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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2)
에 4:1-11
1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2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3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4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전하니 왕후가 매우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 옷을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5 에스더가 왕의 어명으로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령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엇 때문인가 알아보라 하매
6 하닥이 대궐 문 앞 성 중 광장에 있는 모르드개에게 이르니
7 모르드개가 자기가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금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액수를 하닥에게 말하고
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보여 알게 하고 또 그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9 하닥이 돌아와 모르드개의 말을 에스더에게 알리매
10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전하기를
11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 설 교 >
에스더의 삶과 신앙
에 4:4-17 / 안효관목사
아이를 낳으면 누구나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합니다. 전통적인 사상 속에는 아이의 이름을 잘 지어야 그 아이가 큰 사람이 되고, 잘못 지으면 그 이름 때문에 아이의 일생을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서 작명가를 찾아가서 많은 돈을 주며 아이의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그렇게 아이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려고 하는 부모의 마음은 단순히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고유한 풍습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 조상 가운데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그 이름을 따서 자녀들에게 붙여주곤 했습니다. 성경에서 같은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바로 그런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나라 신앙인들 가운데 아이의 이름을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딴 이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제 아들 '요한이'이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처럼 자라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여자들 이름 가운데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에스더'의 이름을 딴 이름들도 많이 있습니다. '에스더'라고 부르기도 하고, '애덕'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 '애덕'이라는 이름은 '에스더'라는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꾸어 부른 이름입니다.
그만큼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여인들 가운데, 에스더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여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은 에스더여사도회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에스더의 삶과 신앙을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모든 에스더 여사도회 회원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에스더의 신앙과 삶을 본받아서 우리 교회의 귀한 일꾼들로 쓰임 받는 은혜가 있기를 기원 드립니다.
가장 먼저 우리가 에스더에게서 본받아야 할 모습은 그의 훌륭한 인품입니다. 에스더의 훌륭한 인품을 보여주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① 에스더 2:8-9절에 보면, 아하수에로 왕이 왕비를 간택한다는 명이 떨어지자 수산 성에 살고 있던 에스더가 왕비 후보로 왕궁에 뽑혀 갑니다. 그리고 왕비로 뽑히기 전에 궁녀를 주관하는 '헤개'라는 관리에게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런데 2:9절에 의하면 "헤개가 이 처녀를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헤개가 에스더를 보고 기뻐했다는 뜻이 아니라, '에스더가 헤개에게 기쁨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에스더의 외모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아름다운 덕성과 인품을 본 헤개가, 에스더 때문에 마음이 기뻤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저런 처자를 구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로, '참으로 참한 처녀였다'는 말입니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그의 인품과 행동거지 하나 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니까, '이 처자야말로 왕비감이구나' 싶어 '제대로 된 왕비를 얻게 된 것 같아 기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인품은 반드시 행동과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말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덕스러운 행동과 아름다운 삶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② 에스더의 훌륭한 인품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구절이 2:15절입니다. 전국에서 뽑혀온 수많은 처녀들이 아하수에로 왕 앞에 가서 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6개월 동안 왕비가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왕궁 예절을 배운 후에, 하루에 한 명씩 왕에게 가서 시험을 치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13절 말씀에 보면, 왕에게 시험을 보러 가는 처녀에게는 그녀가 필요하다고 요구한 모든 것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예쁘게 화장을 해야하기 때문에 최고급 화장품을 달라고 하면 최고급 화장품을 주고, 제일 예쁜 옷을 달라고 하면 제일 예쁜 옷을 줍니다. 그러면 그 처녀는 자기를 가장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 왕 앞에 가서 시험을 치룹니다.
그런데 2:15절에 보면, 에스더 차례가 되어서 에스더가 왕궁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에스더는 자기를 치장할 수 있는 좋은 것을 무엇이든지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헤개가 정한 가장 기본적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에스더는 겉모양을 일부터 치장하거나 사치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게 에스더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에게 굄(사랑)을 얻게 된 이유였습니다.
여러분, '여인천하'라는 역사드라마를 보십니까? 거기에 보면 중전의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한 음모와 경쟁을 벌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중전의 자리가 정략적으로 이용되면서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음모에 휩싸이게 되기도 하고, 중전을 끌어내려야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야망 때문에, 중전의 자리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어떤 짓거리도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마만큼 중전의 자리, 왕비의 자리는 왕궁에 있는 여인들에게는 탐나는 자리요, 욕심의 자리입니다.
그건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에스더 당시에는 중전의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왕에게 뽑히기만 하면 중전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여인천하'에 나오는 것만큼 그 자리를 놓고 치열한 음모가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중전의 자리를 얻기 위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처녀들에게 오직 바라는 것은 단 하나 '그 중전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전혀 자신을 치장하지 않습니다. 더 잘 보이기 위해서 지나친 화장도 하지 않습니다.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이 참된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아름다운 여인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주 '찬양가사 만들어 부르기'를 할 때 한 사도회에서 "제일 예쁜 사도회"라고 하니까 일부에서는 부러운 듯이 '야유'의 소리를 하셨습니다만, 제가 볼 때에는 여러분 모두가 예쁘고 아름다운 여인들입니다. 겉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열심히 신앙으로 살려고 하는 그 모습을 볼 때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우리 신앙인의 아름다움은 겉모양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예쁘게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고, 값비싼 장신구로 몸을 치장한다 하더라도, 그건 진정한 아름다움일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진정한 아름다움, 하나님 앞에서 값진 아름다움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겉모양의 아름다움보다도 속사람의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③ 에스더의 훌륭한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구절이 있습니다. 그게 2:20절의 말씀입니다. 드디어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이 되었습니다. 이제 에스더가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중전의 자리는 보통의 자리가 아닙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어마어마한 국토를 가진 세계 최대 강국이었습니다. 동쪽으로는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까지이고,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북쪽까지, 그리고 위쪽으로는 터키까지, 굉장히 광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러기에 요즘으로 말하면 에스더는 미국의 대통령 부인쯤 되는 사람입니다.
