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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곤명 관광 기행록
우리 재경 안동사범 11회 동기생 11명이 중국 곤명을 다녀왔습니다. 3월 16일부터 21일까지 5박 6일간(기내 1박 포함) . 여기에다 기행록(기행문이 아님- 문장력이 부족하여 보고 들은 걸 메모한 것을 그대로 기록함)을 적어 올립니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장황하지만 자세히 읽어 보면 재미도 있겠고, 곤명을 여행하실 분들에게는 참고가 될 줄로 생각 됩니다. 감사합니다. 기록자 대머리 김정태 드림
소석림
대석림
소수민족 이족(彛族)의 민속 복장을 빌려 입고 찍었습니다.
중국 곤명 관광 기행록
중국 곤명 여행을 출발하기까지 참 사연도 많았다. 우리 재경안동사범 11회 동기회에서 작년에 여행을 하기로 하고 대만으로 5박 6일간 계획을 했더랬는데 참가 희망자 미달로 계획을 다 세워놓고도 실행을 못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지난 해 말에 다시 여행을 하자는 말이 나와 새로 추진을 했는데 예상하기로는 참가자가 2∼30명을 될듯해서 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멋진 팀이 되겠구나하고 기대를 했는데 가겠다는 친구가 15∼6명에서 마지막에는 11명으로 줄어 거기에서 만족을 하고 출발을 하게 되었다.
보태서 대형사고까지 날 뻔 했다. '디디투어'란 여행사를 통해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동기 김경자(金京子)씨는 자녀 혼사 관계로 여행사에다 참가가 불가능하니 처음 보낸 예약자 명단에서 빼 달라고 했는데, 엉뚱하게 김경자씨는 두고 김정자(金政子)씨를 명단에 빼버린 것이다. 나중에 여자 친구들이 억지로 우겨 김경자씨도 함께 여행을 하기로 하고 여행사에 연락을 하니 김경자씨는 명단에 들어있어 중국 비자신청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멀쩡한 김정자씨를 빼버렸단다. 너무 황당했다. 출발 5일을 앞두고 부랴부랴 김정자씨 혼자만, 단체비자가 아닌 개인비자를, 그것도 긴급 비자로 신청해서 일이 수습되었다. 김경자씨가 다시 가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김정자씨는 인천공항에서 가방 들고 집으로 되돌아올 확률이 100%. 아이 진땀 나!!!
3월 16일
* 3월 16일 오후 7시 30분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같은 날 24시 10분(곤명 현지 시각)에 곤명에 도착했다. 4시간 45분이나 소요되는 먼 거리였다.
*곤명과 서울과는 1시간의 시차 발생. 서울의 12시가 곤명에서는 11시
*33살 나는 조선족 청년 가이드 문성걸씨가 공항에서 꽃다발을 준비하고 우리를 맞았다. 외국 여행하다가 공항에서 꽃다발 받기는 처음이다.
*문성걸씨는 어릴 적에 두만강 물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두만강 물이 똥물로 변하였단다. 교포 3세로 초등학교는 북한식 교육을 받았고, 어머니께서 중국인처럼 살라고 중학교부터는 중국인학교에 입학시켜 중국 교육을 받았으며 중국어 전문학교를 졸업했단다.
*조선족이 동북 3성(요령성, 흑룡강성, 길림성)에 과거에는 200만 명이나 살았으나 지금은 100만 명 정도에 불과함. 살고 있는 사람도 대부분이 노인들
*조선족 숫자가 줄어들자 중국 정부에서는 무제한 출산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음. 한족(漢族)은 1가정 1자녀로 제한함
*곤명공항에서 호텔까지는 30분 정도 걸렸다. 호텔에 도착해 씻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호텔은 닉슨호텔(LA NICE INN HOTEL). 4성급 호텔로 곤명에서는 최상급이라고 하는데 객실에 냉장고도 없는 3류 호텔이었다. 전에 딴 팀과 장가계 여행을 할 때도 냉장고가 없어 더운 날씨에 고생을 했는데 중국에는 호텔에 냉장고 없는 게 일반적인가?
*룸 메이트로 4박을 아래와 같이 정해서 지냈다. 김영길이만 계속 홀로 자게 해서 미안!!!
정공자-김덕자 이영자-신춘자 김정자-김경자
김정태-최익창 이길영-권오기 김영길-독방차지
◇ 4계절 내내 꽃이 피는 도시-곤명(昆明)
▷곤명(昆明) 개관
베트남과 국경을 맞닿은 곤명은 중국 남단 운남성의 성도이며 해발 1,900m 의 운귀고원(雲貴高原)에 위치해 있다. 사계절 내내 꽃이 끊이지 않고 피어 꽃의 도시라는 별칭과 사시사철 온난한 기후 때문에 봄의 도시(春城)라고도 불린다. 여름에는 기온이 20℃를 넘지 않고 겨울에는 8℃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이 도시에는 한족은 물론 이족(彛族), 회족(回族), 백족(白族), 묘족(苗族), 합니족(合尼族) 등의 20여 개 소수민족이 어울려 살 고 있으며 전체 인구는 약 2백만 명 정도 된다. 곤명이라는 이름은 고대 이 지방에서 생활하고 있던 민족의 이름이며 사마천의『사기(史記)』서남이전 에 나온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곤명은 산의 경관이 빼어날 뿐 아니라 유서 깊은 사원과 건축물 등이 있으며 중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호수인 면적 330㎢의 전지호수를 끼고 있다. 또한 인근에 있는 대리(大理), 여강(麗江), 석림(石 林), 서쌍판납(西雙版納) 등의 관광지로 가는 중심지로 북경과 서안에 이어 3대 관광지로 꼽히는 도시이다. 도시 인구는 약 1백93만정도이다.
운남성(雲南城)에는 중국의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볼거리가 있다. 1년 내내 눈이 덮여 있는 산봉우리, 코끼리와 원숭이를 볼 수 있는 열대 정글, 한, 회, 이, 묘, 합리 등 25개의 소수 민족의 다양한 생활상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운남을 가리켜 살아있는 사회발전역사라고도 한다. 만약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소수민족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오지를 탐방하고 싶다거나 한다면 운남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 '곤명'의 유래
- 곤명은 고대에 이 지역에 있던 부족의 명칭으로 이족(彛族)의 고대 언어의 음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1274년 원대에 곤명현이 생기면서 운남성의 성도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1919년 중국 지역을 공식적으로 분할 정리하면서 운남시 정부가 생기고 1922년 정식으로 곤명시가 되었습니다.
▷역사
곤명은 약 2,4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기원전 279년 초(楚)나라의 한 장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지배한 뒤 한(漢)나라를 거쳐 원대(元代)에 곤명현이 설치되었다. 이 곤명(昆明)이라는 이름은 이 일대에 살고 있던 부족의 이름이다.
