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3막만으로도 완전한 드라마가 될 수 있다.
어제 돌아왔고, 이틀 동안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 푸른 강,
하얗게 산과 강을 수놓던 억새의 향연에서 돌아와
하루 종일 집에서 머물렀을 뿐인데, 다시 그 강변의 그 자연이 그리운 것은
내가 자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연 속에 있으면서 그 자연을 멀리 바라보고 있으면 그렇게 자연이
평화롭게 보이는데, 사실 자연 속은 평화가 아니라 순간순간이 전쟁터이다.
작은 나무들은 큰 나무 그늘 밑에서 마음껏 자랄 수가 없고,
작은 짐승들이나 곤충들도 마찬가지로 약육강식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자연이다. 인간은 또 어떤가? 육십이면 육십, 칠십이면 칠십, 기껏해야
백년을 살까 말까 하다가 떠나는 인간, 그 인간들의 삶과 죽음의 형태를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 제 2권 중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대는 이 거대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살았다. 그 기간이 5년이든 100년이든 무순 차이가 있겠는가? 세상의 법은 그대뿐 아니라 그 누구도 공정하게 대한다. 그렇다면 그대는 무엇 때문에 불만을 품는가?
그대를 이 세계에서 몰아내는 자는 폭군도, 부정한 재판관도 아니다, 그대를 세상에 보낸 자연이다. 자연은 배우를 채용했다가 다시 무대 밖으로 나가게 하는 연출자와 다르지 않는다.“
“저는 5막짜리 연극에서 3막까지만 출연했습니다.“
그대는 이렇게 하소연하고 싶지 않은가? 인생은 3막만으로도 완전한 드라마가 될 수 있다. 연극을 언제 끝낼지를 결정하실 분은 당신을 처음에 고용했고, 지금은 당신을 내모는 자연이다. 따라서 이런 결정은 그대가 상관할 것이 아니다. 만족하는 마음으로 물러서라. 그대를 떠나보내는 자연도 그대에게 미소를 보낼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제 2권 중에서
거대한 자연, 아니, 빈틈없이 잘 짜여 진 자연 앞에서 인간은 바람 앞에 흔들리는 갈대보다도 더 연약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 년 만 년을 살 것처럼, 자기 앞의 이익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어느 순간 자연으로부터 ‘어서 오라’ 라는 신호를 듣고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끌려가는 것이다.
어차피 한 번 살다가 가는 것, 의미 있게 살다 가야 하는데,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남이 장에 가니 나도 장에 가는 것처럼
돈이며, 권력에만 눈독을 들이다가 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것이 자기의 신념이라면 어쩌겠는가, 그대로 살다가 가라고 내 버려둬야지,
하지만 지나간 옛 사람이지만 당대의 현인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인생은 3막만으로도 완전한 드라마가 될 수 있다." 고,
오래 사는 것도 좋지만 짧게 살아도 잘 사는 삶이 많은 것이다.
풀어 말한다면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오래 사는 것도 좋지만
소신껏 떳떳한 나,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살 필요도 있지 않을까?
2018년 10월 30일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