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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 : 29. 솔로몬의 영광 30. 들풀도 입히시거든
마 6 : 29. 솔로몬의 영광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
들의 백합화는 심는 수고나 천을 짜거나 재단하고 바느질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으나 솔로몬의 아름다운 옷보다 더 아름답다.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옷이라도 하나님의 창조물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의 솜씨는 사람의 솜씨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뛰어나고 놀랍다.
1]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주께서는 옷에 대한 염려를 언급하시며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씀하신다.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안 하고 천을 짜지도 않았으나 솔로몬의 아름다운 옷보다 더 낫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옷이라도 하나님 창조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2]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원문은 솔로몬이란 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솔로몬조차도'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제3대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왕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초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고 가장 훌륭한 궁궐에서 그 영광의 극치(極致)를 누렸다.
3]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우데 페리에발레토)
이 말은 헬라어 중간태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자기 자신을 입히지 못하였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꽃 하나만'은 아름다운 백합화의 그 자연스럽고 찬란한 모습은 그 어떤 예술가도 창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며, 그 어떤 디자이너도 그와 같이 꾸밀 수 없는 조화롭고도 완벽한 치장이다.
왜냐하면 꽃 하나하나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이 숨 쉬고 있으며 신적(神的)인 기운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솔로몬도 이처럼 아름다운 것으로 자신을 장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옷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창조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마 6 : 30. 들풀도 입히시거든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아름다운 백합화나 들풀들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시적인 들풀들도 그처럼 아름답게 입히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입히실지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와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다(창 1: 26-27).
하나님의 자녀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신약교회 교인들은 더욱 존귀하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우리는 믿음이 적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는 온데 간데 없고 물질세계만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은 못보고 물질세계만 보는 무지하고 믿음 없는 자들이다.
1] 오늘 있다가(*, 세메론 온타) 내일
이 말은 '비록 오늘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란 뜻으로 그 생명이 극히 짧은 하찮은 들풀을 수식한다.
2] 아궁이에(*, 에이스 클리바논)
'클리바논'은 솥과 비슷한 것으로서 꼭대기보다 밑바닥이 더 넓은 편편한 오븐(oven) 모양의 흙으로 만든 이동용 불 그릇이다.
이 그릇은 바닥이 넓어 열을 모두 흡수하고 흔히 떡을 굽는데 사용되었다. 예수 당시에는 땔감으로 주로 건초(乾草)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3] 던져지는
이는 들풀들이 불쏘시개로 던져짐을 말한다.
4] 들풀(* 톤 콜톤 투 아그루)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문맥상 이것은 백합화를 가리키고 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백합화가 자라는 곳에 함께 핀 들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 말의 원어 '콜톤'은 들의 모든 풀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는 이 부분을 '톤콜톤 엔 토 아그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들에 있는 풀'이란 뜻이다.
누가는 솔로몬의 궁전과 대조되는 황량한 들판을 강조하여 들판의 영광이 궁궐의 영광보다 뛰어남을 대비시키는 데 더 강조점을 두었다.
5]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오리고피스토이)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꾸짖듯 말씀하신 것으로서 모든 근심은 바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됨을 역설한 것이다.
잠언은 환난 날에 낙담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 잠 24: 10 -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특히 우리 성도는 물질적인 궁핍과 가난으로 낙심하여 믿음이 적은 자란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 염려와 근심은 모두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오직 모든 필요를 홀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오늘의 불만족스럽고 불공평한 이 현실을 진실하게 그리고 의롭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백합화나 다른 들풀들의 아름다움은 지극히 일시적이다. 그것들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것들이다. 아름다운 꽃들이 며칠 못 되어 시들어지는 것은 참으로 헛되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헛되고 일시적인 들풀들을 그처럼 아름답게 입히신다면, 그가 인간을 어떻게 입히실지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는 원어는 ‘[그가] 너희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26절의 공중의 새에 대한 언급에서도 '너희는 이것들보다 훨씬 더 낫지 않느냐?'고 말씀하셨고, 본 절의 들의 백합화에 대한 언급에서도 '그가 너희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인간은 공중의 새들과 비교할 수 없고 들의 백합화와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불멸의 영혼을 소유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 창 1: 26-27 –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인간은 결코 원숭이가 진화되어서 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물들을 각각 종류대로 만드셨다(창 1장). 인간은 인간이고, 짐승은 짐승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짐승을 죽여 그 고기를 먹도록 허용되었지만(창 9: 3),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큰 악으로 간주되었다.