곤명은 한때 프랑스의 조차지로서 카톨릭 대성당, 수녀원, 프랑스인들이 출입하는 클럽 등이 있었다. 하노이에서 시작되는 협괘 열차는 1895년~1904년 프랑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운행이 되고 있다. 프랑스가 원한 것은 이 지방의 주석, 텅스텐, 아편 등이었다. 이 지방은 또 목재, 고무 쌀 등이 풍부하다. 곤명은 태평양 전쟁에는 토호들의 수중에 있었으며 일본의 동남아 침략의 교두보로도 이용되었다.
▷기후
곤명(昆明)은 해발 1,895m의 고도와 아열대 지역에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훌륭한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다. 사시사철 봄처럼 따뜻하지만 지난91년에는 눈이 조금오기도 하였다. 7월 중 최고 온도는 29도이며 1월 최저 온도는 영하 1도이다. 대개는 5월부터 10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비가 오며 이 기간의 강수량은 약 1,500m 정도이다. 동백꽃이 만발한 2월이 곤명을 여행하기에는 가장 좋은 시기이다.
3월 17일
*첫날 9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원통사(圓通寺) →취호공원(翠湖公園)→ 서산(西山) →화훼시장(花卉市場) 순으로 관광을 했다.
*가이드 문성걸씨가 7년 전에여기 곤명에 와 가이드 일을 했는데 7년 간 곤명은 관광지 개발로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단다. 쓰레기장이 부자 동네로 개발이 되었고 흙먼지길이 8차선 길로 바뀌고 있단다.
*곤명시는 인구가 600만 명이 넘고 자가용이 100만 대가 넘는다.
*1자녀만 낳게 되어 있어 딸을 낳으면 출생신고 않는 경우 허다해, 초등학교 입학 시에나, 혼인을 할 때나 되어서 주민등록하는 경우 많다고 함.
*곤명의 동쪽 지역은 8∼90%가 신축 건물
*이 지역 사람들의 1인당 소득이 한화로 월 50만원 정도인데 고소득자는 하루 밤에 $2000을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끼니를 굶을 정도의 사람도 있음.
*여기에서 30평짜리 아파트 시세가 한화로 약 1억원 정도
*곤명 시내에서 지금 매일 자동차가 300대씩 불어남
*현대 포크레인 상해 지사장 자리는 경합이 심한 자리였는데, 본사의 빽을 이용해 상해 지사장을 한직인 운남성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있었는데, 상해는 개발이 어느 정도 되었고, 운남성은 갑자기 개발 붐이 일어나 운남성 지점장으로 밀려 난 사람이 대박을 터뜨렸다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고 한다.
*곤명은 평균 해발 1894m로 사철 따뜻한 봄 날씨가 계속되는 살기 좋은 곳이란다.
*옛날 나라에서 이곳으로 귀양을 온 사람들이 귀양살이를 끝내고도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일이 빈번해 황제가 그 연유를 알아보니 사철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날만 계속되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 보고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사람 살기에 아주 좋은 곳이란다.
*년 평균 기온이 14.7℃로 겨울철에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음
*그러나 일교차가 심하고(지금은 15℃∼24℃) 날씨 변화가 심하여 우산은 항상 갖고 다녀야 한다고 했다.
*자외선이 강해 우리 같은 관광객은 썬크림을 바르는 게 필수로, 현지인들은 피부가 "검검스레한 사람"이 많다고 해 우리 일행이 웃고 "검검스레하다"란 말을 여행 중 자주하며 웃곤 했다.
*중국에 54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여기 운남성(雲南省)에 52개 소수 민족이 살고 있고, 곤명에만 15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단다.
- 석림(石林) 지구에는 이족이 산다.
*중국은 워낙 큰 나라라 지역이 다르면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 듬
*운남성의 크기는 한반도의 2배, 남한의 4배나 되는데 인구는 5,000만 여명
*옛 운남성은 토번국(土蕃國)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운남성 자치주
*이웃의 대리는 옛 대리국(大里國)이 있었던 곳으로 이족이 다스리던 나라이다. 대리석 산지로 大理石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 용맹한 진시황도 운남성만은 통일을 못함
*운남성은 94%가 산지(山地)로 평지는 6%에 불과하다.
*운남성에서는 해발 76.4m인 곳도있다.
보이차 普洱茶 |
*티벳(신장) 사람들은 육식을 하는데 차를 마시지 않으면 안됨. 차가 티벳으로 들어가는 걸 막으면 티벳인들의 수명이 반으로 줄어 들 것이라 함. 차가 혈관의 기름기를 씻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
*운남성이 중국의 차 주산지로 티벳인들이 차마고도(車馬古道)를 통해 운남성에서 차를 구입해 갔는데 대리국에 있는 설산(雪山)에 막혀 한두 달을 지체하다가 가는 수가 있어 6개 월여 동안 눈비바람을 맞아 차가 변질되는 수가 많았다. 변질되었지만 그 고가(高價)의 차를 버릴 수가 없어 변질 된 줄 알고 마신그 차가 사실은 발효가 된 명차(名茶),「보이차」가 된 것이다. 곤명시에서 멀지 않은 곳이 보이시(普洱市)가 있는데 보이시(普洱市)에서 사 간 차라 「보이차」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가이드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보이차는 만병통치약이란다. 혈압과 당뇨, 위장 등에 아주 좋은데, 하루 이틀 마셔서 효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몇 개월을 마시면 반드시 몸에 좋은 반응이 나타난단다. 특히 혈중 콜레스트롤을 낮춰주는 역할을 단단히 하는 모양이다. 변비를 없애주고 혈관에 낀 기름기를 없애주며 다이어트 효과도 크단다.
*끓은 물에 1∼2분 넣었다가 냉장고에 보관해 물 마시듯 마시면 좋다고 했다. 하루에 너댓 컵 마시는 게 좋단다.
*재탕(再湯) 뿐만 하는 것이 아니라 3탕 4탕 5탕까지, 그러니까 색깔이 나올 때까지 끓여 먹을 수 있단다.
*녹차는 끓어먹는 것이 아니라 '우려서' 먹지만 보이차는 끓여서 먹는다.
*보이차는 찻잎이 큰 것일수록 좋은 차이다.
* 보이차는 오래 숙성이 될수록 좋은 차. 오래된 보이차는 만지면 부슬부슬하고 색깔은 갈색으로 변한다고 함. 전에 사 두었으나 사용하지 않은 보이차는 중국 여행을 할 때 가져가면 살 때보다 비싼 값으로 사 줄 수도 있음.
*보이차의 보관 : 통풍이 잘되고 약간 습한 곳에 한지(韓紙)로 싸서 보관. 직사광선은 절대 피해야 하고 화장실도 피해야 함. 부엌의 열린 찬장이 적당
*한국의 인삼을 곤명에 심으면 무 같은 인삼이 생산됨. 차도 기후 토질이 맞아야 우수한 차를 생산할 수 있음.
