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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1사무 3,3ㄴ-10.19
제2독서 : 1코린 6,13ㄷ-15ㄱ.17-20
복 음 : 요한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참 좋은 삶의 끝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참 좋은 삶의 꼴'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누구나 참된 삶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참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삶은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평생과제입니다.
수도자를 흔히 무엇을 하기 위해(to do), 무엇을 지니기 위해(to have)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to be) 수도원에 왔다고 합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부과된 위대한 평생과제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에 대한 평가가 생각납니다.
"그는 가톨릭인 이전에 그리스도교인이었고, 그리스도교인이전에 종교인이었고, 종교인 이전에 사람이었다.“
탐구여정의 정점에 사람입니다. 보편인(universal man)으로서 참된 사람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가톨릭적일수록 보편인의 참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어디선가 읽은, 가끔 인용했던 구절도 생각납니다.
"사람 못된 게 중 되고, 중 못된 게 수좌되고, 수좌 못된 게 부처된다.“
역시 사람을 정점에 두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그 삶의 자리가 사람이 되기 위한 구도처이자 수행처입니다.
누가 참된 사람이며 참 좋은 삶의 꼴은 무엇입니까?
첫째, 주님을 찾는 삶입니다.
무엇을 찾느냐가 삶의 꼴을 결정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래야 안주하지 않습니다.
찾을 때 정주(定住)요 찾지 않으면 안주(安住)입니다.
끊임없이 바다 향해 흐르는 강처럼 깨어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은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해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답은 오직 하나, 하느님입니다.
하여 수도자를 일컬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깨어 하느님을 찾을 때 하느님을 만나 말씀을 듣습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저 여기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주님을 찾았기에 깨어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엘리 스승의 조언에 따라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마지막 대답이 참 좋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깨어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요한은 물론 그의 제자들 역시 깨어 주님을 찾았기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은 주님을 보는 순간 환호했고 두 제자는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진정 주님을 찾을 때 무욕의 집착 없는 훌륭한 인격의 스승입니다.
엘리와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엘리는 어린 사무엘을, 요한은 두 제자를 유일한 스승이신 주님께 안내했습니다.
엘리와 요한처럼, 진정 참 스승이신 주님을 찾을 때 무욕의 겸손한 스승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입니다.
어디에 머무르냐가 삶의 꼴을 결정합니다.
주님을 찾아 발견했으면 이어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위로와 치유요 자기의 발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만난 요한의 두 제자의 질문이 참 적절합니다.
"라삐, 어디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주님이 묵고 계신 곳에서 주님의 삶을 보고 배우고 싶은 열망을 반영합니다.
요한이 즐겨 사용한 용어가 '머무르다(그리스어 menein, 영어 remain)'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스승을, 부모를 그대로 보고 배우는 제자요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보고 배울 유일한 분은 주님이십니다.
보이는 스승이나 친구, 선배, 동료들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또 배우게 됩니다.
하여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하기도 합니다.
아니 우리 삶의 자리 모두가 바로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요 그 스승은 주님이십니다.
"와서 보아라.“
마치 불가의 스승과 제자간의 선문답 같습니다. '와서 보아라' 이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초대에 응해 와서 보면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바오로를 통해 주님의 말씀도 듣습니다.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바로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올바른 처신(處身)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안에 늘 머물렀던 성인들처럼 성령의 성전인 거룩한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함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사무엘 역시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얼마나 잘 배웠는지 다음 구절에서 아름답게 들어납니다.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 안에 머물러 배울 때 주님은 우리가 한 말 역시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필요한, 생명과 빛을 주는 사랑의 말만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주님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무엇을 선포하느냐가 삶의 꼴을 결정합니다. 주님의 찬미를 선포하라 있는 입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았으면 주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진리를 나눌 때 비로소 기쁨은 배가되고 진리도 확실히 깨달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한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에서 그날 그분과 함께 묵습니다.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이 얼마나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지 그 반응을 보면 담박 들어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안드레아는 즉시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주님을 알렸고, 예수님께 안내했습니다.
주님은 시몬을 눈여겨 보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자기를 발견한 두 제자와 시몬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참 나의 발견이요 참 나를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 복음 선포의 절박성이 있습니다.
평생 살아도 주님을 모르기에 자기를 모르고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주님뿐입니다.
주님이 없이는 아무리 '나는 누구인가?'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늘 연중 제2주일, 우리에게 참 좋은 삶의 꼴을 지닌
참 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1.주님을 찾으십시오.
2.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3.주님을 선포하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찾아 성체성사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시편23,5참조).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교구청에 근무하는 직원으로부터 자신의 예전 직장에서 있었던 재미있었던 일을 하나 들었습니다.