* 창 9: 6 -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죽은 후에 갈 곳이 나뉘고 또 최종적 심판이 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땅으로 내려간다고 말씀했다.
* 전 3: 21 –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또 인간의 영혼은 불멸적이기 때문에 의인들과 악인들의 부활이 나뉜다. 의인들은 영광스런 영생의 부활을 할 것이나, 악인들은 수치스런 심판의 부활을 할 것이다.
* 요 5: 29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인간의 가치가 이렇게 귀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마 16: 26).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는 주의 말씀에서 '너희'는 누구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주의 백성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 니느웨에 있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12만여 명의 어린 생명들을 아끼셨다.
* 욘 4: 11 -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택하신 자기 백성을 더더욱 사랑하시고 아끼실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을 먹이고 입히실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될 부드러운 책망의 말이다.
우리는 믿음이 적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끼시리라는 이치를 알면서도, 믿음이 적기 때문에 믿고 기도하는 대신 현실을 보고 두려워하고 당황하고 방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에 대한 염려는 믿음이 적기 때문에 온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며 그가 분명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우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께 감사를 동반한 간구를 올릴 것이다.
6] 물질에서 자유하라. ( 마 6: 25-30 )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대체로 가장 많은 시험에 드는 일이 물질의 시험이 아닐까 생각한다. 딤전 6: 10에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했다.
물질의 시험이 가장 큰 시험인 이유는 사람이 살면서 물질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이 천사 같아 보여도 당장 먹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재물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다. 접속사가 나오면 항상 전후문맥을 살펴보아야 뜻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그러므로”는 우리에게 굉장한 경제적 복음을 암시한다. 즉 물질에 시험 들지 않고 필요를 누리고 자유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1) 물질에서 자유하는 길
① 경중(輕重)을 따져 보라.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물질보다 목숨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자신을 해쳐가면서까지 물질에 집착한다. 경중을 따질 줄 알아야 물질의 자유를 택할 수 있다.
일찍 일어나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는데 일도 좋지만 몸도 생각해야 한다. 꿀벌이 일이 없을 때는 여러 달 살지만 채밀기에는 불과 한 달밖에는 살지 못한다고 한다. 너무 몸을 혹사한 연고(緣故)다. 경중을 따져서 살기 바란다. 좀 덜 부자로 살아도 좋으니 건강하게 살기 바란다.
물질에 대한 문제는 영혼에도 큰 영향을 준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고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른다고 하지 않았나? 물질에 집착하거나 염려하면 당장에 심령이 막힌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내 영혼과 육체가 죽는다. 그러므로 경중을 따져 내 육체와 영혼이 살기 위해서라도 물질에서 자유하기 바란다.
(2) 자녀의 특권을 기억하라.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도 기르시고 입히시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보다 더 귀한 자기의 자녀들을 책임지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이걸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를 물질에서 자유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다. 언제나 좋으신 아버지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공급하시겠다 약속하시는데 염려하거나 범죄할 이유가 없다. 다툴 일이 있으면 이삭처럼 양보하기를 바란다. 평안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라.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셔서 허락해 주실 것이다.
(3) 염려가 손해라는 것을 알라.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염려한다고 키가 크냐고 반문하신다. 여러분이 대답해 보라. 염려한다고 키가 한 자나 큽니까? 염려하지 않고 푹 자야 성장호르몬이 잘 분비되어 키가 자란다. 염려하면 한 자가 아니라 스트레스만 받아 더 줄어들 것이다. 부질없는 것이라면 속히 버릴수록 현명하다.
영국의 작가 다니엘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탔던 배가 파손이 되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 모두 죽었다. 그런데 그는 홀로 살아남아서 무인도에 이르렀다. 그 무인도에서 그는 28년 동안이나 생존했다. 그러다가 그는 극적으로 구조를 받았다. 그가 어떻게 해서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28년 동안이나 홀로 살 수가 있었을까? 그의 정신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한 마디로 믿음과 감사에서 나왔다.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불행한 일이 생겼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죽었지만 그래도 자기는 살아남았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감사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였다. 그러나 따먹을 수 있는 과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아무데서도 옷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옷을 입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날씨가 따뜻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에게는 총 한 자루 이외에는 변변한 무기가 없었다. 그러나 섬 안에는 자기를 해칠만한 짐승이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그는 감사했다. 그는 부질없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염려가 불신앙임을 알라.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처럼 언제나 공급하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는데 근심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가장 무서운 불신이다. 물질 공급을 믿지 못한다면 다른 믿음도 없다는 뜻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 이것이 물질에 대한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다.
* 벧전 5: 7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