*보이차의 찌거기를 냉장고에 넣어 두면 냄새 제거에 아주 효과적임. 찌꺼기를 따뜻한 물에 넣어 1시간쯤 두었다가 그 물에 발을 담그면 무좀이 없어짐
*오래 보관했던 보이차에서는 뜬내가 나는데 이 냄새는 보이차 고유의 냄새이니 절대 버리지 말 것.
*차의 유효 기간 : 우롱차 - 5년
녹 차 - 3년
보이차 - 유효 기간이 없고 오래될수록 고급차가 됨
*차 매장에서 보이차의 가격
-8년산 : 8만원 호가한 것을 DC해서 7만원에 삼
-5년산 : 6만원
*장족이나 납시족은 칼을 갖고 다니는 풍속이 있는데, 보통 사람이 칼을 지니고 다니면 현행범처럼 잡아가 벌을 주지만 이들만은 옛 풍속에 따라 칼을 지니고 다녀서 묵인을 해 줌
*중국은 치안이 불안. 택시 안 운전기사 주위를 철망으로 가려 승객과 차단 시켜 놓음.
*지은 지 좀 오래된 건물의 모든 창을 철창으로 가려 놓은 건물을 자주 봄
중국에서의 한류(韓流) |
*중국에서 한국 문화에 눈 뜬 동기 : 한국의 드라마 때문. 특히'대장금'이 결정적이 게기가 됨. 이 드라마로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호감을 가짐
*한국 풍의 복장을 선호하게 되었고, 특히 성형 수술 붐이 일어남
*성형외과 병원에서 고액을 지불하고 성형외과 의사 초빙
*한식관(韓食館)이 16개로 늘어났고 중국인들이 한글 간판 달고 한식관 열어 대박 터트린 식당도 있음
*일본차가 주종을 이루던 시장을 한국의 현대차가 중국 시장을 흔들어 놓음
- 차 값의 3분의 1만 내고 차 인도. 나머지는 분할 납부
*핸드폰 : 비싸지만 삼성 제품이 석권. 한국 돈으로 100만 원짜리 신제품 나와도 주저하지 않고 구입함
*가전제품 : 한국 제품 씀. 일본 제품은 재수 없다며 기피
- 일본에 대한 혐오 의식 뿌리 깊음
*엔고로 상대적으로 일제 차가 비쌈.
-현대 찝차 : 17∼8만 위안
-일제 혼다 : 40만 위안
*한국인이 직영하는 식당이 2∼3개가 있는데,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 한국인이 직영하는 식당보다 음식 맛이 더 좋음
*남자들이 퇴근해서 마누라에게 뭐 먹고 싶으냐고 물어 시장 봐 앞치마 두르고 밥 짓는 일 보편적인 현상
*전족(纏足)한 여성이 거의 사라졌으나 산족(山族) 7∼80대 노인 중 혹간 볼 수 있음
*전족을 한 여성들은 자기의 가슴은 만져도 화를 안내지만 발을 만지면 불 같이 화를 냄
*단 발을 만져도 화를 안내면 그 날 밤을 함께 해도 좋다는 의사 표시임
원통사 (圓通寺) |
원통산 남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원통사는 곤명 시내에서 가장 큰 불교 사찰로 운남성 불교협회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당대(唐代)에 지어진 이 사찰은 곤명시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찰 중의 하나이다. 이미 12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동시에 곤명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이다. 사찰 안에는 청 광서(光緖) 연간에 세워진 좌불상이 있고, 대전(大殿) 중앙에는 두 개의 10m 높이의 원주가 있는데, 각각 한 마리의 화려한 용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곤명시 시민들이 불교 활동을 하는 주요 사찰 중 하나로 매년 음력 초하루와 보름이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곤명의 문화는 원통사 문화다'라고 할 정도로 곤명 시민들의 의식 세계와 밀접.
*곤명 사람들의 80%가 불교도
*원통사는 순수불교라기보다 도교(道敎)와 혼합된 사찰
*우리 여자 일행도 도교 형식으로, 커다란 막대기 모양의 향을 사서 분향(焚香)을 하고 불공을 드림
*향로 모양의 탑을 어루만지며 탑돌이를 하면 소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우리 일행이 모두 탑돌이를 했는데 그 탑이 놋쇠로 되어 있어서 하도 많은 사람들이 만져 반질반질 광택이 났음
취호공원 (翠湖公園) |
*명나라 말엽 간신인 오삼계라는 장수가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의 공신(功臣)이 되어 이곳 왕, 즉 평서왕을 제수 받아 곤명에 와서, 자기의 애첩 (愛妾) 진원원을 위해 만든 공원이란다.
*이 공원은 입장료가 없어 누구나맘대로 드나드는 곳이라 가이드의 말이 소지품 관리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원의 크기가 싱가포르 전체 크기만 하다니 가히 짐작이 가는데, 호수 (담수호) 속에 여러 개의 옛 건조물이 들어서 있어 고색창연한 느낌이 들었다.
*이 공원에서는 여러 팀이 춤을 추고 있었고, 전통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 하거나 합창을 연습하는 팀도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공원을 사용했 으면 좋겠다는 감이 들었다.
서산과 용문 (西山과 龍門) 그리고 곤명호(昆明湖) |
용문 들어 가는 문
고원의 진주 곤명호 |
곤명의 서남쪽, 남북으로 40km, 동서로는 8km로 길쭉하게 뻗어 있는 호수이다. 곤명호(昆明湖)라는 이름보다는 운남의 옛이름을 따온 전지(澱池)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면적 340㎢의 중국에서 여섯 번 째로 큰 담수호다. 또한 해발 1,885m에 위치하기 때문에 '고원의 진주'라고도 불린다.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8m로 그다지 깊지 않으며 호수에서 유람선을 타고 즐길 수도 있고, 담수호답게 여러 양식장들이 만들어져 있다. 또한 서산산림공원에서 내려다 볼 수 있고, 주변 경치도 좋아 볼만한 명소들이 10여 군데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공주님이 몰래 대궐을 빠져나와 세상 유람을 하다가 곤명에 와서 어느 나무꾼을 만나 사랑에 빠져 함께 살게 되었다. 백방으로 공주의 행방을 수소문 한 황제는 공주가 나무꾼과 살고 있는 걸 알게 되자 부하를 시켜 나무꾼을 죽이고 나서 공주에게 황궁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사랑하는 남편이 죽은 걸 안 공주가 사흘 낮과 밤을 울어 그 눈물이 곤명호가 되었다는 황당한 전설이 전해 온다고 한다.
*곤명호가 워낙 크니까 담수호(淡水湖)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바다 해자를 넣어 양중해(陽中海)라고 부른단다.
서산(西山) |
곤명시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 운남민족촌을 구경하다 보면 그 주변으로 병풍같이 둘러싼 커다란 돌산을 볼 수 있는데, 그 산이 서산(西山)삼림공원이다.
