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빨리. 꺼져. 못난이 주제에 사겨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신경 거슬리니까. 꺼져줘”
“....아...아..알았..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돌아선다.
도대체 앞으로 가고 있는 게 맞는 건지 정말 답답해서.
김혜진과 계속해서 사귀다가 아마, 제 명에 못 죽지 싶다.
얼른 쫑을 보던가 해야지.
##
3일전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지금 이 순간의 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전화는 동창회가 있으니 나오라는 것이었다.
철없던 중학교 시절-물론 어른들이 들으면 지금도 철이 없다 하겠지만-
나에게 처음으로 설레임이란 낯선 감정을 알려 준 한 미소.
나왔을까?.............나왔겠지?
나는 첫사랑을 볼 생각의 나름대로의 부푼 가슴을 안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시 작업이나 들어가 볼까? 하는 흑심을 품고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내 첫 사랑은 중학교 3학년 때다.
솔직히 다른 애들보다는 조금 늦은 편이었지만 내가 눈이 워낙 높았기에.
미소를 처음 본 건 체육대회 날.
짧은 치마를 입고서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난 슬쩍, 말을 붙였고, 그녀는 날 알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내가 건 내 준 음료수 하나가 계기가 되어 사귀게 되었지만
그다지 오래 가지는 못했다.
졸업을 하게 됐으니까.
우리는 서로 다른 학교를 배정 받았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사랑의 공식에 의해 우리는 헤어졌다.
“어머?! 현철아! 가끔 니 얘기 듣기는 했는데, 정말 소문대로네”
“소문이 어떻게 났는데?”
“엄청 멋있어 졌다고!! 중학교 때도 인기 꽤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날 알고 있는 듯한 기집년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두 눈이 하트로 변한 게 완전히 나한테 뽕 갔구만.
슬쩍 내 팔짱을 끼며 붙어오는 그 애를 살짝 밀어내고 쓰윽 한번 둘러봤다.
아직 미소는 안 온 거 같았다.
으음.....어떻게 변했을까?......... 더 예뻐졌겠지?...
“미소는?”
“미소? 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 왔나 보다. 그보다, 너 여자친구 있어?”
“여자 친구? 글쎄”
“뭐야, 애매하게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순간 얼간이의 얼굴이 떠 올라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명색이 지금 현재는 여친이라 그런가?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없다고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나는 여자친구가 없다는 대답 대신에 속으로 나이쓰는 외쳤다.
더! 더 예뻐진 미소.
아니, 예쁘다는 말보다 이제 아름답다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웨이브를 준 머리와,
파란 렌즈로 신비해 보이는 눈.
새초롬한 입술.
노란 가디건을 걸치고도 발랄함과 섹시함까지.
게다가 마냥 얘 같았던 중학교 때와는 다르게 은근히 성숙미까지 풍겨 오고 있었다.
하긴 요즘 강산은 10년이 아니라 3년이면 변한다고 하니까.
100점 만점 87점!!
나는 내 옆에 붙어 있던 여자 얘의 팔을 띄어 내고서
미소에게 다가가기 위해 머리를 슬쩍 만졌다.
거울이 있으면 좋으련만.
“한미소!”
“어? 현철아! 오랜만이다.”
“그래, 오래..ㄴ....”
‘툭-!!’
“어머?!!”
“.......죄....죄...죄..죄송합니다...”
“너 혹시 혜....”
“김혜진!!!”
“...혀..혀..현철아...”
난 내 인생 최대의 실수를 꼽으라면 김혜진과 사귄 것이라 서슴없이 답할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분위기의 산통을 깰 수 있냐고!!
미운 짓말 골라서 하냐? 넌!!!
아씨- 작업 들어갈라 그랬는데.
“아..아는 사이 야, 현철아?”
“어, 그냥…ㅊ..ㅣ..”
“현철이 여자친구예요”
“..미소야...그게 아니...”
“아, 그렇구나”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슬쩍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래 사실 이 상황이, 아니 내가 얼마나 웃기겠는가.
이런 바보 얼간이 같은 얘와 사귄다고 하면 말이다.
분명 미소가 날 우습게 볼게 분명해!
진짜!! 김혜진!!!
“현철이 너무 멋있어져서 작업 들어가고 싶었는데, 여자친구가 있다니까 안 되겠다”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해 빨개진 얼굴의 미소.
진짜 내가 정말 쪽팔려서!!
“따라와!! 김혜진!!!”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냥 무작정 혜진을 끌고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그 자리에는 나타난 거냐고?!!