원래 에스더는 유대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아비하일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아비하일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 수하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고향도 아닙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포로민입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개인적으로 아버지도 없이 사촌 오빠 밑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이런 객관적인 정황으로 본다면, 에스더가 바르게 자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아주 반듯하게 자랐습니다.
반듯하게 잘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구절이 바로 2:20절입니다. 중전의 자리에 오른 에스더는 자신을 키워준 모르드개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중전의 자리에 올랐으면, 이제 어깨를 우쭐거리며 거들먹거리기 쉽습니다. 더구나 불행한 환경 속에서 자란 에스더로서는 더욱 그럴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중전이 된 에스더는 자신을 딸처럼 키워준 오빠 모르드개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2:20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명한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고하지 아니 하니 저가 모르드개의 명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좇음이더라." 중전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오빠인 모르드개의 말을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 자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큰 부자가 되거나 큰 권력을 가지면, 그걸 누리기 위해서 옛날의 불행하게 살 때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 입었던 은혜를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빠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빠의 말을 순종합니다.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으로 미천한 신분의 자리에 있던 사촌 오빠를 나몰라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모르드개가 대궐 문 앞에서 굵은 베를 입고 농성을 벌이고 있을 때에 그 이야기를 들은 에스더는 - 4절의 말씀에서 보여준 것처럼 - "심히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전달해 줍니다.
에스더는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정말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줄 만큼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고, 사치하지 않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며느리 삼고 싶을 그런 여인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도 이런 인품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겉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우리의 삶과 인격에서 풍겨나는 향기로움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단순히 마음 속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과 인격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인격을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그 빛이 우리의 삶 속에서 착한 행실로 드러남으로써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에스더 여사도회 회원 여러분과 우리 모든 교우님들도 에스더처럼 아름다운 인품과 삶으로 세상에 감동을 주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에스더에게서 본받아야 할 모습은 그의 신앙입니다. 대궐 문 앞에서 굵은 베옷을 입고 시위를 하고 있던 모르드개가 내시 하닥을 통해서 에스더에게 민족이 커다란 위기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만이라는 왕 다음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유대인들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몰수하려는 음모가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민족적인 위기를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에스더' 밖에 없음도 말해줍니다.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서 '우리 민족을 구해 달라'고 왕에게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에스더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당시 왕궁 법도에 따르면, 아무리 중전이라 하더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왕에게 나아갔다가는 '왕을 암살하러 온 사람'으로 간주하여 죽이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 왕이 금홀을 내밀어 그를 받아들인다는 사인을 줄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에스더가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에게 가서 자기 민족을 구해달라고 요청하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전 왕후였던 와스디가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 때문에 폐위되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왕비에 대한 아주 엄격한 기운이 궁궐 내에 흐르고 잇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때에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걸 모르드개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민족을 구해내야 했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중전의 자리에 올라 있는 '에스더'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이렇게 재촉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13-14절)
그 말을 들은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만이 민족을 구원해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자신의 힘으로도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다면 민족을 구할 수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외면하신다면 자기 민족도 멸망당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에게 온 민족으로 하여금 금식하며 기도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밤낮 3일을 금식하며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백성들만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후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도 시녀로 더불어 3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왕의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신앙의 결단은 자신의 목숨을 건 결단이었습니다. "3일을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갈텐데, 왕이 나를 긍휼히 여겨서 금홀을 내밀어 감사한 일이고, 만일 왕께서 금홀을 내밀지 않는다는 나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더라도 가겠습니다." 그게 지금 에스더의 마음이고 신앙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게 신앙인들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행동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에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민족을 구해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 가장 먼저 기도했습니다. 자신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민족 전부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목숨을 내놓고 왕에게 나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게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이 자신에게 어떤 해를 가져다준다고 생각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을 막아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 경제위기 속에서 나라를 살리겠다고 '구조조정을 한다, 기업들 간에 통폐합을 한다' 그럴 때에 파업을 해서라도 그런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좀더 크게 생각한다면, 개인이 살기 위해서 나라 전체가 더욱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외면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좀더 큰 것을 생각하고, 큰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큰 것(하나님의 나라와 의)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폐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민족이야 망하든 말든 자신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서라면 모른 체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모른 체 하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이 한 목숨 버려 우리 민족이 구해질 수 있다면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마음으로 왕 앞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바로 이런 신앙인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보다 크고 넓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나보다도 사도회를 먼저 생각하고, 나보다도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나보다도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인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물론 그런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내 자신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 내 몸이 더 고달플 것입니다. 삶이 더욱 힘들고 더 부지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시대에 요청하시는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시는 에스더 여사도회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에스더와 같이 삶 속에서 인격과 인품의 아름다운 향기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나보다도 사도회를 먼저 생각하고,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이웃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모든 믿음의 식구들도, 에스더처럼, 삶으로 향기를 드러내며, 나보다도 사도회와 교회와 이웃과 민족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인생의 3차원