서울의 어느 회사를 막 다니기 시작한 어느 날, 윗 상사가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남영주차장’에 전화를 걸라면서 번호를 가르쳐 주더랍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서 “남영주 차장님 부탁합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자꾸만 “누구요?”만을 외치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영주 차장님’이 아니라 ‘남영 주차장’에 전화를 걸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지요.
이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모릅니다.
예전 국어시간에 들었던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라는 문장이 생각나면서
‘띄어쓰기’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가방에 들어가시는 것일까요?).
어쩌면 주님께 대한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내가 어떻게 주님을 이해하고 받아 들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주님의 모습으로 보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많은 사이비 종교와 이단이 끊이지 않고 생겨나는 것이지요.
주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은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냥 무조건 주님께서 다 해주실 것이라는 생각,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주님을 내 중심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사무엘이 보였던 자세입니다.
즉,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생활 안에서 계속 해야 합니다.
자신의 말을 하는데 익숙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더 익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왜 당신을 찾아왔는지 모르겠습니까?
눈치 없는 저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당신을 찾아온 제자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당신을 신뢰할 시간을 주시는 것이지요.
무엇을 찾는지를 명확하게 스스로 알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참으로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아는 나중에 베드로를 찾아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무엇을 찾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께 배우고자 하는 갈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냥 거리에서 하느님의 중요한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닌
당신의 숙소에서 깊이 있게 듣고 싶다는 배움에 대한 열망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묵을 숙소를 가리키지 않고 대신 “와서 보라.”라고 하십니다.
직접 따라와서 봐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대화들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의 중요한 말씀들을 듣기 위한 우리의 정성과 열망은 어떠했나요?
또한 직접 “와서 보라”면서 우리 스스로의 노력을 바라시는데 우리는 과연 어떤 노력을 했을까요? 그냥 저절로 좋은 일이란 좋은 일은 다 알아서 내게 이루어지길 바랐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듣고 실천하려는 노력보다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충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들으려는 노력도 부족했고, 알려는 정성도 없었던 우리들의 모습들을 반성하면서
이제까지의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때 내 몸이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환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장 맑고 생생한 순간은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를 우리가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오시는 메시아를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통해 우리들은 살아야 할 생명의 이유를 다시 알게 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세상이 다시 아름다워집니다.
우리자신에게 주님께서는 물음을 던지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우리가 잃어버린 주님을 찾습니다.
소중한 그 무엇은 언제나 애타게 찾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참된 기쁨입니다.
우리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와서 보아라."
길들이는 사랑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머무르는 사랑의 기쁨을 알게 하십니다.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오늘도 우리의 삶에서 메시아를 만나는 기쁨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람의 기쁨은 기다려온 주님을 만나는 일치의 기쁨입니다.
뒤늦게 주님을 따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주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은 태어나는 것일까요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낳은 정이 더 클까요 기른 정이 더 클까요?
낳아놓고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 낳느니만 못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국민남동생 유승호가 아역으로 나와서 큰 감동을 주었던 ‘집으로’엔
누구와 함께 머무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젊은 엄마가 허리가 90도로 꺾인 가난하고 말도 못하는 시골 할머니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고 갑니다.
아이는 너무나 버릇이 없이 커서 가지고 온 게임기만 두드립니다. 할머니 곁에는 가기도 싫습니다.
할머니가 손으로 찢어 밥 위에 얹어준 김치를 밥 째 퍼서 다시 할머니 밥그릇에 던지듯 옮겨버립니다.
켄터키 치킨이 먹고 싶다고 사진을 보여줬는데 백숙을 끓여오는 할머니와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게임기 배터리가 다 닳자 자고 있는 할머니 은비녀를 훔쳐 가게에 갑니다.
그러나 아저씨에게 혼나고 그냥 돌아옵니다. 아이는 숟가락으로 머리를 동여맨 할머니를 만납니다.
조금은 할머니가 좋아지기 시작해서 이번에는 할머니와 함께 장에 갑니다.
그러나 길거리에 앉아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 옆에는 있기가 창피합니다.
할머니는 번 돈으로 손자의 신발도 사 주고 자장면도 사 줍니다.
물론 할머니는 물만 마십니다. 왜냐하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남은 돈으로는 초코파이 하나를 사 주시는 할머니.
그러나 여전히 할머니와 같은 버스를 타고 오기가 싫어서
할머니가 내미는 짐도 뿌리치고 자기 혼자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머니.
그리고 매우 오래 기다린 끝에 버스 먼지 뒤로 이마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굽히고 걸어오는 할머니를 발견합니다.
아이는 할머니 보따리를 받고 그 안에 자신의 초코파이를 넣어줍니다.
그 동네에 아이가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아이와 만나기 위해 할머니에게 머리를 깎아달라고 했는데 스타일 구기시는 할머니.
