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명사들이 말하는 '어머니가 생각 날 때'
자식의 운명은 늘 그 어머니가 만든다 -나폴레옹
물과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 사람들은 어머니란 존재를 잊고 산다.
사춘기를 벗어나 한 사람의 어른이 된 다음에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누구나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 한순간
머니의 존재를 떠올리고 그리 워하는 때가 있다.
어머니가 남긴 사진이나 유품,
그들이 사랑했던 작은 들꽃, 좋아했던 음식 등을 우연히 접했을 때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위기 상황 이나 세상으로부터 배신당해
누군가 위로받을 사람이 필요한 순간에도 그렇다.
우리 시대를 함께 하는 명사들의 입을 통해 들어본다.
“어머니는 내가 막내였기 때문이었겠지만 나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셨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가끔 갈등을 느꼈다.
다시 말해 어머니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 것이다.
그럴 무렵 학병에 끌려갔다.
그런데 학병에 끌려나가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배 위에서였다.
그 때 우리가 탄 배는 미군 잠수함에게 어느 순간 어뢰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갑판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 때 불현듯이 어머 니가 보고 싶고 그 품에 안겨 죽고 싶다는 마음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 서중화 여사는 성품이 곧고 거짓과 불의를 용 서하지 않는 분이었다.
특히 남편이 세상을 뜬 후에는 자식교육에 더 욱 엄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 추기경은 무엇보다 만주로 떠난 또 다 른 아들을 찾으러
세 차례나 만주 벌판을 헤매고 다녔을 만큼 자식 사 랑이 지극했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자식 사랑 덕분에 신부가 될 수 있었고 참신앙인이 될 수 있었다는 고백이다.
코스모스처럼 키 가 후리후리했던 서 여사는 1955년 3월에 일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고 한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또 늘 떠오르는 것이 새벽의 빈 이부자리다.
새벽에 설핏 잠에서 깨 옆을 더듬어 보면 어머니의 이부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어디 가셨나 문을 열어 보면 마당에서 물 한 그릇 앞에 놓고 기도를 드리고 계셨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언제나 자식들 잘되게 해 달라는 말뿐이었다.
내 기억이 닿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이 새 벽 기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돌아가시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배금자 변호사의 어머니는 아들 딸을 눈곱만큼도 구분하지 않는 분이 었다고 한다.
배씨를 비롯한 세 딸에게 한 번도 바느질이나 음식 만드 는 법을 가르치신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평생 “여자가…, 이담 에 시집가서…”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릇이 넓어 늘 마을 대소사를 상담받았지만
결코 남의 험담을 늘어놓 지 않았던 분으로 어머니를 기억하는 배 변호사는 길을 가다
등에 손 자를 업은 할머니를 보게 되는 날이면
아직도 몇 번이나 돌아보다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만다고 전했다.
“인도를 여행하는 장거리 기차 안에서 어머니의 꿈을 꾸고는 슬피 울 다가 벌떡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차창 밖에서는 아열대의 자욱 한 아침 안개가 바람에 밀려 다니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여행도 많이 하고 명상도 많이 해서
인간의 슬픔과 기쁨 같은 감정을 많이 초월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앞에서 그럴 수가 없습니다.”
류시화 시인은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어머니에 대한 시를 쓴 적이 없다고 한다.
쓸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어머니 를 생각하면 맨 먼저 눈물이 글썽거려진다는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삶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은 결혼하자마자 일본으로 떠났고
아내를 일본으로 불러서는 다시 팽개쳤다.
때문에 그녀는 평생 직접 흙벽돌로 집을 짓고 보따리 장사 를 해
살아야 할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또한 일찍 서울로 유학을 떠난 아들과도 떨어져 산 외로운 삶이기도 했다.
“간혹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세상을 뜬 사람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을 단 한 번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어머니를 택할 것이라고.
정말이지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다.
나 의 어머니를 아니 먼 빛으로나마 한 번 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1979년 1월 쉰두 살로 세상을 떠난,
개그맨 이홍렬의 어머니 역시 일 생 동안 가난과 불행에 붙들린 삶이었다.
쓸 만한 기술을 가졌지만 평생을 한량처럼 살았던 남편 탓이었다.
생활력이 강했지만 한 때는 삶을 마감하려 약을 먹기조차 했을 정도로 어려웠던 인생.
불행히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이씨는 스타로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명절에 성묘를 하고 돌아오다
문뜩 비어 있는 자신의 자가용 뒷자석을 볼 때면
단 한 번도 어머니를 태워드리지 못했다는 죄 책감에 눈물이 난다고 고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