에 4:6-17 / 홍문수목사(신반포교회)
인생은 누구에게나 단 한번 뿐입니다. 그러기에 인생을 정말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인생을 잘 사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한 마디로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인생을 사노라면 잠시 잠깐 후회할 때가 있죠. 그런 것은 만회할 수 있으니까 괜찮은데, 인생을 마칠 때 후회하는 인생이 되면 큰일입니다. 더 이상 만회할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인생이 흘러가도 뿌듯하고 영원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3차원(3S)이 있다고 합니다. 생존 지향적 인생(Survival Level), 성공 지향적 인생(Success Level), 그리고 의미 지향적 인생(Significance Level)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인생이 바로 의미 지향적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스더와 모르드개 같은 인물들이 의미 지향적 인생을 살았습니다. 에스더는 그 이름 뜻이 ‘별’입니다. 그녀는 의미 지향적 인생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저 천국에 들어가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인생이 됐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그런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1] 생존 지향적 인생 : 먹고 살기에 급급한 인생
흔히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죠. 먹기 위해 사나? 살기 위해 먹나? 살기 위해 먹는 게 맞죠. 먹기 위해 사는 것은 동물의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먹기 위해 사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선 생존해야 인생을 고상하게 살든 말든 할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 사는 것을 인생의 제1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입니다. 영어에서 흔히 직업을 물어볼 때 쓰는 말이 있죠. “What do you do for a living?” 직역하면 “먹고 살기 위해(생계를 위해) 무슨 일을 합니까?” 이런 뜻이죠. 아주 자존심 상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더 고상한 인생의 목표를 위해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먹는 겁니다. 고상한 목표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그래서 직업이란 말이 영어로 vocation 혹은 calling 아닙니까?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각자의 재능과 형편에 따라 직업을 소명으로 주셨습니다. 바로 이 소명에 충실하면 하나님께서 생존을 책임져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산상수훈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공중의 새들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고 살고, 들의 백합화는 길쌈을 하지 않아도 입고 산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얼마나 더 잘 챙겨주시겠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6:31~32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염려 안 해도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면 다 공급해 주시니까 걱정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곳곳에서 식량난이다 뭐다 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죄악과 사회 구조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미 충분히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면 넉넉히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생존 지향적 인생을 살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인생이 꼬이기 쉽습니다. 어느 신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가정을 이룬 가장인데 뒤늦게 신학을 결심하고 입학했습니다. 한 학기를 공부하는데 너무 힘이 듭니다. 학비도 비싸고, 생활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불현듯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식구들과 함께 먹고 살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궁리 끝에 휴학을 하고 1년만 열심히 돈을 벌기로 했습니다.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작은 가게를 인수했습니다. 막상 가게를 오픈하고 보니까 주일이 문제였습니다. 주일 장사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수지를 맞추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가게를 열고 잠깐 교회에 갔다 올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교회에 못 가는 날이 많아졌고 결국은 주일을 빼먹게 됐습니다. 그런 식으로 1년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하고라도 돈을 벌면 다행인데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열석적인 이야기인데 생존을 위해 살면 생존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생존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2] 성공 지향적 인생 : 출세하기에 급급한 인생
성공 지향적 인생은 세상에서 출세하기에 급급한 인생입니다. 먹고 살기에 급급한 인생보다 조금 나아 보이지만 거기서 거기입니다. 세상에서 재물, 권세, 명예 등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성공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면 정말 중요하고 영원한 가치들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많은 부작용도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 살다 보면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죠. 성공을 얻기도 힘들지만, 성공을 성취한 이후에도 후유증이 많습니다.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가다 보니까 이미 거둔 성공의 열매를 누리지도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죠. 캘리포니아 베버리힐즈에 엄청난 대저택들이 있습니다. 풀장은 기본이고 어마어마한 위락 시설들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것들을 가장 많이 누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히스패닉 가정부들이라고 합니다. 주인들은 아침 일찍 나갔다 밤늦게 들어오니까 누릴 여유도 없습니다. 대저택에서 하루 종일 있으면서 일도 하지만 누리는 것은 가정부들이라는 겁니다.
또 전력질주하며 살다 보니까 병을 얻기 쉽습니다. 이제는 병을 고치느라 성공한 열매를 다 털어 넣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설사 성공도 얻고 건강도 지키고 모든 것을 갖추어도 성공 후에 인생을 돌아보면 놓친 게 너무 많았음을 느끼고 허무감이 밀려옵니다.
영국의 작가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절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실패했을 때 오는 절망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했을 때 오는 절망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전자가 아니고 후자다.” 성공 후의 절망은 성공했는데도 별게 아님을 알았을 때 느끼는 허무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오죠. 어떤 부자가 농사를 크게 지고 성공했습니다. 소출이 많아 창고를 확장합니다. 요즘 말로 대박이죠. 그 후에 어떻게 하나요? 이제 노후를 편안히 즐기며 살리라 노후를 설계합니다. 그러나 그게 과연 자기 마음대로 될까?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겁니다. 눅12:19~21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이 그 영혼을 부르시면 성공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살만 하면 죽는다! 성공을 위해 달려가느라 하나님도 잊고 내세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는데, 성공을 거두고 이제 살만 한데 하나님이 불러 가시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겁니다.
약4:13~14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성공을 꿈꾸고 계획하고 열심히 살아도 안개 같은 인생이기에 허사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챙겨야 합니다. 그게 뭐죠? 영혼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육적인 죽음도 비참하지만, 그 이전에 영적인 죽음도 문제요, 내세에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는 영원한 사망이 가장 비참한 일입니다. 그 근본 원인인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십자가 대속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가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 살 동안에도 영혼 가운데 영생의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지친 모습으로 우물가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4:13~14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성공보다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것은 영생의 기쁨이라는 겁니다. 그 여인은 남자를 갈아치우는 게 성공의 방편이며 행복의 지름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성공을 거두면 행복할 줄 아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영생을 얻어야 행복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입니다. 영혼에서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성공보다 예수 안에 있는 영생으로 참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고 또 하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영생을 얻은 후 영원히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히 후회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인생은 하나님이 인정하고, 영원한 천국에서도 기억되는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성공보다 영생으로 인한 행복이 중요하고, 그 후에는 의미가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3] 의미 지향적 인생 : 영원한 가치에 헌신하는 인생
인생에서 가장 차원이 높은 것은 의미 지향적 인생입니다. 영원을 위해 헌신하는 인생입니다. 본문을 보면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런 인생에 대해 도전합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그런 인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성공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겁니다.
에스더서의 배경은 B.C. 5세기 바사(페르시아) 왕국입니다. 에스더와 사촌 오빠 모르드개는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되어 포로로 끌려 온 사람들입니다. 세월이 흘러 바벨론도 멸망하고 페르시아가 들어섭니다.