산세가 미인이 잠을 자고 있는 듯하다 하여 '잠자는 미인산'이라 불리우며, 누워있는 부처의 모습이라 하여 '와불산(臥佛山)'이라 불리기도 하는 서산은 그 정상에 있는 용문석굴의 채광이 오전에 가장 좋다고 해서 보통 오전에 방문하는 곳이다.
서산은 해발 2500m의 높이로 면적이 2만 평방미터에 이르고, 웅대한 삼림이 공원을 형성하고 있다. 서산의 주요 유람지로는 화정사(華亭寺), 태화사(太華寺), 니얼묘, 삼청각(三淸閣), 용문석굴(龍門石窟), 전지(澱池) 등이 있고, 제일 높이 있는 용문석굴은 리프트를 타고 올라 걸어서 내려올 수 있다.
용문(龍門) |
서산 관광의 백미라 할 수 있으며, 돌벽을 깎아 만든 길을 따라가면서 한편으로 탁트인 호수를 바라볼 수 있다. 삼청각에서 용문의 정상인 달천각까지 1333단의 석단이 만들어져 있다. 용문은 1840년부터 1853년까지 13년에 걸쳐 70여명의 석공들이 밧줄에 매달려 돌을 조각한 것이다. 석단 뿐 아니라 석실, 신상 등이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절벽 옆을 깎아 길을 내고 용문을 만든데 대해 위에 언급한 이야기 이외로 또 다른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곤명에 예쁜 아내를 둔 어떤 가난한 평민이 살았는데, 지주(地主)가 땅을 미끼로 아내를 빼앗아 가버렸다. 상심한 농민은 자살을 기도했는데 비몽사몽간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죽지말고 용문을 조각하라고 했다. 절벽을 깎아 길을 내고 중간중간에 불상을 조각하였다. 그 중에 바위를 그대로 깎아 들어가 불상을 조각했는데 그게 용문굴이다. 이 공사를 하는데 3代에 걸쳐 72년간 돌을 깎아 만들었다고 한다.
*서산과 용문과 곤명호는 따로 떨어져 보는 게 아니라 함께 보는 곳이다. 리프트를 타고 서산을 올라가면서 곤명호를 내려다보고, 절벽을 걸어 내려오면서 용문을 거쳐 내려오게 되어 있다.
*높은 서산에서 내려다보는 곤명호는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용문 앞을 지나가는 문이 있는데 여의주가 머리 위에 있어 그걸 만지며 지나가면 행운이 깃든다고 해 모두들 그걸 만지고 지나갔다.
*또 한 곳은 두서너 키 위에 구멍이 나 있는데 동전을 던져 구멍에 골인 시키면 돈이 굴러들어 온다고 해 너도나도 던졌으나 김정자씨만 성공을 하여 돈 잘 버는 사장님이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하며 웃었다.
* 또 다른 한 곳은 '재신상(財神像)'이 있는데 재신상 옆에 구멍이 나 있어 그 구멍 깊숙이 손을 넣었다가 빼 자기 호주머니에 넣어 3일 간 빼지 말고 7일간 세수를 하지 않으면 억만 장자가 된다고 했다. 돈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지어낸 전설이지만 재미로 모두 따라 하였다.
화훼 시장(花卉 市場) |
*곤명은 영하로 내려가는 겨울이 없고 또 무더운 여름도 없어 항상 봄날씨 가 이어져 꽃이 잘 자라 「꽃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화훼 산업이 발달되어 자연히 큰 꽃 도매 시장이 생겨 성업 중이란다.
*시장에 도착하니 소수민족 복장을 한 아가씨가 셋이 핸드 메가폰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먼저 들어 간 곳은 과자 공장과 전시판매장이어서 쭈욱 둘러보며 나누어 주는 시식품 얻어먹는 재미도 누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화훼시장을 둘러 보았는데, 우리 안사11 카페에 사진을 올려 놓았듯이, 기묘하게 꽃묶음을 장식해 놓아 눈이 황홀했다. 기록자 김정태가 어느 가게의 진열품을 촬영하자 여주인이 꽥 소리를 지르며 자기네 꽃 진열품 사진을 찍었다고 화를 냈다. 예쁘게 진열하는 방법도 자기네의 창작품인데 함부로 모방한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나는 꽃장수가 아니니까 염려 붙들어 매시라'고 쭝얼거려 주었다. 알아들을 리가 없겠지만....
*꽃 시장을 나와 과일가게에 가서오늘 밤 파티를 위해 망고와 바나나를 보따리로 샀다.
*곤명 시내에 있는 건물 중 큰 건물은 관청(官廳)이었다. 그 크기가 우리나라 관청은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우리가 본 큰 관청 창사로는 운남성청, 운남성 인민위원회, 법원, 검찰청, 공안청(경찰서)이었는데 그 크기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 다음으로 큰 건물이 은행이었다.
*곤명시에는 도로가 환상형(環狀形)으로 되어 있는데 제1환, 제2환∼제6환 등으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대부분의 대도시에는 오토바이는 제1환에서는 통행 금지를 시켜, 베트남의 호치민시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 배려를 했다고 한다.
*곤명시에는 고관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특별한 학교가 있는데 특수교육, 즉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하며 아무나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단다. 돈 많은 일반 사업가가 그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자면 입학 전에 입학금 이외에 1200위안을 내야 입학이 가능하단다. 벌써 기여 입학제를 실시하고 있는 셈.
*우리가 중국 해남도를 갔을 때 회족(回族)은 포악해서 이웃 소수민족 뿐만아니라 官에서도 당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이곳 곤명에서도 회족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고 했다. 다른 부족과 싸움이 붙으면 경찰이 와도 굽히지 않고 "우리에게 총을 쏠 테면 쏴라. 저놈들을 죽일 때까지 싸우겠다."라고 해 이들에게 대항하는 무리가 없다고 한다.
발 맛사지 |
*오늘 하루 종일 제법 많이 걸어서 피로를 풀 겸 발 맛사지를 했다. 이번 여행에 불포함 사항으로 들어 있는 프로그램이다. 1인당 $20에 하는 맛사지다. 서울 여행사에 계약할 때 맛사지 $20, 백련 스파 온천 $40을 아예 계약금과 함께 지불을 해서 포함 사항인 것처럼 받게 된 것이다.
*모두 여자 맛사지사가 해 주는데 우리 남자들은 5명이 한방에 들어가 받았다. 유니폼이 좀 야하게 생겨 기분이 이상했다. 맛사지를 하는 동안 우스개도 걸어가며 지루하지 않게 받았다.
근사한 우리들만의 나이트 파티 |
*어제는 밤 비행기로 도착해 씻고 자기에 바빠서 오늘에야 우리들만의 멋진 파티를 열었다.
*664호실 김정태와 최익창이 방에 잔칫상을 차렸다. 신춘자씨가 우리 일행을 위해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사온 시바스리갈 1병, 정공자씨가 가져 온 안동소주 2병, 정공자씨와 김정태가 가져온 마른안주, 오늘 과일가게에서 산 바나나와 망고, 차리고 보니 침대 위에 차린 상(床)이 가득했다. 이영자씨는 항상 부지런하셨다. 미리 오셔서 망고를 깎아 주셨다. 이선생님은 매일 식사 후 우리들에게 한국제 커피를 마시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고....감사, 감사....
