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나비
시/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시(詩) 해설 정끝별 시인
청산(靑山)이라면 몰라도 바다는 나비와 도무지 어울리
지 않는다. 거대한 바다에 비해 흰나비는 얼마나 작고 여리고
가냘픈가. 이 무구한 흰나비는 바다를 본 적이 없다. 알 수 없
는 수심과 거센 물결에 대해 들은 적도 없다. 흰나비에게 푸
르게 펼쳐진 것은 청무우밭이고 그렇게 푸른 것은 꽃을 피워
야 마땅하다. 흰나비가 삼월의 바다에서 청무우꽃을 꿈꾸는
까닭이다. 그러나 짜디짠 바다에 흰나비의 날개만 절 뿐, 삼
월이어도, 바다가 푸르긴 해도, 바다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
나비의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만 비친다. 삼월의 바다, 어린
나비, 초승달은 모두 이른 것들이다. 시작인 것들이다.
허공을 나는 것들은 날개가 중요하고, 땅을 걷는 것들은
허리가 중요하다. 한데 “나비 허리”라니! 공주의 아름다움은
춤에 있고 나비의 아름다움은 비상(飛翔)에 있다. “공주처럼
지쳐서” 바다에 돌아온 나비, 바다로의 비상에 실패하고
뭍으로 귀환한 ‘나비 허리’는그 상징적 의미가 깊다. 이제
흰나비는 청무우 꽃그늘을 노니는 그런 나비가 아니다. 짜디
짠, 바다의 깊이와 파도의 흔들림을 맛본, 허리가 실한 나비
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고 흙이 묻”(‘주피터 추방’)
기 마련이다. 새롭고 먼 곳을 향해 비상하다 날개가 절어 본
적이 있기에 흰나비는 이제 땅을 밟는 사랑을 알았으리다.
이 시의 백미는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라
는 구절이다. 하얗고 가늘고 기다란 나비의 몸과 초승달이 그
려지고, 지쳐 돌아오는 흰나비 허리를 비추는 저물녘 초승달
이 그려지기도 한다. 하나같이 ‘시린’ 풍경들이다. 어쨌든
‘바다’ 가 냉혹한 현실이라면 ‘나비’ 는 순진한 꿈의 표상이
다. 꿈은 언제나 현실의 냉혹합에 도전한다. 근대 혹은 서구
문명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의 자화상
이 떠오른다. 역사 혹은 시대의 흐름 앞에 무력하기만 한 시
인의 모습도.
김기림 시인의 탄생은 현대시 탄생과 그 햇수를 같이한
다.(얼마 전 출생 연도가 1907년으로 기록된 학적부가 발굴되
어 탄생 101주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는 1930년대 이상(李
箱)과 더불어 한국 문단의 모더니즘을 주도하면서 서구 문명
을 지향하는 ‘새로운 생활’을 동경했다. 그는 기자, 문학비평
가(이론가), 번역가, 대학교수를 겸한 모더니즘 선봉에 선 시
인이었으나 분단과 전쟁은 납북 이후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비운의 모더니스트’ 로 만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