에스더는 초년에 고아가 되어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슬하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왕후가 됩니다. 본래 왕후는 귀족 가운데 나오는 법인데, 신기하게도 포로 출신인 에스더가 됩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요즘으로 말하면 미인대회 같은 게 있었습니다. 각 지방에서 미인을 선발하고 그 중에서 왕이 간택을 한 겁니다. 에스더는 요란하게 치장하지도 않았지만 왕의 마음에 꼭 들었고 마침내 왕후가 됩니다. 신데렐라 같이 된 겁니다. 그러나 신데렐라 이야기는 어떤가요? 왕자님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았다 ... 이렇게 끝나죠. 이건 리얼한 인생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후에 병들고 늙고 죽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신데렐라가 성공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의미를 남겼는가가 중요합니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신데렐라 이야기와 다른 점이 바로 이겁니다. 성공 이전이든 이후든 중요한 것은 의미 지향적 인생입니다.
에스더나 모르드개나 생존 자체도 힘든 상황에서 살았습니다. 약소국가의 포로민이었으니 그 형편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살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것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생존 문제는 물론이고 그들의 인생 전체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심지어 성공까지 주셨고, 또 그 성공을 하나님의 가치를 위해 드리고 헌신할 때 더 큰 성공을 거두는 연속적인 승리의 인생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에스더가 왕후가 된 후 대형 사건이 터졌습니다. 에스더는 왕궁에 있고, 모르드개는 왕궁의 문지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악한 하만이 왕궁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는 왕 다음의 실세 총리여서 모든 사람들이 굽실거리며 절을 합니다. 그런데 유독 모르드개만은 절을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 외에 인간에게는 절대로 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하만이 모르드개는 물론이고, 그의 동족인 유대인 전체를 학살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모르드개와 유대인은 수도 수산은 물론이고 각 지방에서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에4:3 보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이 소식이 왕궁의 에스더에게 전해졌고 그녀는 오빠를 생각해서 내시를 시켜 옷을 보냅니다. 그러자 모르드개가 어떻게 하죠?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호의호식 하겠는가? 왕에게 나아가 이 사실을 알려 유대 민족을 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에스더는 고민에 빠집니다. 왜 그랬을까요? 11절.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금홀, gold scepter)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당시 왕은 신격화되어 있죠. 동시에 독살 위험도 있어 왕실 경호법이 특이했습니다. 왕이 부르지 않으면 왕후조차 마음대로 왕을 찾아올 수 없습니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왕의 심사가 뒤틀리면 큰일 납니다. 이미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켰던 왕이 무슨 짓은 못합니까? 다만 예외가 있죠. 왕이 판단해서 금규(왕권 상징하는 지휘봉)를 들면 가까이 가서 알현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의 그 말을 전해들은 모르드개가 이번에는 뭐라고 말합니까? 14절.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이 일을 회피하지 말라는 겁니다. 만일 그러면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유대 민족을 구원할 것이지만, 에스더와 그 가문은 영원히 패가망신하게 될 거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이 성공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이기적이 되기 쉽습니다. 에스더가 잠시 자신의 입장만 생각한 것도 그런 본능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빠의 그 말을 듣고 잘 생각해 보니까 왕후가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고, 지금까지 살아온 게 하나님의 영광과 유대 민족을 위해서였는데 몸을 사려서 되겠나 싶었습니다. 결국 마음을 정리하고 결단합니다.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금식기도 하고 왕에게 나아갈 테니까 함께 기도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었다는 결연의 의지를 밝힙니다.
에스더는 영원한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생존도 성공도 아니라 영원한 가치 즉 의미를 인생의 최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가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마22:37~40, 마28:19~20 참조) 이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에 목숨을 거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갔는데. 왕이 그녀를 사랑스럽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만의 흉계가 폭로됩니다. 에스더는 더욱 더 총애를 받고, 하만이 처형된 후 모르드개가 대신 총리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학살을 모면할 뿐만 아니라, 왕의 특별대우까지 받게 됩니다. 유대인을 국경일(부림절)까지 제정됩니다. 에8:15~17 “15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16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17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모르드개와 유대인이 이렇게 존귀케 되니까 본토인들이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유대인이 됩니다. 믿음을 고백하고 할례 받으면 인종에 상관없이 그 날부터 유대인이 되는 겁니다.
엄청난 역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고 에스더와 모르드개 자신도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치면 생존하기도 어렵고, 성공을 위해 살면 성공하기도 어렵고 설사 성공해도 허무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위해 살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6:33~34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먹고 사는 것 염려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생 만사를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국에서까지 영원히 빛나는 인생은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겁니다. 에스더의 헌신으로 유대인들을 구할 뿐만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조차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에스더는 이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의미 지향적 인생을 살다가 하늘나라의 별이 됐습니다.
