 양심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더 큰 위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민족적인 대 위기를 만난 유대인들의 소망은 그들의 어떤 노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지켜보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믿고, 단절되고 소홀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돈히 하는 것만이 사는
길이요, 행복의 길임을 오늘 우리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볼 때는 무능력한 것 같고 무책임한 것처럼 보이지만 유일한 희망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 115:1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에스더 강해(3)
에 3:7-15 / 신성주마음교회
에스더가 왕비가 된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을 총리대신 위에 두었습니다.
하만은 그야말로 페르시아 제국의 2인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그의 지위를 통해 모든 대신들 위에 군림하였고, 대신들은 모두 그 앞에 무릅을 꿇고 절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에스더의 삼촌인 모르드개만은 그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하만이 아각의 후손으로 아말렉 사람이기 때문알 것입니다.
아말렉과 이스라엘은 대대로 원수입니다.
그런 민족적인 감정으로 인해 모르드개는 결코 하만에게 절하지 꿇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신앙적인 이유입니다.
사람이든 그 누구에게도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로 간주하기 때문에, 경건한 모르드개는 이를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정확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으나, 하만은 이로 인하여 모르드개에 대한 앙심을 품었고, 그 앙심은 모르드개를 넘어 유대인 전체에게 향합니다.
그래서 하만은 유대민족을 말살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이제 아하수에로 왕을 찾아가는 것으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7절에 보면, 하만은 제비를 뽑아 날을 정합니다.
제비는 히브리어로 '부르'라고 하는데, 훗에 이 날은 유대민족이 하만의 계략에서 구원을 얻은 날이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날을 제비를 의미하는 '부림절'이라고 하여, 기념일로 지킵니다.
본래 이 날은 하만이 유대인을 몰살시키로 한 날입니다.
그리고 하만은 이제 아하수에로 왕의 허락을 받아냅니다.
8절에 보면, 하만은 왕의 법률을 따르지 않는 민족이 있다면서, 그들을 용납하면 무익함으로 조서를 내려 진멸해야 한다고 주청합니다.
그리고 9절에 자신이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금고에 넣겠다고 말합니다.
이 정도 금액이면 페르시아의 일년 예산의 2/3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 일을 시행하기 위한 예산을 본인이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유다를 진멸하기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10-11절을 보면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제안을 옳게 여겨서 자신의 반지를 빼어 하만에게 주며 그 은과 그 백성도 하만에게 준다고 하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만은 이렇게 왕의 재가를 얻어낸 후에 유다인 진멸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켰습니다.
12-15절에서 이제 왕의 서기관들이 하만의 명을 따라 소집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다인 학살에 따른 세부 조서를 각 도의 문자와 각 나라의 방언으로 작성하여 왕의 반지로 인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 조서를 페르시아 각 도에 보냈습니다.
그 조서의 내용은 앞으로 11개월 후인 십이월 곧 아달월 십 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재산까지도 다 탈취할 것을 허락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에스더의 말씀에서 보지만, 우리는 하만의 유다인 학살명령의 공표와 관련해서도,
역시 이 일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다인 학살 일자의 확정 배경입니다.
7절에서 하만 일당은 유다인 학살일자를 제비뽑아 결정했다고 저자는 기술하였습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그들이 제비뽑아 결정한 그 날과 달은 아달월 십 삼일이었습니다.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으로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허락 받은지 11개월 후입니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이 하만이 건의하고 곧바로 학살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 기간이 11개월의 기간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시 하만에 의해 사건의 진행이 급박하게 진행되던 것을 감안한다면 11개월의 기간은 상당히 긴 시간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하만의 입장에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입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제거함으로써 후환을 남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일에 깊이 개입하고 간섭하시며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잠언 16:33절을 보면,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만은 측근들과 작당해 유다인을 진멸하는 일을 계획했습니다.
서둘러 그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그러나 제비 뽑아 결정한 날이 11개월 후로 잡혔습니다.
이것이 유다인에게는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하는 잔인한 날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조서가 반포된 이후에 유다인들은 물론 평소에 유다인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이방인들에게도 이 사실은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15절, "역졸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급히 나가매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되 수산 성은 어지럽더라"
왕의 조서로 인해 수산 성이 어지럽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만 보면 하만의 계획은 성공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만은 얼마나 의기양양했겠습니까?
'이제 내 계획 되로 된다. 다 성공한다.' 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받는 배후에는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많은 경우에 고통과 핍박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들이 인생에 대한 태도를 진지하게 만드시고, 그들 삶을 돌아보게 하시고 깨끗케 하십니다.
그러니깐 결국 사단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적인 능력으로 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만 역시 결국에 실패하고 맙니다.