*모두들 자기 의자를 갖고 와 둘러앉아 마음껏 취하자고 하며, 소리 높혀 건배를 외치고 잔을 돌렸다. 거나해지자 말도 많아지고 목소리의 톤도 높아갔다. 왜 이리 좋노? 너무나 즐겁다!!!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친구로 만나 오늘 이렇게 우정을 다지는 것이지!!! 이번 여행에 동참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한편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우리만의 좋은 시간을 갖는 자만(?)도 약간 들었다.
*자기 집 가사 이야기도 나오고 부부간의 이야기, 자녀 이야기, 우리 11회 동기회 이야기, 세상 이야기, 안한 이야기가 없다. 대화의 주제는 방향을 모르고 튀고 또 튀었다. 8시 반에 시작한 모임은 희희낙낙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10시 반이 넘어서야 끝나 각자의 방으로 가 잠자리에 들었다.
3월 18일
*모닝 콜 : 8시
*호텔 출발 : 9시 30분
*오늘의 일정 : 금전(金殿)→구향동굴(九鄕洞窟)
금전(金殿.銅殿) |
*위의 취호공원(翠湖公園)에서 언급한 바 있는 오삼계는 명나라 말엽의 간신 장수인데, 황궁의 문을 열어 주어 명나라를 멸망하게 하고 청나라가 천하를 정복하게 한 장본인인데 청나라 황제는 그를 여기 운남(雲南) 지역의 왕, 즉 평서왕으로 봉했다. 그러자 그는 이곳에서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지 참회하는 의미에서 금전(金殿)을 지었다고 한다. 이곳의 맨 윗부분에 있는 금전(金殿)에 있는 부처는 순 동(銅)으로 만든 부처여서 금전(金殿) 또는 동전(銅殿)이라고 한다. 들어가다가 우측에는 그의 애첩(愛妾) 진원원의 상(像)이 있는데 절세 미인인 모양
*운남성에는 구리가 많이 나는데 특산물인 구리로 동전(銅殿)을 지었다.
*곤명에서는 풍수 지리로 보아 서산(西山)과 금전(金殿)이 있는 자리가 제일 좋은 명당 자리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하지 않음. 가게는 오전 11시나 되어야 문 열고 저녁 8∼11시에 문 닫음
*출근 시각은 아침 9∼10시 경이 보통
*중국은 장개석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대륙을 해방 시켰을 때 인구가 4억
*모택동은 인민을 먹여 살리는 일이 최급선무여서 산을 깎아 밭 만들 것을 전 인민에게 독려함. 그래서 지금도 산비탈 깎아 만든 밭이 많고, 산이 헐벗고 나무가 적음
*모택동의 신망이 깊던 유소기가 경제 개발을 모택동에게 건의하자 그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문화혁명(1976년)을 일으켜 정적으로 몰아 축출
*1989년의 천안문 사건과 후의 파룬궁 사건을 진압한 등소평이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를 주장하며 경제 우선 정책 전개
*파룬공(법륜공)을 제압한 이유는 파룬공을 창시한 사람이 자기 휘하의 신도가 중국의 공산당 숫자보다 많은 1억 3천만 명이나 된다고 세력을 자랑하며 공산당을 능가하는 힘이 있다고 하자 등소평은 이들 모두를 숙청하게 됨
* 중국 곤명 시민으로서 현재 경제 위기에 대해 별 영향을 못 느낌.
*곤명의 농촌은 기계화가 안되어 원시적인 방법으로, 삽으로 땅 뒤집어 갈아엎는 장면을 몇 번 봄. 물소를 이용해서 논갈이를 하면 될 텐데 정말 이상했다.
*큰 농장에서만 기계화하고 있음
*구향동굴(九鄕洞窟) 가는 길은 새로 넓히는 공사 중이라 이리저리 구불거리는 길을 차가 무척이나 흔들리며 흙바닥 길을 천천히 갈 수 밖에 없었음
*길 주변에는 화훼재배 단지(團地)인 듯 화초를 재배하는 농가 많았음
구향동굴(九鄕洞窟) |
동굴 안 사진은 디지탈 카메라로는 잘 안나와서 차마 보여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구향동굴은 발견 후 관광지로 개발해 놓은 게 채 몇 년이 안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너무 인공적이지 않으면서 깔끔하게 잘 만들어 놓았다.
이 동굴은 약 7000만년 전에는 바다였던 곳으로 화석이 많아 그 화석들을 동굴 입구에 전시해 놓았다.
입구로 들어가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30m를 지하로 내려가서 관광을 시작한다. 잔잔한 협곡에서 10인승 배로 레프팅 하는 곳이 나오고 간단히 레프팅을 하고 나서는 동굴로 들어가면 된다. 레프팅을 하는 이 협곡은 총 길이가 약 600m로 왕복 약 20분이 소요된다. 레프팅을 마치고 되돌아와 다시 작은 길을 따라 좁은 길로 들어서면 높이 80m의 절벽이 이어지고, 그 길을 따라 가면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추울 정도로 시원한 동굴 안에는 종유석과 석순들이 연출하는 장관이 펼쳐지고, 곧 이어 이곳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선녀동이 나오는데, 선녀궁(神女宮)은 선가(仙家)가 거주하던 동굴부로 원명은 선인동(仙人洞)이다. 이곳은 선량한 선녀가 살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는데, 그 선녀의 모습이 지금은 석화로 굳어져 있다고 한다.
중간에는 많은 수량(水量)의 지하수가 흘러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데 그 소리가 굉음이었다.
동굴 밖으로 나오는 길에는 300개의 계단이 있고, 가마꾼들이 있어서 흥정해 이용할 수도 있다.
*여성 친구들은 다 멀쩡한데 기록자인 나 김정태, 이길영, 최익창 셋이 무릎 고장으로 다리를 끌고 동굴 관광을 했다. 그래서 마지막 300 계단을 오르기가 어려워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흥정을 해 1인당 한화로 15,000원씩 주고 가마를 타고 올라 왔다.두 사람의 가마꾼이 메고 300 계단을 올라가는데 힘이 들어 씩씩거리는 숨소리에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 타 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네들이 밥벌이를 한다고 고쳐 먹으니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덜 했다. 내려서 여섯 사람에게 천 원씩 주었으나 고작 천 원을 주는 내 손이 부끄러웠다.
*동굴 관광을 하기 전에 화장실 앞에서 노점을 하는 전족(纏足)을 한 할머니를 보았다. 말로만 듣던 전족을 한 사람을 보니 신기해서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어 우리 안사11 카페에 올렸다.
*가이드의 문성걸군의 와이당 하나
-중국에서는 신문을 대개 '연변일보'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신문지를 '보지(報誌)'라 부르고, '서커스'를 '자지'로 발음한단다.