여러분, 혹시 브라질 축구 선수 카카를 아십니까? 베컴 못지않은 꽃미남에다 프로 축구 선수 중에서 세계 최고의 연봉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꿈이 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18세에 다이빙대에서 미끄러져 척추가 부러집니다. 축구는 물론이고 걷기고 힘들어졌습니다. 의사는 수술해도 회복 가능성이 2%밖에 안 된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대수술이 성공했고 재활 훈련도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게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꿈대로 국가 대표 선수가 됐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는 국가대표로, 더 나아가 유럽 프로축구팀에서 뛰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공개 석상에서, 기자회견 석상에서 밝힙니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축구합니다. 나는 진정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골을 넣을 때마다 기도 세레머니를 합니다. 유니폼 속에 셔츠를 끼어 입고 있다가 유니폼을 벗고 셔츠 속의 글귀를 보이며 하늘을 향해 두 손 들고 기도하는 세레머니입니다. 그 셔츠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I belong to Jesus!” 그가 이렇게 세레머니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께로 인도된다고 합니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에 버금가는 효과가 나타나는데, 이를 가리켜 ‘카카 효과’하고 부릅니다. 축구를 하든 무엇을 하든 우리 인생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사랑의 실천과 복음 전파를 지향하면 됩니다. 이게 바로 의미 지향적 인생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일상의 분주함 가운데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존을 위해, 혹은 성공을 위해? 그러면 반드시 나중에 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인생의 방향을 재조정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인생인 의미 지향적 인생으로! 그래서 에스더처럼 이 세상에서도 승리하고, 저 천국에 가서도 영원토록 별처럼 빛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에스더! 이 때를 위함이 아닌가
에 4:7-16 / 지태일목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 에스더는 페르샤에서 자라난 유대인 2세입니다. 그의 부모는 BC 586년 남유다의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살다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에스더는 사촌인 모르드개의 집에서 자랐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으로 자라났습니다. 마침 이때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를 구하고 있었는데 에스더는 많은 경쟁을 물리치고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포로로 끌려와 고아로 자란 유대인 2세가 당시 최대 제국 파사의 황후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자기 동족중에 페르시아에서 왕비가 탄생했다는 것은 아주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에스더의 사촌인 모르드개가 페르시아 왕의 목숨을 살려준 일은 페르시아의 포로 신세가 된 유대인들을 활짝 웃게 하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쁨과 흥분은 잠시요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기쁨도 웃음도 한 순간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의 국무총리였던 파사의 제 2인자 하만이란 사람이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때 시기하고 질투하여 권력의 라이벌로 생각하고 흉계를 꾸며 유대인 대학살 음모를 꾸임니다. 하만의 흉계에 아하수에로 왕이 동조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하만의 흉계는 왕비 에스더도 포함이 되었고 왕의 신임을 받는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도 포함되었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크게 애통하며 울부짖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그 옷을 찢고 굶은 베를 입으며 재를 무릅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하며” 3절을 보면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대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굶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말씀합니다.
에스더는 왜 많은 유대인들이 애통하며 금식하며 곡하며 베를 입고 재에 누웠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대궐 밖으로 하닥을 보내자 사촌 모르드개는 그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7-8절을 보면 “모르드개가 자기가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부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수효를 하닥에게 말하고”
그리고 나서 8절을 보면 “에스더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 때 에스더는 자신의 딱한 사정을 사촌에게 아룁니다. 11절을 보면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11절).
왕에게 나아가려면 반드시 왕이 오라는 사인, 금홀을 내민 다음에 들어 가야지 그냥 들어갔다가는 왕을 독살하는줄 알고 오히려 죽음을 당합니다. 그런데 왕이 에스더를 불러야 하는데 부르지 않아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한 날이 삼십 날이나 되었으므로 법을 어겨가면서 그렇게 어려운 부탁을 할 수 없다는 말을 11절에 말한 것입니다.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생각하면 곧 당장 왕에게 나아가야 하지만 왕이 부르지도 않을 때 들어갔다가는 자신이 죽을 수 있습니다. 고민과 갈등이 에스더에게 밀려 옵니다.
그 때 모르드개는 13절을 보면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13-14절)라고 아주 강하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네가 왕궁에 산다고 모든 동족이 죽는데 혼자 살리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만의 흉계는 온 유대인을 향한 흉계이므로 에스더 역시 유대인이므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이때야말로 에스더가 가진 위치와 힘을 사용하여서 일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너를 황후로 세우신 것이 아니겠느냐. 강력하게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에스더는 최종 답변으로 16절에 보면 모르드개에게 부탁합니다. 그리고 결단합니다. “수산궁에 있는 모든 유다인을 다 모으고 자기를 위하여 사흘을 금식하고 자기도 금식한 후 법을 어기고 왕에게 가겠다고 말한 후 그 유명한 말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16절). 백성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자신도 금식하고 규례를 어기면서 왕앞에 나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자세입니다.
결국 왕앞에 나가지만 죽임을 당하지도 않고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의 모험은 성공하였습니다. 나라를 어지럽히던 불의의 세력 하만의 모략이 왕에게 알려지고 왕은 유대인을 죽이려고 세워 놓았던 수많은 사형틀에 대신 그를 처형하였습니다(7:10).
바로 에스더가 기도를 부탁하고 자신도 죽기를 각오하고 왕앞에 나아갈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남니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주십니다. 멸망 직전에 구원하십니다. 흉계를 꾸미던 하만이 오히려 망합니다. 왕의 마음을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에스더를 통하여 민족을 구원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느브갓네살 왕이 만든 신상에 절하지 아니한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서도 살아 남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의 일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모든 일들 죽기를 각오하고 나간다면 행한다면 분명 하나님의 도우심과 모든 민족을 향한 구원의 역사들을 이루실준 믿습니다. 이웃과 교회를 잘 섬기시길 바랍니다.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면 살리기 위해서는 죽음도 각오하는 결단력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 “내 안에 사는 이 오직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우리 주님이 우리를 죄에서 살리시기 위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한 것도 바로 이런 것 아님니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위에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도 철저하게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아 가야 합니다. 연약한 여인 에스더도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 우리의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요? 모든 것이 이 때를 위함인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14절 하반절 말씀처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말한 교훈은 오늘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지혜이며 미래를 여는 키가 된다. 우리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열심히 성공적인 삶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평화와 발전과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나라와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위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생명도, 은사도, 물질도, 지위도 한번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시려 부르시고 믿게 하시고 오늘날까지 역사하신줄 믿습니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은 생사를 가르는 결정적 결단입니다. 에스더가 어떻게 여자 몸으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던져서 자기 민족을 구원을 했을까요?
1. 에스더는 오늘 내가 여기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내가 여기 있음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내가 똑독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에스더를 깨달았습니다. 에스더는 이 페르시아 나라에 포로로 잡혀온 베냐민지파의 딸로 태어 났습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어렸을 때 부모가 다 돌아가셨습니다. 노예로 끌려와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에스더는 친척 모르드개의 양딸이 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을 지내다가 이 나라 왕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늘 생각하기를 내가 유대인으로서 포로로 잡혀와 높은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이 은혜다 생각했습니다.