그 아이와 선물을 교환하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잔뜩 끌개에 싣고 인형과 맞바꾸어 돌아옵니다.
할머니가 넣어주신 건전지도 없는 게임기 봉투에는 관심도 없이.
그러나 아이가 돌아오는 길에 끌개를 타고 장난치다가 무릎도 팔꿈치도 까지 피가 납니다.
그리고 아파하며 거추장스러웠던 게임기 봉투를 열어봅니다.
게임기와 함께 있는 2천원 지폐. 그 앞에는 걱정돼 나오신 할머니가 산길을 걸어 올라오고 있습니다.
아파서 눈물이 나는 건지 죄송해서 눈물이 나는 건지 아이는 크게 소리를 내어 웁니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온 편지, 다소 올라오라는 편지를 건네고 아이는 할머니를 걱정하며 어머니를 향해 떠납니다.
아이가 짧은 시간이지만 할머니와 함께 머무르지 않았다면
평생을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느끼지 못하고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야 상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내가 힘들면 다른 사람이 고통 받고 죽어가도 나는 아프지 않은 냉혈인이 됩니다.
결국 힘든 시간이지만 억지로라도 함께 있으면
사람은 더 사랑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도 따듯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보좌 때 휴가를 떠나 한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저녁마다 퇴근하고 그 집으로 저를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낮에는 제 할 일 하고 저녁에는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쫓아오는 요한의 두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그들은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랍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원하는 것이 주님께서 묵고계신 곳입니다. 그리고 때는 오후 4시쯤이었다고 합니다.
오후 4시에 어디에 묵고 있는지를 물어본다는 것은
차도 없던 시대이기 때문에 그분과 밤을 지새우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반가우셨겠습니까?
요한이 말하고 싶은 것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과 머물기를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 그분의 것이 나에게 옮겨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듯한 난로 옆에 있는데 차가워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를 뜨겁게 하고 싶다면 불 옆에 오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우리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
“주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찾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바로 성당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당 붉은 불이 들어와 있는 감실엔
언제나 떠나시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앞에서 30분만 참고 앉아있으면 마음의 평화가 물밀 듯이 밀려옵니다.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솟구칩니다.
피곤하면 졸기도 하지만 그분 앞에서 조는 것은 몸과 마음을 얼마나 가볍게 하는지요.
믿음의 열매가 저절로 맺힙니다.
그분에게서 아직도 피와 물이 나오는데 피는 죄를 용서하고 물은 성령님으로써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저절로 맺게 해 줍니다.
감실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묵고 계신 그분 현존 자체입니다.
물론 성경말씀 안에 머무를 때도 마찬가지고 또 가난하고 힘없지만
마음이 따듯한 사람들과 함께 할 때도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분과 머물고 싶은 마음은 우리만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더 바라시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 대통령 중에 가장 언론에 많이 등장하는 대통령은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79세)일 것입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버는 모든 것을 서민 주택 사업에 기부하거나 사회 복지 사업에 환원하였고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작은 농장, 87년 형 하늘색 폭스바겐 비틀, 트랙터 두 대,
그리고 개 한 마리가 전부입니다.
요즘 올라온 소식을 보니 헤랄드 아코스타라고 하는 한 주민이 공장에 출근했다가
신분증 기한이 만료돼 불볕더위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한 관용차가 서더니 자신을 집까지 태워줬는데 그 차 안에는 대통령과 영부인,
그리고 그들의 개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힘없이 걸어가는 자신을 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태워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아코스타를 집까지 태워주고 자신이 가려던 곳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그분도 우리와 머무시고 싶으십니다.
당신 차에 타고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세상일에 바빠서 그분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바란다면 그분께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머무시는 곳이 어딥니까?”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자녀들이 부모님 앞에서 싸우는 모습이 나오는데
남일 같지 않으면서도 부모님 앞에서는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형제들은 소원해지게 됩니다.
핏줄이란 것이 강한 면도 있지만 또한 아주 강한 것은 아닌가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매우 힘들어 할 때 자녀들이 찾아와서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눈물을 흘립니다.
할아버지는 말은 못하지만 ‘나 아프니까, 그냥 저리 가!’라고 하듯이 손짓으로 그만 좀 하라고 합니다.
평소에 함께 있어 주지 않았으면서 마지막에 와서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할아버지는 98년을 사셨습니다.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마지막에 그래봐야 어쩌겠습니까?
이젠 반가운 것보다는 서운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조차 힘이 듭니다.