-그래서 신문지를 깔고 서커스를 보는 것을 "보지(報誌) 깔고 자지 본다"라고 한다나...
*구향동굴 관광을 마치고 40분 간 달려 석림(石林) 가까이에 있는 「석림 아스마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 방으로 올라갔다. 이 호텔은 객실의 시설도 좋고 호텔 룸에서 내다보는 전망도 아주 좋은데 객실이 3층 뿐이라 엘리베이터가 없어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며 3층까지 올라가는 일이 고역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식사가 진행되자 현지 화가(畵家)가 직접 그린 그림을 판매하였다. 현지 처녀가 경매 물건 소개하듯이 그림을 낭낭한 목소리로 소개를 했다. 우리 일행 한 분이 한화로 4만원을 주고 제법 괜찮은 그림 한 점을 구입했다. 소품이 아니고 제법 큰 그림이라 사가지고 가도 걸 자리가 없어서 살 수가 없었다.
*김정태와 최익창네 방에 또 모두 모여 망고 하나씩 먹었다. 어제 밤에 모두 과음들을 해서 오늘은 모두 손사래를 치며 술을 받지 않아 정담만 1시간 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3월 19일
*아침에 일어나서 약간의 운동과 산책을 하기로 했다. 호텔 앞 제법 넓은 마당에서 권오기군의 리드에 따라 '맷돌체조'를 했다. 오랜만에 하는 체조라 굳어 있던 온몸이 풀리는 듯 했다.
*체조가 끝나자 호텔 앞 도로 옆 못(池)을 따라 산책을 했다. 아침 공기도 맑고 남녀 친구가 담소를 나누며 느긋이 걷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석림(石林) |
소석림
석림에서 관광객을 안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소수민족 이족(彛族) 처녀들
대석림
곤명에서 남쪽으로 120㎞, 정도 떨어진 석림 이족자치현(彛族自治縣) 내에 위치해 있다. 면적이 350㎢ 이며, 세계에서 가장 광활한 카르스트 지형 중의 하나이다. 돌기둥이 나무 줄기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는 것이 삼림모양을 이루고 있다. 웅장한 석림은 전형적인 열대 석회암지형으로, 현재 해발 2천m 높이이다. 해발 2천m 높이의 전형적인 열대 석회암지형으로 돌기둥이 나무 줄기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는 것이 삼림모양을 이루고 있다. 원래 이 곳은 해수면같이 평평했으나, 약 백만 년 전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하여 지금은 이 일대의 기후 또한 열대에서 온대로 변했다.
- 석림풍경구는 대소석림(大小石林), 내고석림(乃古石林), 지운동(芝云洞), 장호(長湖), 대첩수폭포(大疊水瀑布), 월호(月湖), 기풍동(奇風洞) 7개의 풍경구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대소석림은 석림 관광의 중심으로, '대석림(大石林)'과 '소석림(小石林)'으로 나눠 구분되기도 한다.
이곳은 개발이 비교적 일찍 시작되어서 시설이 발달되어 있어서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주마간산으로 훑어보는 데에도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세계 자연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우리가 묵은 「석림 아스마호텔」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었다.
*입구에는 이곳 이족 아가씨들이 전통복장으로 성장(盛裝)을 하고서 관관객 안내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데 옷이 화려해서 그런지 모두들 상당히 예뻤다. 그 가운데 총각도 한 사람이 끼어 있는데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얼굴의 미소년이었다.
*전동카를 타고 이동을 했는데 모든 전동카를 이족 여인들이 운전을 했다. 아마 이 지방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준다는 기준이 있어서인 것 같다.
*들어서면서부터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이런 기이한 자연 현상도 있을가? 병풍처럼 바위가 솟아 있고 또 어김없이 중간 위가 동강이 나서 일부러 잘라서 올려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모양들이 하나도 같지 않고 말 그대로 石林을 이루고 있었다. 小石林에서 시작하여 안으로 들어 갈수록 크기가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 본 것이 大石林, 크게 "石林"이라 한자 글자를 새겨 놓은 대석림 앞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와우!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지?
*대석림 앞에서 이족들의 전통 의상을 대여 받아 입었다. 여성복은 화려하고 무척 예뻐서 우리 일행이 입은 모습을 보자 입이 딱 벌어졌다. 남성복도 화려하고 입고 보니 남성다운 위엄까지 저절로 풍겼다. 특히 깃 달린 모자가 썩 멋있었다. 우리 일행 중에 최익창군이 가장 잘 어울려 모두들 익창군을 보고 진짜 부족장 같다고 하며 놀렸다.
* 복장을 갖추고 「石林」글자가 들어가게 사진을 찍으려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 때문에 그네들을 밀치고서야 찍고 또 찍었다. 열한 명이 같이 찍을 때는 다른 중국 관광객들까지 우리 일행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를 정도로 전통 의상이 멋스러웠다.
*석림을 출발하여 점심 식사할 곳으로 이동을 하였다. 한식집인데 「한성궁(韓城宮)」이라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이 식당은 어제도 여기서 점심 식사를 했는데 어제 메뉴는 삼겹살구이였고, 오늘 메뉴는 보쌈이었다. 맛은 그저그랬으나 깔끔하게 차려 주었다.
*여기 「한성궁(韓城宮)」에서는 천연 고무 제품인 「라텍스매장」도 함께 해 일행 중에서 사모님께 드릴 메트리스를 사기도 하고, 손자녀에게 줄 베게를 사기도 했다.
백련(柏聯) 스파 온천 |
백련 스파 온천 - 안에 카메라를 갖고 들어 갈 수 없어서 내부는 보여드리지 못합니다.
*점심 식사를 한 마을에 온천장이 있었다.
*이곳은 싱가포르 사람이 투자한 시설인데 남녀가 동시에 사용하며 28개의 각종 노천탕이 있다. 입장료가 무려 $40, 우리 돈으로 6만원이나 된다. 이곳 시민의 평균 월급이 한국 돈 10여만 원 정도라는데 이곳 주민들에겐 그림 속의 떡 밖에 안되는 시설이다. 더구나 곤명시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인데 주민용이라기보다 관광객을 위한 시설로 봐야 할 것 같다.
*탈의실에서 수영복을 갈아입고 가운을 받아 걸치고 노천탕으로 입장했다.
*요소요소에 아가씨들이 배치되어 길을 안내하고 가운을 받아 챙기고, 탕을 옮기면 가운과 슬리퍼도 옮겨 준다. 처음에 우리 일행 11사람이 탕 속에 들어가자 시중드는 아가씨가 장미꽃잎을 한바구니 가득 담아다가 띄워 주었다. 장미꽃잎이 동동 뜬 탕 속에 선남선녀(善男善女) 열한 명이 황홀한 분위에 속에 우아한 시간을 보냈다.
