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4대 시인 소식 1036~1101육유1125~ 1210 왕안석1021~1086, 소식, 황정견1045~1105 송나라 4대 시인
육유(陸游)
유산서촌(游山西村) 산서촌에 노닐며
莫笑農家臘酒渾(막소농가납주혼) 농가에서 섣달에 빚은 술 탁하다 웃지 마라
豊年留客足雞豚(풍년류객족계돈) 풍년에는 손님 대접할 닭과 돼지 충분하네.
山重水複疑無路(산중수복의무로) 산은 겹처 다시 물에 길 없다 여겼는데
柳暗花明又一村(류암화명우일촌) 버들 우거지고 꽃 환한 또 한 마을이네.
蕭鼓追隨春社近(소고추수춘사근) 피리와 북소리 쫒아 따르니 봄제사 근처이고
衣冠簡朴古風存(의관간박고풍존) 의관은 소박하고 간소하여 고풍이 남아 있네.
從今若許閒乘月(종금약허한승월) 지금 쫒아 만약 허락하면 한가로이 달맞이하고
拄杖無時夜叩門(주장무시야고문) 지팡이 짚고 아무 때나 밤에라도 문 두드리리라
*육유[陸游, 1125 ~ 1210,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 산음(山陰:浙江省) 출생]는 철저한 항전주의자로 일관했던 중국 남송(南宋)의 애국시인으로 약 50년 동안에 1만 수(首)에 달하는 시를 남겨 중국 시사 상(詩史上) 최다작의 시인으로 꼽히고, 당시 남송 고종은 재상 진회(秦檜)와 함께 금과 화친을 목적으로 하여 명장 악비(岳飛)까지 독살하였는데, 육유는 악비의 죽음을 한탄하며 애국충정에 찬 시(詩)를 남겼고, 금나라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다 여러차례 배척받았으며, 한편 육유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는데, 사촌동생 당완(唐琬)과 혼인하여 금슬이 너무 좋아 아들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어머니의 강요로 헤어지고, 그후 왕씨와 재혼하고 당완도 조사정과 재혼하였는데, 어느 봄날 심원에 놀러간 전처 당완과 우연히 재회한 육유는 이별의 아픔과 회한을 읊은 채두봉釵頭鳳을 지어 심원 담장에 적었고, 그 시를 본 당완 역시 집으로 돌아와 이에 화답하는 시를 쓰고 슬픔을 가누지 못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육유는 그후 해마다 봄이 오면 심원을 찾아 당완을 추모하면서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그녀에 대한 추모의 정을 읊었다 합니다.
왕안석(王安石)
초하즉사(初夏卽事)초여름의 즉흥시
石梁茅屋有灣碕(석량모옥유만기) 돌다리와 초가 집은 굽은 기슭에 있고
流水濺濺度兩陂(유수천천도양파) 흐르는 물은 졸졸 양쪽 언덕을 흐르네
淸日暖風生麥氣(청일난풍생맥기) 맑은 날 따스한 바람에 보리는 생기나고
綠陰幽草勝花時(녹음유초승화시) 녹색그늘 그윽한 풀 꽃이 이기는 때이네
*왕안석[王安石, 1021.12.18. ~ 1086.5.21.,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 무주 임천(지금의 강서성 무주) 사람]은 문장이 뛰어나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당송팔대가는 중국 당나라의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 등 8명의 산문작가의 총칭]으로 문인이자 정치인이고, 당대 최고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던 구양수(歐陽修)에게 인정받았으며, 그뒤 왕안석은 진사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첨서회남판관이란 관직을 받아 관료생활을 시작하였으며, 후에 파격적인 개혁정치인 신법(新法)이라는 개혁책을 통해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시역법(市易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을 실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의 시로는 “종산즉사(鍾山即事)”, “초하즉사(初夏即事)” 등이 있습니다.
黃庭堅(황정견)
악저남루서사卾渚南樓書事 악저의 남루에서 글 쓰다
回顧山光接水光(회고산광접수광) 돌아 바라보니 산빛은 물빛과 이어졌고
凭欄十里芰荷香(빙란십리기하향) 난간 기대니 십리는 마름과 연꽃 향기네
淸風明月無人管(청풍명월무인관) 맑은 바람 밝은 달은 사람 관여가 없고
倂作南樓一夜凉(병작남루일야량) 아우르게 지은 남루는 한 밤 서늘하네
*황정견[黃庭堅, 1045년 ~ 1105년, 자는 노직(魯直), 호는 산곡(山谷), 부옹(涪翁), 분녕(分寧 = 현 강소성(江西省) 수수(修水) 사람)]은 어려서부터 경사백가(經史百家), 노장(老莊), 불학(佛學)에 관심을 두었고 소설 등을 읽고 시를 짓기도 했으며 강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중심으로 한 시파를 이른바 '강서시파(江西詩派)'라고 하였으며, 두보의 시풍을 배웠고, 소식과 아울러 일컬어졌고 화가로도 유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