오늘 내가 여기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모르는 사람은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깨달은 자식입니다. 아무리 잘 배우고 아무리 많은 걸 가졌어도 부모의 은혜를 못깨닫는 자식은 절대 효도하지 못합니다. 은혜 못 깨달은 사람은 태어날 때는 어머니 배 아프게 하고 커서는 어머니 아프게 하고 그러다 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된다 그걸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기의 인생 모두를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금식한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이 나라 법은 왕이 부르지 않았으면 왕후일지라도 왕 앞에 나갈수 없습니다. 나가면 죽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고백합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죽어라 그러시면 나는 죽겠다 그런 뜻도 있고 반대로 지금까지도 하나님이 나를 은혜 가운데 지켜 주셨으니 내가 아무리 왕의 법을 어기고 나갈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죽음에서 지켜주시리라고 하는 강한 믿음의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있음을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믿습니까? 우리 인생은 종종 그런 실수를 범합니다. 무엇이 부족하고 없을 때 아쉬울 때는 하나님께 막 구합니다. 몸부림치면 하나님 채워주세요. 좀 이루어주세요. 간절히 구하다가 그 내가 원하는게 딱 채워지면 마치 내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필요없습니다. 이제는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내 형편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 간섭하지 마세요. 내 인생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마세요. 그런 마음을 가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빼버리면 제로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빠지면 내 인생은 끝남니다. 인간들이 노력해서 바벨탑을 쌓으려고 했습니다만 하나님이 떠나 버리니까 바벨탑은 무너졌습니다. 그건 마치 이와 같습니다. 내가 아무리 아름답게 꾸미고 아름답게 집을 아름답게 꽃을 가꾸고 그랬어도 태양이 없어지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 집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태양이 없어지면 이 지구에 이 지구는 절대 온도에 떨어져요. 영하 273도로 떨어집니다.
내가 건강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건강한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내게 이렇게 많이 물질준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헛된데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권세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지금 저마다 다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자신이 가장 적임자라 생각하고 후보가 난무합니다. 대통령이 되려면 대통령으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인줄 알고 정말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정권의 야욕으로는 안됩니다. 나라가 어려워도 무릎을 끓지 못한다면 힘듬니다. 나라가 혼란해집니다. 눈이 어두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여기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오늘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에스더는 알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 같이 포로된 여인을, 수 많은 사파의 여인들을 제치고 고아와 같은, 포로 노예의 딸이 왕후의 자리에 올려놓았는지 에스더는 알고 있습니다. 네가 왕후의 지위를 얻은 것이 바로 이 때를 위함이 아닌가? 이 사실을 깨달은 에스더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생명을 걸고 왕앞에 나간 겁니다.
에스더가 자기 민족이 죽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두 가지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혼자 나 혼자 살겠다고 간섭 안하고 잠잠히 혼자 있으면 자기는 왕후의 위를 계속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왕후의 일을 버릴지라도 나는 내 민족과 함께 싸우겠다 그리고 나설 수 있습니다. 대게 우리들은 이 둘 중에 에스더는 왕후 그 어마어마한 자리를 포기한면서까지 나는 내 민족과 함께 살겠다고 선택한 겁니다. 그 에스더가 죽었습니까? 에스더가 망했습니까? 그런 에스더를 하나님은 더 견고하게 해주시고 더 높여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모세는 애굽의 왕국에서 공주의 아들로 호화 호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의 왕궁에서 사는 그것보다 자기민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겁니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그리스도인들이 그걸 잊어버리고 살 때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 학교 선생님이 계시죠?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 학교의 선생님으로 세우신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내가 학교 선생님으로서 오늘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그걸 깨달으셔야 합니다. 전도하기 좋은 분들이 의사입니다. 환자들이 올 때 정말 의사의 한 마디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게 환자를 보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이 사람의 육신에 병만 고칠 게 아니라 그의 영원의 병을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능력으로 고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면서 환자를 돌봐야 합니다. 사업을 합니까? 장사를 합니까? 공부를 합니까? 오늘 내가 무얼 할 것인가를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아야 돼요. 에스더는 그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자기의 왕후라는 지위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고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섰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마 그런 생각 한번도 안 해본 사람 없을 것입니다. 나도 믿음 생활좀 잘해 봐야 되겠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 전도좀 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기도도 해야지 결심합니다. 그런데 왜 안됩니까? 안되는 이유는 그것을 하려면 내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합니다. 내가 주를 위해 봉사하려 내가 즐기던 무언가를 희생해야 되는데 이걸 안하는 것입니다. 안하니까 마음만 먹었다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마음만 먹었던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옳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생각하니까 자기의 왕후의 자리를 걸고 나섰던 것입니다. 내가 왕후에서 떨어져도 좋다는 이게 하나님의 뜻이니까 나는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금 어느 위치에 세워 주셨던지 간에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3. 에스더는 자신보다 자기의 민족을 사랑한 여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신앙인들 보면 전부 애국자들입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자기 생명과 백성을 바꾸겠다는 각오로 나섰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소금 한 주먹이 그 생선이 썩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1200만 성도들이 한 줌의 소금이 돼서 이 민족 앞에 뿌려질 때 이 민족은 절대 도망하지 않습니다.
에스더같은 믿음을 가집시다. 에스더는 믿음의 여인입니다.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별처럼 빛나는 여인입니다. 여러분! 에스더와 같이 믿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구원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스더는 그 화려한 황후의 생활을 포기합니다. 영광과 부귀 다 포기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유대 백성들에게 자신을 위해 사흘 동안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그래서 유대 백성들을 구하게 됩니다. 에스더는 이렇게 헌신함으로 민족을 건지고 크고 놀라운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와 축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이 시간을 위하여 나는 존재한다. 이 시간을 위해서 나는 가노라” 하는 중요한 결단이었습니다.
