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에게서 영감을 얻어 아프리카에서 몇 년을 보냈고 나중에 노벨상 수상자의 수많은 사후 작품을 감독한 패트릭 헤밍웨이가 지난 2일(현지시간) 9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AP 통신이 다음날 보도했다. 어니스트의 세 아들 중 둘째인 고인이 세상을 떠나 이제 살아있는 자녀는 없다.
고인은 몬태나주 보즈먼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그의 손자 패트릭 헤밍웨이 애덤스가 성명을 통해 확인했다. 애덤스는 "우리 할아버지는 진짜였다. 낡은 세계의 인생보다 더 큰 역설이었다. 과학적 두뇌를 짊어진 완벽한 몽상가. 그는 여섯 가지 언어를 구사하고 재미로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었지만 그의 마음은 진정으로 글과 시각 예술에 속해 있었다"고 말했다.
남동생 그레고리는 유명한 부모와 트러블을 빚었지만 패트릭은 자신의 배경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가문의 이름을 언급하거나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를 지지할 수 있는 기회를 환영했다. 2022년 책 '친애하는 아빠에게: 패트릭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편지'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사냥과 낚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애정을 표현하는데, 아버지는 패트릭에게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그 누구보다 너와 함께 낚시하고 함께 (총을) 쏘고 싶은데 우리가 부자지간이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 유산의 집행자로서 패트릭은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와 '움직이는 축제'(A Moveable Feast) 같은 고전에 아들과 다른 이들의 수정된 텍스트와 추가 논평을 포함시켜 재발행했다. 이 유산은 책을 넘어 의류, 안경, 양탄자 및 'Papa's Pilar Rum'까지 망라해 판매함으로써 헤밍웨이 추종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패트릭의 가장 야심찬 사업은 1950년대 중반 부친이 아프리카에서 보낸 시간을 '동틀 녘의 진실'( True at First Light)으로 엮어 1999년 출간했는데 작가가 사망했을 때 미완성으로 남겨둔 것에 허구를 보탠 것이었다. 패트릭은 약 800쪽에 이르는 원고를 절반으로 줄였다.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결국 독자와 비평가들을 실망시켰고, 그들 중 일부는 패트릭이 가문의 이름을 악용했다고 성토했다.
아버지의 작품을 읽었느냐는 NPR의 질문에 패트릭은 "상업적 관심이 있기 때문에 꽤 자주 읽는다.... 나는 그것을 마케팅하고 관리하는 데 능숙해지기 위해 그것을 읽어야 한다"고 답했다.
패트릭은 자살과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집안에서 장수를 누렸다. 어니스트의 부친 클래런스는 1928년에 자살했고, 형도 1961년에 같은 일로 세상을 등졌다. 누나도 마찬가지였고, 패트릭의 의붓조카인 배우이자 모델 마고는 1996년 페노바르비탈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이렇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족이 다섯이나 된다. 그레고리(성 전환 수술 후 글로리아로 개명) 역시 작가 겸 의사였는데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을 앓았고 음란한 노출 혐의로 체포된 후 2001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큰아들 잭(패트릭의 의붓형)은 유명한 플라이 낚시꾼이며 작가였는데 2000년에 사망했다.
부친의 둥근 얼굴과 땅딸막한 체격을 물려받은 패트릭은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어니스트와 그의 네 아내 가운데 둘째인 폴린 파이퍼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니스트가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패트릭은 어릴 적 쿠바와 스페인에서 와이오밍과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을 옮겨 다녔다. 어니스트와 폴린은 1940년 이혼했다.
패트릭은 부친이 사파리에서 사냥한 다양한 동물의 '트로피 탈것'과 자신과 그레고리의 침실에 걸려 있던 누를 포함해 키웨스트 자택의 "모든 방에 세련되게 자리하고 있었다"고 돌아보곤 했다.
전시물은 동아프리카를 패트릭에게 "약속의 땅"으로 만들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상속받은 돈으로 탕가니카(현 탄자니아)에 농장을 구입했으며, 그곳에서 유엔 식량농업기구의 사냥꾼, 사파리 가이드, 교육자 및 산림 담당관으로 일했다.
패트릭은 헨리에타 브로일스, 캐롤 톰슨과 차례로 결혼했으며 첫 번째 아내와 딸 미나를 뒀다. 1970년대 중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는 보즈먼에 거주했다. 어니스트는 이웃 아이다호주에서 말년을 보냈다.
패트릭은 2008년 NPR 인터뷰를 통해 "가끔 나는 그를 거의 기억할 수 없었을 때, 그가 입을 맞추려 했을 때 수염이 약간 거칠어서 그러고 싶지 않았을 때를 생각한다"면서 "그리고 나중에 그가 아프리카에 왔을 때... 우리는 밤에 그냥 재미있게 (말을) 타곤 했다. 난 그의 인생 모든 단계에서 그를 기억한다"고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