시편 2편을 보면 이 혼란스러운 세상, 악마의 계교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 그래서 악인들이 웃고 통쾌하게 앉아서 술을 마실 때 하늘의 하나님이 그들을 비웃으신다고 말씀합니다.
백성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기 위해서 사단은 하만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은 이 역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시고, 결국 승리를 주십니다.
어떻게 보면, 에스더 3장의 내용 자체는 참으로 암울한 이야기입니다.
악한 자가 모든 것들을 성공시키고, 자신들의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아마 에스더 3장에서 이야기가 끝났으면 아마 우리는 절망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는 계속 진행됩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악인이 잘 되고 형통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에스더서의 결과를 알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에스더 3장의 암울한 상황이 끝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듯이,
우리 인생 역시 지금 악인의 형통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궁극적으로 의인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라도 소망을 잃지 않고, 인내로 이 믿음을 잘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하나님이 승리케 하십니다.
이 사실을 온전히 믿고 신뢰함으로, 악한 세상에서 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신마저 활용하시는 하나님
에스더 3:7-15
“무리가 하만 앞에서 ...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3:7)
종족간의 뿌리 깊은 원한 위에 개인적 저주까지 보태어 하만은 유대인 전부를 진멸할 날과 달을 제비로 뽑았다. 미신에 의존하는 불신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재수가 좋거나 나쁜 날자가 따로 있다는 즉, 좋은 날을 주는 좋은 신과 나쁜 날을 주는 나쁜 신이 있다는 생각이다. 세상만사를 선악 간에 나눠 각각의 통치자가 있다는 이원론은 완전히 반기독교적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가 부인되고 또 매일 매일이 새롭고 아름다워질 수 없다.
그런데 첫째 달에 제비 뽑았는데 살육을 실행할 날짜로 열두째 달이 걸렸다. 근 일 년이나 후다. 하만은 철저한 계획을 세워 철저하게 진멸할 여유가 생겼다고 좋아할 것이며, 유대인들은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 눈물로 지샐 시간만 더 길어졌다고 실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생각과 계획을 갖고 있다. 그분의 길과 생각은 우리의 것과 다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민족을 구원할 방안을 모색하여 실행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하만은 왕에게 한 민족이 왕의 법령을 어기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따르는 법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고 교묘하게 보고했다. 왕은 가뜩이나 여러 종족이 제국 안에 있어서 원만한 통치가 아쉽고 또 암살 모의까지 있었으니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도무지 묵과할 수 없었다. 하만이 좋을 대로 행하라고 했다. 하만이 믿고 있는 미신의 능력(?)이 참으로 묘하다. 차라리 그런 미신을 믿지 않았다면 날짜를 뽑을 것도 없이 왕에게 재가를 받아 곧바로 진멸계획을 시행할 수 있었지 않겠는가? 미신을 믿는 바람에 일 년 후에나 시행하게 되었다. 자기로선 최고의 길일(吉日)이라고 믿고 있는데 거꾸로 최악의 흉일(凶日)이 될 판이다.
이 조서로 인해 수산 성 전체가 어지러워졌다.(15절) 여러 족속들에게 왕을 거역하면 엄한 벌을 내린다는 계몽 효과를 기대했는데 거꾸로 왕이 아니라 하만에게 밉보이면 어떤 민족이라도 성하지 않겠다 싶으니 왕에 대한 불만만 커지는 역효과가 났다. 다른 종족들도 이 사태로 유대인 전체가 죽을 일이 결코 아님을 알고 있었다.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법-모세의 시내산 율법을 갖고 있어도 왕에게 거역한 적이 없다. 그들은 율법대로 거룩하게 살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는 바람에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비록 이방 땅이지만 늦게나마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한 세대 전의 다니엘처럼 타민족들에게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하만의 모의는 전부 자기 생각과 반대로만 진행되고 있다. 어리석은 하만은 사태가 흘러가는 실상은 전혀 보지 못하고 유대인을 진멸할 생각에 그저 신나 있었다.
반면에 유대인, 모르드개, 에스더가 크게 실망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로 눈물로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하게 만들었다. 그 전에 이방인들의 미신인 제비뽑기에마저 개입하심으로써 당신만의 방식으로 유대인들의 구원을 이미 시행하시는 중이다. 그분의 광대하심 오묘하심 정밀하심은 어리석은 인간의 예상 기대 아니 상상을 넘어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다. 인간은 그분을 아는 만큼만 자신을 그분께 맡길 수밖에 없지만 그분을 절대 온전히는 알 수 없다. 그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믿음으로 온전히 맡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