이미 다 망가져 버린 작업에는 관심을 잃은 지 오래 였다.
어차피, 미소 여자야, 찾아보면 널려 있을 테니까.
내가 화가 난 건 이 바보 얼간이 때문이다.
으으...쪽 팔려...
이 얼간이가 내 애인이라고 말하는 순간
날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친구들의 눈을 잊을 없을 것이다.
아마 평생.
진짜, 내가 김혜진하고 오늘 끝장을 내고야 만다!
나는 큰 소리를 내도 쪽팔리지 않는 구석진 곳으로 혜진을 끌고 갔다.
“김혜진”
“.....으...으..으응..?....”
“우리 이만 끝 하자”
“...뭐...뭐...?..!!...”
“니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씨팔!! 쪽 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고!!
너랑 나랑 사귄다고 말을 해!! 장난 인 거 몰랐어?!!!”
“..혀...혀.ㄴ..처..라......”
“너 말 더듬는 것도 짜증나고, 그 얼간이 같은 표정도 싫어.
무엇보다 넌 나랑 너무 안 어울려!! 어차피 뭐 사귄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 끝내”
난 김혜진를 두고 뒤돌아서 걸었다.
아마 울고 있겠지? 놀래서 주저앉아 버렸을지도 모르고.....
내일 학교에 안 나오는 건 아닐까?
쳇! 이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이라니 아무렴 어때 나와 상관도 없는 일인데.
나는 계속해서 잘 한거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홀가분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김혜진이 길을 못 찾아, 밤새 거기를 헤매던 말던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닌 것이다.
계속해서 느려 지려는 발걸음에 가볍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금 화려한 솔로가 된 나를 위해 핸드폰을 꺼내, 여자 얘들의 번호를 찾아 뒤적거렸다.
나는 이제 자유로이 인생을 즐기면 되는 거다.
##
“어? 김현철? 니 그림자는 어쨌냐?”
“그림자?”
“그래, 너 맨날 졸졸 따라다니던”
“찼어. 내가”
“새끼, 그동안은 딴 여자 안 만나고 걔 하나랑만 놀길래, 맘 잡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냐?”
“내가 언제 새끼야. 하도 귀찮게 하길래 그냥 몇 번 상대해 준거뿐이야”
“아, 그러셔. 그래도 나는 폭탄이긴 하지만 재수씨로 모셔줄라 그랬지.”
“쌩 지랄을 한다. 가던 길이나 가라”
김혜진과 헤어 진지 삼일 째.
홀가분하고 시원하다.
뒤에서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누군가가 없다는 것은,
어색한 손놀림으로 내 마이 붙잡으며 “혀..혀..철아...가치.가....”
하고 말하는 누군가가 없다는 것은,
.....참...........속 시원한 일이었다.........좋았다....
“야! 너 왜 계속 뒤는 돌아 봐?”
“아니, 아니야.”
“혹시 작업 걸 발견??”
“아니야, 새끼야”
“...흐음...수상해. 너 요새 맨날 넋 놓고 있잖아.”
“내가 언제?!”
“..........너 설마......”
“서...설마 ...뭐?!!”
“너, 죽을병 걸렸지?! 그치?! 죽을 때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 데, 내가 조의금은 넉넉히 내마”
“..................”
“야! 야! 너 진짜 왜 그래?”
“.........뭐가..?..”
“왜 계속 뒤를 돌아 보냐고?”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냐?”
“형님이 아까 말 할 때 뭐 들었냐?! 이 형님이 특별히 넓은 아량으로 소개팅 시켜 준다니까!”
“..아....그래....뭐?!! 소개팅?!!!!”
“지랄을 해라. 왜 소리는 질러 미친 새끼야!”
“나 간다”
“야! 야! 김현철!!”
나는 잽싸게 뛰어가 버렸다.
소개팅이라니, 그런 걸 해서 뭘 하란 말인가.
어차피 김혜진이 와서는 다 해방 놓은 텐데.........
...............아...끝냈었지....우리...
그래서 가로등 뒤에도, 나무 뒤에도, 벽에도 아무도 없었구나....
돌대가리 김현철.....잊고 있었잖아....
집에나 가야겠다.
-철컥-
현관 옆에 달린 거울에 내 모습이 비췄다.
축 내려 앉아 머리에, 저저분한 교복.
모든 게 귀찮다.
아침마다 머릴 세우려고 드라이 하는 것도
모두 다 귀찮다.