*이 정겨운 모습을 카메라 담고 싶어서 락카룸에 가 카메라는 들고 들어가고자 하니 종업원이 카메라를 갖고 탕에 입장할 수 없단다. 노천 온천을 우리 안사11 카페를 통해 동기들에게 보여 줄 수 없어서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탕에서 두어 시간을 보냈는데 종업원 아가씨들이 계속 따라 다니며 시중을 들어 주었다. 기록자는 차(茶)를 넉 잔이나 얻어 마셨다.
*우리 일행이 함께 한 시간은 이때 뿐, 모두 뿔뿔이 흩어져 제가 좋아하는 탕을 찾아 흩어져 각자가 즐기게 되었다.
*노천탕들은 수심이 60센티미터 정도에 주변 자연과 어울리게 시공되어 있었다. 주변은 정원수들이 심겨져 있고 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이곳은 사계절이 봄이다"란 말이 실감이 났다. 수온은 그리 높지 않았다. 40℃ 안팎. 탕들을 둘러보니 10여 미터 간격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작은 탕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탄산수탕, 한방탕, 철분탕, 동탕, 폭포수탕. 이온수탕 이름을 모두 나열하기도 어렵다.
*특징적인 탕은 「닥터 퓌시 탕」이다. 피라미 새끼 같은 어종이 탕 안에 수백 마리가 서식하는데 사람이 들어가면 사람 몸의 피부 각질을 입으로 꼭꼭 쪼아 뜯어먹는다. 처음에는 무척 간지러웠다. 입술까지 잠수하면 입술도 쫏는다. 가장 많이 덤비는 곳은 발바닥이다. 처음에는 간지러웠으나 숙달되니 참을만 했다.
*탕들을 벗어나 호숫가(곤명호)로 가니 김영길군 혼자서 밴취에 느긋하게 누워 감미로운 봄바람이 볼을 간지러 주는 재미에 푹 빠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야! 참 좋구나! 정말 바람이 좋았다. 정말 감미로운 바람이었다.
*온천욕을 끝내고 나와 락카룸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남자 종업원이 옆에서 장 속의 옷까지 꺼내 들고 서 있고 옷 입는 것까지 도와 주려고 해 민망해서 가라고 손짓을 해 쫓아버렸다. 그랬더니 김영길군 옆에 달라붙어 입고 있는 옷까지 추켜 올려주는 등 그 정도가 지나친 듯 했다. 영길군은 옷을 다 갈아입고 팁을 $2를 주었단다. 여기서는 또 너무 팁을 바라는 눈치 였다.
*곤명호 주변에 공장 설립 허가를 내 주어 곤명호 오염이 심하게 되자 정부 에서 현장(縣長)을 징계함
*차를 타고 가다가 바구니를 지고가는 아낙을 봄. 바구니에 아기를 넣어 업고 다니기도 하고, 장을 봐 물건을 넣어 지고 다니기도 함
*중국에는 팁 문화가 정착되지 않아 팁 주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함. 이 기록자가 두어 번 팁을 줬는데 받는 소녀들이 무척 어색해 함.
*다시 곤명에 와 닉슨 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내가 왜 이러지????
-건망증인가? 자꾸 물건을 잃어버린다.
-여기 곤명에 와서 돋보기를 잃어버렸고, 석림 아스마호텔에다 김정자씨가 산 중국 술 2병과 콜라(패트병) 1병을 냉장고에다 넣어두고 그냥 와 버렸다. 그 뿐인가? 잃어버리면 안될 약까지 잃어버렸다. 곤명 닉슨호텔에서 석림으로 오면서 테이블 위에다 꼭 먹어야하는 고혈압약과 당뇨약을 그냥 두고 나와버렸다. 잃어버린 이튿날, 몸이 나른하고 맥이 확 풀리는 게 틀림없이 저혈당증이 나타난 것, 2층에 있는 실크 매장에서였다. '누가 사탕 없어요?' 라고 하자 김경자씨가 빽에서 사탕을 꺼내 주셨는데 혼자서 와작와작 깨물 어 먹으니 김경자씨가 영문도 모르고 날 때리려는 시늉을 하며 '옆에 사람을 두고 혼자 잡셔요?'라는 것이다. 사정을 말하자 눈이 휘둥그래지며 걱정을 해 주셨다. 스니커즈 쵸코렛을 가방에 넣어 온 게 생각나서 버스로 가서 중국인 운전기사에게 손짓으로 트렁크를 열어달라고 해 3개를 먹고 2개는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한 30여분이 지나니 기운이 돌아오는 듯 했다. 다행이었다.
-곤명의 닉슨호텔에 연락을 해 두었다가 저녁에 찾으니 예상했던 대로 쓰레기로 버린 모양, 김영길군이 마침 혈압약을 갖고 있어서 2알을 얻어서 복용했다. 술은 절대 사양하고 조심조심, 그래도 무사히 보낸 것이 다행이다.
3월 20일
*오늘의 관광 일정 : 운남민족촌→대관루→운남성박물관
*오늘이 여기 곤명에서 마지막날이다. 모든 짐을 챙기고 버스에 올랐다.
운남 민족촌(雲南 民族村) |
納西族이라고 한자로 쓰지만 "납시족"이로 읽습니다.
*우리나라 민속촌과 비슷한 곳이었다.
*곤명시에서 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곤명호 주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곤명의 명승 관광지인 서산산림공원과 대관루공원등과 서로 근접하고 있다. 면적은 485헥타르로 매우 큰 편이다.
*민족촌에는 25개의 소수민족 촌락을 건설하고 있는데 현재 태族、白族、彛族、納西族、藏族、基族、拉祜族、布朗族、哈尼族、德앙族、景피族등의 12개 소수민족 촌락이 형성되어있으며 나머지 부족의 촌락도 계속해서 건설하고 있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민족단결광장, 민족무대, 풍미식품성, 숙박 오락시설등의 종합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어, 관람과 오락, 휴가, 식사등이 모두 가능하다.
*입구에 있는 '태족' 마을에 들어섰다. 이들은 물을 숭배하는 소수민족이라 했다.
*걸어서 여러 마을을 관광하게 되어 있으나 귀뜸으로 들으니 한화로 10만원이면 전동카를 타고 이동할 수 있어 여러 마을을 관광할 수 있다고 해 김영길군과 둘이서 $35씩 내서 전동카를 타고 이동해 가며 관광을 해서 여섯 마을을 볼 수 있었다.
*브랑족 - 이 마을에서는 꽹과리 비슷한 걸 치고, 긴 머리를 휘두르며 추는 춤을 구경했다. 박진감이 넘쳤다. 처녀들을 보니 미인들이 많았다.
*모서족 - 이 종족들은 완전 모계사회를 이루고 산단다.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없고 남자는 그저 후손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단다.
할머니가 제일 어른이고 다음이 어머니, 찾아 간 마을에는 할머니 방이 아주 컸다.
*백족 - 이들은 고구려의 후예들이란다. 장(醬)을 담가 먹고 언어에도 우리 말과 흡사한 말이 많다고 한다.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점령한 후 당나라 군사들에게 포로로 잡혀 끌려 온 사람들이 백족이라고 한다.