우리 마지막 순간이 결코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한과 안드레아는 그분과 머물줄 알았기에 하룻밤에 그분을 그리스도로 완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분께 시간을 내어드립시다. 그러면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와서 보아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감곡출신 새사제의 첫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동안 영적, 물적으로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제를 위해서 끊임없는 기도를 부탁드리며 매괴성모순례지성당이
여러분의 기도와 성모님의 전구로 성소의 못자리로써의 명맥을 잘 이어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제를 통하여 구원의 신비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달되기를 소망하며 축하와 사랑을 드립니다.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묵었습니다.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1,38)하며 예수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고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요한1,39)하시며 그 마음을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
함께 머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보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만족하게 되고 그것을 넘어 감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묵음으로써 예수님의 삶을 보고 느끼며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묵으니 그의 모든 것을 얻게 되고 얻은 것이 복된 것이니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몬의 동생 안드레아는 형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하고 말하고 형을 예수님께로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눈여겨보시고 “너는 케파(베드로)라고 불릴 것이다”(요한1,42)하시며
당신이 베드로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하실지 예고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이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분께서 몸소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 기쁨이어야 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확신한다면 혼자만 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전해야 할 소명이 주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와서 보아라’ 하시며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와서 보시오’ 할 수 있는 당당하고 떳떳한 삶을 간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1고린6,15) 물으시며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고린6,20) 하고 권고 하십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니 그 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품의를 지킨다는 것은 불륜을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1요한6,18).
그것은 지켜야 할 도리에 충실하다는 것이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결국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5)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앞산을 보려고 앞산에 오르면 앞산을 옳게 보지 못한답니다.
역시뒷산을 보려고 뒷산에 올라도 뒷산을 옳게 보지 못합니다.
결국은 앞산을 옳게 보려면 뒷산에 올라서 봐야 하고
뒷산을 옳게 보려면 앞산에 올라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한 발 물러서서 보아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옳게 보려면 내 눈으로 보지 말고 이웃의 눈으로 봐야 하고,
특히 믿는 이들은 주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주님의 사람인가를 옳게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과연 내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손과 발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지요?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내 생각만 가지고 내편에 서서, 내 이익을 따져서는 결코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볼 것을 제대로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과 하루를 묵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하루를 보내고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음을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든, 성체 조배를 통해서든 기도 안에서,
이웃 안에서 주님과 함께 묵으십시오!
그리고 내 삶을 ‘와서 보시오’할 수 있는 떳떳함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와서 보아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제 내가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하겠습니다.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와서 보아라’ 하는 부끄러움 속에
다시 일어서는 한 주간의 시작이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박병규 신부
시작기도
협력자이신 성령님, 어디에서 말씀을 얻을 수 있을지 당신의 지혜를 저에게 내리소서.
세밀한 독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불렸다.
유다인들에게 어린양은 크게 두 가지로 이해된다.
하나는 자유와 해방, 그리고 생명을 알리는 데 사용된 탈출기의 어린양이다.(12장)
다음으로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걷는 야훼의 종을 알리는 데 어린양이 등장한다.(이사야서 53장)
두 가지 모두 ‘희생’, 그리고 ‘대속’의 의미를 지닌다.
요한복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가치가 희생과 대속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희생과 보속의 자리는 두말할 것 없이, 어둠에 묻힌 이 세상이다.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이 어디에 머무는지 묻는다.
그리고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그들을 초대한다.
우리가 찾는 것은 예수님인가, 그분의 자리인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파견된 자’로 자주 묘사한다.
세상에 파견된 분을 세상과 분리해서 살펴볼 텐가, 아니면 그분이 직접 머무시는 곳을 찾아갈 텐가?
이 물음이 오늘 복음에서 주목해야 할 바다.
희생과 대속은 상대를 원하고 상대를 부르고, 그 상대가 머무는 곳에서 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셨다.’
어린양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먼저 물으라.
묵상
삶은 다양하고 그 자리는 요란스럽다.
친교를 이루는 교회는 그 복잡하고 어수선한 삶의 자리들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데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중재하려고 세상에 자리 잡은 게 아니다.
사람과 사람을, 그리고 잇속과 권력을 중재하려고 이 세상에서 교회를 짓는 게 아니다.
교회는 하느님 뜻을 전하는 데 그 존재이유가 있다.
예수님이 세상에 파견되어 온 것은 하느님을 알리려고 한 것이지,
세상이 화평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의 세상살이는 대개 분열과 상처, 그리고 반목으로 얼룩졌었다.
하느님 뜻이 그만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 신앙이 세상의 친교에 기반을 둔다면, 예수님은 오늘도 역시 죽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친교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은 제물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돈을, 권력을, 명예를 중시하는 곳이니….
내 삶의 자리를 떠나 예수님의 자리로 옮기지 않는 한, 구원은 요원하다.
마침기도
주님,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 뜻을 꿋꿋이 증언하게 하소서. 아멘.
첫댓글 나자로의 마을 아론의 집으로 1박2일 연수 다녀오느라 늦었지만,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