에스더 뿐만 아니라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 같은 중요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이 때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과거가 있어서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간을 위하여 내 과거는 있었다는 결단을 따라서 삶의 의미와 운명이 결정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며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나의 잘못된 것을 부정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큰 구원과 영광을 약속해주십니다. “주님! 이 때를 위하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의 교회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내가, 건강과 은사와 물질과 시간이 생명이 여전한줄 믿고 놀라운 의미의 삶을 하나님앞에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대의 에스더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우리 교회에 에스더가 되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의 각오를 가지고 나갈 때 자신의 구원과 민족의 구원과 교회의 승리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민족을 위해 간절히 구하며 영광돌립시다
에 4:8- / 강성찬목사
“기도교의 역사는 기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다른 이름이 만미의 기도 하는 집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를 이끌어 나갑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한 사람은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유다 백성이 숭배하던 우상을 제거하고 그들을 여호와께 대한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히스기야 왕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사형 선고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받게 됩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언을 듣고는 벽을 바라보고 앉아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하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는 길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진실과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여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는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히 행한 것이 아닌, 그의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또한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왕으로서의 체통을 무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구하는 가난한 자의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통곡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응답 주시기를, 십오 년의 생을 연장시켜 주시며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너무나 애절하게 눈물 뿌려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이사야 선지자에게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상처에 놓으니 나았다고 합니다(왕하 20:5-7)
기도의 응답으로 병을 고침 받고 나라의 위기도 해결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큰 기적으로 애굽에서 건짐을 받았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거기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엄숙히 맹세했습니다.
모세가 영적 승리를 경험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으로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권능과 사랑을 보여 주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잊어버렸습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더디게 내려오자 두려워져 아론에게로 갔습니다. 모세가 돌아오지 못하여 그들을 인도할 수 없으니 백성을 인도할 대리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아론에게 신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이 아니고 다만 따르기 위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을 요구한 것입니다. 아론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백성들에게 금 고리를 가져 오게 했고 그것들을 녹여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론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절일을 선포했습니다. 다음날 백성들은 그것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모세가 산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은 그에게 백성이 부패되었고, 목이 곧게 즉 우둔하고 둔감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그 백성을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의 반역에 대해 그들을 멸할 것이며 모세와 함께 시작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은 주의 백성임을 강조하며 애굽 사람에 대한 증언과 족장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하여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을 탄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멸 당함은 바로와 애굽의 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또한 그로인해 애굽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비웃게 되리라는 것을 들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탄원하면서 백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의 두 돌판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와 함께 진에 가까이 이르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송아지 앞에서 춤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모세는 대노하여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버렸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의 언약 파기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우상을 불사르고 그것을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백성들로 그것을 마시게 했습니다. 이 행위는 송아지 우상의 무력성과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낸 것입니다.
모세는 또한 아론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론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백성을 비난했고 우상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회개치 않은 자들을 심판했습니다. 모세는 진 앞에서 송아지 숭배에 연루되지 않은 모든 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이때 레위 자손이 모세에게로 다 모여 왔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진을 왕래하며 우상 숭배한 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3천 명의 이스라엘 자손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무서운 임무를 완수한 후에 레위 자손은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우상 숭배의 선동자들이 죽었을지라도 모세는 나라 전체가 범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 산에 올라 여호와께로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다시 하나님 앞에 그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탄원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죄를 사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이 기록하신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제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출 32:12-13)...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라고 기도 합니다.
이 기도는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주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이 백성을 진멸하고 나로 큰 나라가 되게 하는 것도 싫습니다, 이 나라 멸망하는 것보다 내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하는 기도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사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출 32:34)고 했습니다.
모세의 목숨을 건 기도가 그 백성을 구원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을 높여 페르시아 제국의 서열 2위 자리에 앉혔습니다. 하만의 신분이 상승하자, 모든 신하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함으로써 특별한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그런데 대궐 문 앞에 있는 관리로서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무릎도 꿇지 않고, 절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한 신하가 모르드개에게 절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림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러자 신하는 이 사실을 하만에게 알렸습니다. 신하들의 보고를 듣고 난 하만은, 실제로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의 모습을 보고 분노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만을 죽이고자 했으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선 더욱 분개하여 유대 민족 전체를 죽여야 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포로로 끌려 온 하찮은 유대인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서인지 엄청난 보수를 하려한 것입니다.
하만은 유대인들을 죽일 시간을 정하기 위해 부르를 사용하였습니다. 부르는 제비뽑기를 의미하는데 하만도 제비뽑기를 통해 거사일을 결정코자 했던 것입니다. 하만은 첫째 달 곧 니산월에 제비뽑기를 하였는데, 유대인을 죽일 날짜로 12째 달 곧 아달월이 뽑혔습니다. 다시 말해 12달의 시간이 유대인들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만의 음모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시간적인 여유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거사일을 정한 하만은 이제 왕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음모를 왕에게 말함으로써 재가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만은 왕에게 가서 유대 민족이 왕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거짓 고소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유대인들을 처형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왕에게 제안하면서, 은 일만 달란트는 자신이 내겠다고 하였습니다.
왕은 하만의 숨겨진 음모도 모른 채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반지를 하만에게 주었습니다. 이로써 유대인의 대적인 하만은 무제한의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만은 왕의 이름으로 제국 전역에 조서를 선포하였습니다. 이 조서는 다양한 언어들로 번역되어 각 도에 보내졌습니다. 이 조서에는 12월 13일에 각 도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죽여 진멸하라는 왕의 명령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또한 유대인의 재산까지도 탈취하고 몰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왕의 조서를 받은 각 도의 방백들은 하만의 명령대로 잔인한 살상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12월 13일을 기다리며 근 1년간을 준비코자 했던 것입니다.