“현철아, 들어 왔으면 인기척을 내야지! 그리고 그 교복 꼴은 뭐니?
엄마가 아침에 와이셔츠 빨아 놓은 거 못 봤어?”
“알았어. 나 들어 간다.”
“어머? 쟤가 왜 저래”
침대에 철퍼덕 들어 누웠다.
등에 배겨오는 딱딱한 느낌.
엄마가 방 정리를 했는지, 방안이 깔끔했다.
왜 이렇게 답답한 건지.
내가 그동안 사귄 얘들과 찍은 사진을 모아 둔 앨범이 보였다.
킥, 내 자랑 거리 였는데.
꺼내 들어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그 얼간이와 찍은 사진은 없다.
맨 마지막에 들어 있어야 할 사진........
“아! 그걸 어디다 뒀지?!”
깔끔히 정리해 둔 방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보면 분명 한 소리 하기겠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씨! 분명 버리지는 않았는데!!........아! 혹시!!”
나는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을 드려다 보았다.
한참을 뒤적거리다 여기도 아닌가 싶어 포기하고 일어서려는데, 반짝거리는 무언가.
“찾았다!”
나는 재빠르게 포장을 풀고서 그것을 목에 걸쳤다.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
이것은 혜진의 우리가 50일이 되었다면 준 선물이었다.
혜진은 그날 오늘, 꼭 같이 가자고 문자를 보냈지만, 난 친구들과 놀러 가버렸고,
다음날, 혜진이 직접 우리 반을 찾아와 준 선물이 이것이었다.
답답하던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어질어진 방안이 눈에 들어오지만 난 편안히 침대에 누웠다.
##
“야! 김혜진 못 봤냐?”
3일 동안이나 무단결석을 해가면서 내린 결론이
고작 이거라는 사실이 나도 이해가 안가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보 얼간이 김혜진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그래도 명색이 여친이었는데,
반도 모르고 그녀의 친구들 중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물론 절대 내 탓이 아니다.
바보 얼간이 같은 김혜진 책임이지.
“현철이 니가 김혜진을 왜 찾아?”
“봤어, 못 봤어?!”
“걔 3반이잖아. 왜 여기 와서 찾으면서 그래”
“3반? 알았어. 고맙다.”
“김현철~~~ 걔는 왜 찾는데!!!”
하여튼 기지배가 목청만 좋아가지고,
나는 김혜진이 몇 반인지 가르쳐 준 그년이 소리를 지르던 말던 무작정 뛰어 3반에 도착했다.
내가 생각했던 거 보다 내 다리를 휠씬 빨랐다.
“김혜진, 나와!!”
혜진은 자리에 앉아 샤프를 끄적이며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일주일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
양 갈래로 따아 내린 촌스런 머리에 얼굴의 반은 다 가리는 큰 뿔테 안경.
애가 어른 옷을 입은 것처럼 큰 교복.
어쨌든 내 이별 선언이 별로 충격적이지 못했는지, 혜진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하나도 반갑지 않다.
“김혜진”
“.....기..ㅁ..혀...혀.....”
“설마, 내 이름도 그새 잊어버린 거냐?”
“....아..아..아.니 ....현..철아...나..나안.......”
“뭐, 그거야 어쨌든 상관없고! 일단 따라 나와!”
나는 혜진이네 반을 찾아 뛰어 올 때처럼
또 그렇게 무작정, 아무 생각 없이 혜진을 끌고 교문을 벗어났다.
처음 잡아 본 그녀의 손목을 생각보다 얇았고,
처음 만져 본 그녀의 피부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어쩌면 80점 대는 아니더라도, 70점 대 정도로는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꽤 작고, 몸도 호리호리 한 게, 몸매도 꽤나 좋은 거 같다.
“..자...잠깐..만!!..”
혜진의 손을 잡고 있는 느낌이 꽤 괜찮았기에, 절대 좋았다는 건 아니다!!!
손을 뿌리치는 혜진을 인상을 쓰며 노려봤다.
그러자, 그런 내 시선에 쫄은 건지
뿔테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그 눈을 아래로 깔아 버린다.
뭐야.....생각....보다는........귀엽네......
“왜?”
“...우리...무..단....이탈......”
“상관없어. 선생들이 뭐라 그럼 나한테 납치당했다 그래! 됐지?”
나는 그래도를 외치며 버팅기려는 혜진의 팔목을 확 잡아끌었다.
“누나, 얘 머리 염색 좀 해줘요. 자연스럽게, 매직도 해주고”
“......저...저기...염색은.....”