*이족 - 이들 마을에서도 춤 공연이 있었는데 남자들은 씩씩하게, 여자들은 사뿐사뿐 살랑살랑거리며 예쁜 춤을 추었다. 이족들은 술을 잘 빗기로 정평이 나 있단다. 이족촌 집안으로 들어가 술맛을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김정자씨가 한턱을 쏜단다. 마당에서 숯불에 구운 통닭을 안주로 해서 술 두 병을 마셨다. 술잔을 쬐끄마한 걸로 주는 걸 봐서 술이 매우 독한 모양이다. 60도란다. 한모금을 마시자 목안에 불이 붙는 듯 했다. 맛은 일품! 한병은 조금 덜 독했지만 술을 마신 친구들은 모두 다 알딸딸해졌다. 서너 잔 마신 친구들은 저녁 식사 때까지 덜 깬 모양이었다.
*중국에서 짝퉁을 많이, 그리고 잘 만드는 까닭 - 세계적 명품 생산업체가 과거에 싼 임금 때문에 중국에 생산기지를 두고 생산을 했는데, 갑자기 중국의 노동자 임금이 올라가자 코스트가 올라가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을 습득한 노동자들이 실직을 하게 돼, 배운 도둑질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은 짝퉁 천지!
대관루(大觀樓) |
*곤명시 서쪽, 곤명호를 사이에 두고 서산과 마주하고 있는 대관루공원은 근화포(近華浦), 누외루(樓外樓), 화원(花園) 등의 풍경구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명나라 때 정원이 생기고 이어 청대에 누각이 건조되었는데, 주변의 서산과 곤명호 등과 함께 풍경이 아름다워 많은 시인과 문장가들이 이곳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들이 남긴 시와 문장들은 지금도 대관루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청나라 때의 문장가인 손염옹(孫髥翁)이 남긴 180자의 문장인데, 곤명호의 풍치와 운남의 역사에 대해 읊고 있다. 손염옹(孫髥翁)의 시를 11명 친구들에게 우리 카페에 옮겨 실어 보겠다고 했으나 한시(漢詩)에 동원된 글자가 모르는 자가 하도 많아 옥편에서 찾을 수 조차 없어 약속을 어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인터넷을 뒤져도 원문이 올라와 있는 게 없었다.미안타!!!
*또한 이곳에서는 4계절 꽃 전시회가 열려 매 정월달과 8월이면 난 구경을 하러 온 인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공원 안에는 비닐로 대형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대형 용 모양의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다섯 곳의 매장 들르기 |
*북한 약, 차, 실크, 진주, 라텍스 등 다섯 곳의 매장에 들렀다. 여행을 해 보니 이건 거의 의무사항인 것 같다. 북한 약만 빼고 일행들이 다 한두 가지씩은 사 주었다. 가이드가 헤어질 때 좋은 손님 만나 담배 값 많이 생겼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운남성 박물관(雲南省 博物館) |
곤명 시립 박물관에 소장 된 옥 공예품
*이번 여행의 마지막 관광지인 운남성 박물관을 찾았다. 「청동기전」과 「공룡전」, 그리고 「민예품전」을 관람하였다.
*청동기전에서 볼만한 것은 뉴후통안(牛虎銅案 : 소와 호랑이가 있는 청동기)이다. 운남성박물관 근처의 교차로 중심에도 이 뉴후통안을 본 뜬 대형 조형물을 볼 수 있었다.
*공룡 전시물의 대부분이 실물로 생생한 자료를 볼 수 있었다. 여기 전시물 70% 이상이 실물이란다. 공룡의 알, 발자국을 떼다가 전시해 놓았다.
*민예품전을 본 기억은 있는 듯 없는 듯 별 기억이 안난다. 다만 세계의 많은 박물관을 봤지만 물건 파는 매장이 박물관 안에 버젓이 있는 건 처음 보았다. 여기가 민예품전을 여는 자리인가? 중국인들의 장삿 속이 여기서도 보였다. 이 기록자도 도자기로 된 황후(皇后) 모양의 민예품 한 점을 샀다. 한화로 18만원이나 달라고 하기에 갖고 싶긴 하나 가진 돈이 모자라 못 사겠다니까 여자 종업원이 얼마이면 사겠느냐고 묻기에 10만원 정도이면 사겠다고 하니 15만원에 주겠다고 했다. 돈 없어서 못 사겠다고 하니까 결국 10만원에 사가라는 것이다. 그래도 비싼 것 같았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 $77을 주고 샀다. 김정자씨는 옥으로된 해태 모양의 공예품 한 쌍을 한화 11만원을 주고 사셨다.
*마지막 식사를 운천수향(云天水香)이라는 식당에서 버섯 샤브샤브로 했다. 제법 큰 식당이었고 버섯 향이 참 좋았다.
전신 맛사지 |
*저녁 식사를 하고 귀국 비행기 출발 시간이 많이 남아 1인당 $30씩 주고 전신 맛사지를 받기로 했다. 가이드가 강권하기도 하고, 시간도 남아 어쩔 수 없이 받게 되었다. 맛사지는 80분간 받았다. 전번에 발 맛사지를 하던 곳보다 오히려 못하는 것 같았다. 말도 안통하고 농담도 안 받아 주고 지루하게 시간을 보냈다.
*곤명공항으로 나가 간단한 짐 정리를 하여 짐을 부쳤다. 그리고도 시간이 1시간여가 남아 지루하게 기다리다가 계획된 시간 00시 45분에 출발하였다.
3월 21일
*인천공항에 05시 15분 제시간에 도착을 하였다. 갈 때는 4시간 45분간 비행을 했는데 돌아 올 때는 3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갈 때는 맞바람을 받고 가고 올 때는 뒷바람을 타고 와서 시간이 단축 된 모양이었다.
*입국 심사를 받고 짐을 찾아 세관을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길영 친구가 없다. 만나 작별 인사라도 하고 헤어져야 되겠는데 30여 분간을 찾았다. 어느 친구말이 '세관 신고서'를 다시 작성하느라고 안에 혼자 남아 있다라느니, 또 어떤 친구는 비행기 안에서 잠을 못 들여서 수면제를 찾기에 반 알을 주었는데 그걸 먹고 기내 식사를 하면서 조는 걸 봤는데 혹시 화장실 같은 곳에서 잠이 든 건 아닐가라고도 해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핸드폰도 꺼져 있고...찾아도 찾아도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각자 귀가할 수 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하고도 한참 후에야 전화가 왔는데, 길영군이 먼저 나와 보니 아무도 없어서 그냥 안성 가는 차를 타러 갔다는 것이었다. 아! 그러나 탈 없이 귀가를 했다니 좀 허탈했지만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여행 시 이야기거리 없이 끝 마치면 심심하잖아???
*여하간에 참말로, 정말로 즐거운 여행, 보람찬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