하만의 조서는 이내 곧 수산 성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이제 하만의 끔찍한 음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옷을 찢었는데, 이는 자신의 비통함을 나타내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간청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커다란 슬픔과 참회를 표시하는 굵은 베를 입고, 머리에 재를 쓰고서 대궐 문 앞에서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어느 날 에스더는 시녀와 내시를 통하여 모르드개가 대궐 문 앞에서 굵은 베옷을 입고 통곡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에스더는 무슨 연유로 모르드개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안타까운 마음에 바꿔 입을 의복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자신의 행동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기에 에스더의 호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음을 알고 내시인 하닥을 모르드개에게 보내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시켰습니다. 내시인 하닥이 에스더의 명대로 모르드개를 찾아갔습니다. 하닥은 그에게 어찌하여 공공 장소에서 이 같은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모르드개는 하닥에게 하만의 조서의 초본을 주면서 에스더에게 전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만의 모든 음모를 설명하면서,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곧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르드개의 소식을 접한 에스더는 너무나도 놀라 당황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르드개의 요청과는 달리 자신에게 어떠한 힘도, 능력도 없음을 에스더는 알고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즉시 모르드개에게 자신의 처지와 생각을 알렸습니다. 곧 자신은 왕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더의 소식을 접한 모르드개는 다시 회답을 보냈습니다. 모르드개는 말하길, 에스더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유대인들을 구원해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스더가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를 통해 민족을 구하려는 책임을 회피한다면 에스더와 그 집이 반드시 심판 받으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동시에 에스더도 유대인이기에 하만의 음모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므로 하만에게 죽든지, 아니면 왕을 알현하다가 죽든지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가만히 죽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다가 죽는 편이 낫다는 점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때를 위해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왕후로 삼은 것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모르드개의 권고를 들은 에스더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가기를 마음먹은 것입니다.
에스더는 이 일을 하기 전에 모르드개에게 한 가지를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온 유대인들이 삼일 동안 자신을 위해 금식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비장하면서도 단호한 결단을 보면서 마음속으로부터 뜨거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에스더의 부탁대로 온 유대인들에게 3일 동안의 금식을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르드개를 통하여 왕후 에스더에게 이 문제의 해결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왕후의 임무는 이 문제를 왕 앞에 가지고 가는 일이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생명을 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들어오라고 하지 않는데 들어갔다가는 왕이 규를 내밀지 않으면 죽는 법인데 뜻밖에 왕이 금규를 내밀며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이나 하만과 함께 왕을 초대하여 잘 대접하다가 왕이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할 때 울며 “왕이여 저를 살려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깜짝 놀란 왕은 누가 너를 죽이려 한단 말이냐고 하자 “바로 이 하만이 나와 내 민족을 다 죽이려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화가 나 밖으로 나간 왕이 다시 들여다보니까 하만이 에스더의 무릎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보고 “이놈이 왕후를 강간까지 하려 해?” 하며 명을 내려 끌어다 죽였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워놓은 50규빗 장대에 자기가 매달려 죽고 온 유대인은 살아났습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22:30-31)
무너져 내리는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고 하나님 앞에 막아서서 멸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며 부르짖는 사람이 있으면 구원해주려고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한 고로 진노의 불로 멸해버리고 말았다 말씀합니다.
기도하는 백성은 망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하셨습니다.
기도에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셨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목숨 걸고 부르짖고 기도하면 보통 상식으로 예측할 수 없었던 신비한 방법으로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6.25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줄 믿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며 영광돌리며 사명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위기에 대처한 에스더
에 4:8-17 / 이종윤목사
유대인들에게는 큰 명절이 있습니다. 소위 불임절이라고 하는 이 명절은, 유대인 백성이 전멸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왕의 선언 이후에 에스더라는 하나님의 여종의 기도와 헌신, 용기에 의해 백성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하여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 에스더를 통해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는 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Ⅰ. 에스더는 하나님 신앙을 가졌다
597년 B.C.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그 때의 유다왕 여고냐와 삼천명의 귀족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 때 모르드개와 그 가족들도 함께였습니다. 그리고 이 가족 중에 한 명이 에스더였습니다. 127주 간 인도에서 에디오피아까지 통치했던 파사의 아하수에로 왕은 즉위 3년에 6개월 동안 잔치를 베풀고, 또 7일동안 수산성 시민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푸는데, 뛰어난 미모의 아내인 와스디를 자랑하고 싶어 왕비를 잔치석상에 초대합니다. 그러나 왕비는 그 초대를 거절하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와스디는 쫓겨나고 새 왕비를 간택하게 됩니다. 그 새 왕비가 바로 에스더인 것입니다. 에스더는 용모가 곱고(환하다) 아리따웠으며(착하다) 순종적인 여인이었습니다. 미모와 덕뿐만 아니라 깊은 하나님 신앙을 가진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아픔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더 하나님만 의지하게 됨으로써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Ⅱ. 에스더는 기도로 위기를 극복했다
에스더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기도로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간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된지 5년 후에 간교한 하만의 계교로 유대민족 전멸 계획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때 에스더는 미모나 지혜로 왕을 꾀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수산성의 유대인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자신 역시 밤낮 사흘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기도는 기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방편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 정치 도덕, 가정, 개인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일은 기도뿐입니다.
Ⅲ. 에스더는 자기희생을 각오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마음으로. 민족 전멸이냐 아니면 위기 정면 돌파냐 하는 갈림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죽음의 자리로 걸어갔습니다. 당시 왕이 부르기 전에 왕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면 죽음을 당하게 되어있었는데, 에스더는 죽음을 각오하고 왕이 머무는 내전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왕은 에스더가 다가오자 마음에 감동이 생겨 기쁘게 맞아줍니다. 그러면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원하는 것을 말하기 보다 잔치를 베풀겠다고 하며 하만을 꼭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자 지혜였습니다. 이 한순간에 의해 하만은 결국, 자기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은 모르드개를 걸어 죽이기 위해 세운 장대에 자기가 죽게되고, 왕비와 그녀의 민족의 전멸을 꾀한 모두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위기 상황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왕앞에 나간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구한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건너야할 홍해가 있습니다. 이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첫째로 민족과 개인의 흥망성쇠를 한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위기를 타개해야합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중보기도한 것과 모세와 에스더가 민족을 위해 중보기도 했듯이 우리도 복음화된 통일조국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려야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보다는 전체를 생각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양보하여 오늘의 위기를 극복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