“그냥 천연이라고 우겨”
혜진의 곱슬 거리는 까만 머리를 자연스런 갈색머리로 바꿔주고,
꼭 어른의 옷을 입혀 놓은 것 같은 교복을 다시 맞춰 주고,
어디서 구한 건지도 모르겠는 그 뿔테 대신에 렌즈를 해주고,
어울리지는 않지만 뚫어져 있는 귀에 귀걸이를 끼워 놓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혜진을 한참을 끌고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새까만 밤이다.
정말 김현철.
엄청나게 거금을 쓴 날이었다.
통장 하나를 깼다
엄마가 알면 난리 나겠지만 오늘 아침보다 기분이 훨 나았다.
그리고 김혜진도 이정도면 내 옆에 붙어 다니게 해도 괜찮을 듯 싶고 말이다.
나는 내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에 느낌에 미소를 지었다.
“.....저....저..저기....현철아...근데...이...이..이..거 왜 한 거야?...”
저 답답한 말투만 아니면 더 좋을 텐데.
외모만 바꿨지 속안은 바보 얼간이 그대로였다.
더듬거리는 말투,
눈을 쳐 다 보지도 않고 몸을 베베 꼬며 말하는 저 멍청함.
그리고 대인 기피증이라도 걸린 것인 벌벌 떠는 모습.
“더듬거리지 말고 말해봐”
“...으..으..응?...”
“더듬거리지 말라고!”
“...아...아..아...라..써...”
“따라 해! 알.았.어”
“...아....아...아..라.....써...”
“알!!았!!어!!”
“...아..아...라..써...”
“씨팔! 말 더듬지 말라고!”
“.....응!”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혜진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세어 나왔다.
작은 바람에도 살랑거리는 머리칼을 나도 모르게 쓰다듬어 버렸다.
손에서 사르륵 하고 빠져나가는 감촉이 꽤나, 아니 엄청 맘에 들었다.
혜진에 동그란 시선에 금새 손을 내려 버리고 말았지만.
“이제 말 더듬으면 죽인다”
“..응”
“대답도 바로 바로 해. 한 박자 쉬고 하지 말고!”
“알았어”
“그리고 딴데 보지마! 얘기 할 때 사람 눈을 봐야지 도대체 어딜 보는 거야!!”
“..으응...그럴게..”
“말 더듬지 말랬다”
“응. 안 그래. 지..진짜야..”
“그리고 이제 계속 내 뒤에 쫓아 다녀도 돼”
“..무...ㅓ..무.ㅓ..뭐....라..고..?...”
“말 더듬지 말랬지?!!”
“아!...응...”
“따라 와. 밥이나 먹으러 가자”
“..으..으...응......저....저기...근데...혀..철아...”
“더듬지 말랬다. 왜?”
“그...목걸이...말이야.....”
“...이...이거? 그냥...하..할게..없어서...그래! 할게 없어서 한거야! 씨팔! 따라오기나 해!”
##
“...김..김혜진! 오늘 시간 있어?”
“응?”
“오..오늘 시간 있냐고?”
“없어!”
“김현철! 니가 왜 끼어들어? 너한테 물어 본거 아니다”
“없다면 없는 줄 알아. 혜진이 나랑 영화 보러 가기로 했어.
너한테 쓸 시간 같은 거 없으니까, 꺼져”
“지랄을 한다. 김혜진이 니꺼냐?”
요즘 들어 유난히 김혜진한테 깐죽 되는 새끼들이 많아 졌다.
난 중요한 사실을 하나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김혜진은 다른 사람 눈에도 예뻐 보인다는 걸.
어디서 저런 별 볼일도 없는 새끼들까지 누굴 넘보는 거야?!
아무래도 이 얼간이의 반응을 봐서는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시간 있냐고 물은 그 싸가지와 나 사이에서
어중간히 서 있는 혜진을 한쪽 벽으로 밀치고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입술을 맞대기 전까지만 해도 내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그냥 막무가네였지만
막상 부드러운 그녀에 입술에 닿고 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래도, 김현철 하면, 키스 테크닉으로 알아줬는데, 젠장-!!
갑자기 너무 급하게 뛰는 심장 때문에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김혜진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키스 할 땐 눈을 감아야지...”
입술을 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김혜진의 눈꺼풀을 내려 준 뒤,
다시 입술을 맞댔다.
긴장을 했는지 입을 꼭 다물고 굳어 버린 혜진의 입술을 부드럽게 훑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팠는지, 혜진을 작은 신음소리를 뱉어내었고, 그것을 절대 놓칠 내가 아니었다.
키스가 처음인 거 같은 그녀의 입안을 부드럽게 헤집고 다녔다.
그에 놀랐는지, 물러 날 곳이 없는데도 뒤로 물러나려 훔찔 거린다.
글쎄, 언제 한번 이렇게 황홀한 키스를 해 본적이 있었던가,
이름난 바람둥이 킹카이니만큼, 꽤 많은 연애를 해봤고, 당연히 첫 키스가 아니었다.
그리고 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다.
상대방에 여자가 키스를 전혀 못 해서 내 혀가 입으로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그애의 입 안을 헤집자,
그제 서야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그때는 짜증스러움이 밀려와 바로 입술을 떼어버렸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그런 혜진이 귀엽고, 또 사랑스럽다.
다만 상대가 혜진으로 바뀐 것뿐이데,
그 느낌은 180도로 다르다.
한번도 맛보지 못한 황홀감에 빠져 있다가 숨이 차 하는 혜진을 느끼고
아쉽지만 입술을 떼었다.
그러고 나니, 내가 왜 혜진에게 키스를 했는지 생각이 났다.
그대로 굳어버린, 그 싸가지와 주의에 사람들.
“이 정도면 내가 상관할 이유 맞지?”
굳어서 아무 말 못하고 있는 그 싸가지를 한번 비웃어 주고는 혜진을 끌고 그곳을 벗어났다.
아직도 심장이 뛴다.
복도를 벗어나 운동장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다시 화가 났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바보 얼간이.
힘들게 예쁘게 만들어 놨더니, 그 은혜도 모르고 웃음을 셀셀 거리며 흘리고 다닌다.
내가 지 말 더듬는 거 고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 대인기피증 고쳐 주려고 얼마나 노력 했는데...
바보 얼간이....
“너 앞으로 웃지마!”
“응? 왜?”
“왜 긴 뭐가 왜야!! 웃지 말라면 웃지마!!”
“어떻게 안 웃고 살아 사람이”
“너 그래서 지금 내 말대로 못하겠단 말이야?!! 웃지마!!”
“싫다니까! 좀 말이 되는 소릴 해!”
“김혜진!!!!!!!!!!!”
정말 은혜를 원수로 갚는 다더니,
예전 같으면 내 말에 한마디 반박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혜진이 일일이 토를 달며 따져댔다.
자기 때문에 타 들어 가는 내 타는 속은 하나도 모르는 얼간이.
이제 예쁜 게 좋다는 말은 다 취소다!!
이건 지네 주제도 모르고 매일같이 흑심을 품을 놈들이 껄떡되니, 정말 미칠 노릇이다.
그래, 정말 처음에는 좋았다.
예뻐진 그녀를 보면서 내가 바꿔 놓은 거란 생각에 흐뭇하기도 했고,
같이 다녀도 조금도 쪽 팔리지 않는 다는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지기도 했다.
But!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김혜진은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녀의 주변 놈들이 변했다.
난 아주 중대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다.
내 눈에 예뻐 보이는 녀석은 남들 눈에도 예뻐 보이리라는 것.
그렇지만 딴 애인들처럼 별로 신경 쓰이지 않을 줄 알았다.
예전에도 그랬으니.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매일 같이 찾아와 나와 녀석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하는 악의 무리들!
지금도 여전히 숫기가 없는 녀석 때문에 나를 통해 전해지는 그 수많은 선물들과 러브레터.
내가 중간에서 끝없이 가로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은 전혀 줄어들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혜진을 딴 놈에게 빼앗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날 활활 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만나던 것을 5일에 한번,
다시, 그것을 3일에 한번으로,
2일에 한번,
이제는 한시도 떨어져 지내지 않는다.
매일 집 앞으로 데리러 가고, 다시 데려다 주고, 일요일에도 절대 빼 놓지 않고 만나고,
그렇게 헤어지고도 하루에 10번 이상 전화하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예뻐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비례해 혜진의 추종자들도 점차 숫자를 늘려 가고 있다는 것이다.
“머리 염색해”
“응?”
“머리 다시 검은 색으로 하라고!”
“왜, 이상해?”
“그래! 이상해!! 지금 보는 것도 역겨워 죽겠으니까 얼른 바꿔!!”
“그..그 저..정도로 이상했어? 그...그럼...지..진자..ㄱ..말하지...”
현철은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말 더듬는 저 답답한 모습까지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이다니...
“안경도 다시, 예전에 그걸로 써. 안 어울리니까”
“...으..으응...”
“옷도 좀 얌전히 입어. 몸에 쫙 달라붙어서는!! 니가 날라리냐?!!”
“...나..날라...리...같....아..?..”
“그래! 단정히 좀 입어!”
“...아..아....아..라.....써...”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혜진을 보면서 그렇게 흡족할 수가 없었다.
시대 지난 뿔 테 안경에,
촌스럽게 딴 검은 머리.
헐렁한 교복
그리고 조금 더듬는 말투까지.
하지만 지금도 혜진이 예뻤던 그때처럼, 현철과 혜진이 길을 지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따른다.
혜진의 화려한 외모 때문이 아닌, 어울리지 않는 커플에 대한 황당함 때문에.
하지만 그 시선이 매우 만족스러운 현철이었다.
“혜진아, 배 안 고파? 우리 리치 골드 먹으러 갈래? 그거 먹고 싶다고 했잖아”
“...리치 골..드..?...그..그래..가자...”
“아유, 우리 혜진이 오늘 무지 예쁘네, 어! 이 시계 산 거야?”
“으..응...시계가 없어서...”
“나 한테 말하지. 내가 예쁜 걸로 사줬을 텐데. 하긴 이것도 예쁘다.
우리 혜진이한테 안 어울리는 건 없으니까..”
“...거..거짓말..하지마...ㅡ///ㅡ”
“거짓말이라니!! 난 거짓말 같은 거 절대 못해!! 우리 혜진이가 제일 예뻐!!
아, 우리 혜진이 작게 만들어서 내 주머니에 감춰 놓고 싶다..”
“ㅡ////ㅡ”
혜진은 현철의 바람대로 더 이상 고백도 받지 않고,
사람들이 들러붙지는 않는 예전의 못난이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현철에게 더 이상 혜진의 외모나 겉모습은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 현철은 알았다.
혜진이 없어 어색하고, 이상하고, 기분 나쁘던 그 시간들의 이유를
김현철은 김혜진을 사랑한다.
못난이 김혜진도 아니고, 예쁜이 김혜진도 아닌,
그냥 김혜진을 김현철은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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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에이드요”
“네, 잠시만기다리세요”
“여전하네, 카페 오면 메뉴판도 안보고 체리에이드하고 말해 버리는 그 습관”
“습관은 잘 바뀌는 게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한미소, 니가 김현철 첫사랑이라니, 매우 유감스럽다”
“미친년,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작업 들어갈라 그러다 참아 준 것도 감사해야지 키키”
“작업 들어가기만 했어봐, 너는 내 손에 죽었어”
“이야~ 김현철도 대단하다. 김혜진 한데 이정도 집착을 끌어내고”
“시끄러워”
“킥, 근데 김현철이 니 실체를 알면 가만히 있으려고 할까? 잘은 몰라도 엄청 난리 날걸?
그렇다고 이 시대 최고의 바람녀, 퀸카 김혜진이 그 못난이 모습으로
평생을 지낼 수 없는 거 아니야. 키, 이제 어떻게 할거야? 처음 계획대로 뻥! 차버릴 꺼야?”
”아니”
“그럼? 그렇다고 난 원래 이 모습이 아닌데,
너 꼬셔서 골탕 먹이려고 일부로 너한테 접근했다. 사실은 니가 생각하는 못난이에,
부끄럼 많은 성격이 아니라, 잘 놀고, 전학 오기 전에도 알아주던 퀸카였다. 이렇게 말할래?”
“킥, 미쳤냐. 그랬다간 아마 김현철 날 죽이려고 들걸? 물론 끝내자고는 안하겠지만”
“왜, 어떻게 알아. 걔 성격상”
“아니, 네버. 김현철은 날 사랑하거든. 절대 그렇게는 못해”
“오오...오랜만에 보는 저 프라이드. 진짜 죽이고 싶다.
진짜 근데, 너 내가 봐도 너무 심한 거 알지? 나 처음엔 너 아닌 줄 알았잖아.
잘 나가는 김현철이라는 놈 소식 듣자마자, 꼬셔서 콧대를 납작하게 해준다고 하더니,
그 못난이 모습으로 나타난 널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원래, 그런 거다. 사람은 자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호기심이 생기는 법이거든.
난 김현철의 호기심을 끌고 싶었을 뿐이야. 그리고 그 다음이야.
못난이 김혜진이라도, 내 테크닉에 안 넘어 가는 사람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