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숭겸(申崇謙) 장절공(壯節公) 묘역(墓域) 답사기
몇 번을 벼르던 생각이었다.
불현 듯 호주머니에 돈 몇 푼 넣고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상봉역에서 춘천행 전철을 탔다.
춘천 소양강 어귀에 있는 장절공 신숭겸 묘역을 찾기 위해서다.
이른 봄 전철 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도 느껴 볼만하다.
남춘천역에 내려 신숭겸 묘역 가는 교통이 불분명하여 택사를 탔다.
요금이 18000원인데 운전수가 15000원만 받는다. 택시도 첫길이라 18000원 받기가 미안하다고 한다.
가고 오는 길에 차가 없어서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다음에 가는 분들을 위해 꼭 자가용으로 가기를 권하는 바이다.
교통편은 좋지 않았지만 소양강 의암댐 다리를 건너 오른편 길로 접어들어 10여분 달리는 구절양장(九折羊腸)같이 도는 드라이브 코스로서는 매우 좋은 경치였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1리의 <장절공 신숭겸 묘역>이라고 쓴 표지판이 나타났다.
멀리서 신숭겸장군의 동상이 우뚝 선 뒤편 산등성이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산기슭 오른 쪽 묘지 입구에 높이 세운 홍살문이 보였다.
이곳 신숭겸 묘역은 수령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는 하늘을 찌르듯이 높이 솟은 낙락장송(落落長松)소나무가 하늘높이 쭉쭉 뻗어 있다.
모역 입구에 마련된 연못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다.
이른 봄이라 아직 새 움은 돋지 않은 가지지만 축축 늘어진 능수버들 가지가 고즈넉한 묘원의 풍광을 더욱 운치 있게 한다.
묘역을 둘러보니 평산(平山) 신씨(申氏) 문중의 성역화 사업으로 인하여 사당, 영정각,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연못 등이 잘 단장돼 있었다.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묘역(墓域) !
강원도 기념물 제21호다.
이곳은 서기918년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등과 같이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高麗)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된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묘역(墓域)이다.
묘역은 뒤로 높은 산을 병풍 삼아 둘러치고 앞으로 뻗어 내린 한 줄기 작은 산봉우리 중턱에 자리 잡은 형국이었다. 묘지 입구에서 묘지까지의 거리는 눈짐작으로도 100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황금 잔디가 경사(傾斜)로 깔려 있였다.
봉분(封墳)은 세 개이며 가운데 봉분 앞에 고려태사장절공신숭겸지묘(高麗太師壯節公申崇謙之墓)라 쓴 비석만 서 있을 뿐 고관대작들의 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상(石像) 하나 없었다.
묘역에는 조선조 순조 때의 세도가였던 김조순(金祖淳1765~1832)이 짓고 명필 신위(申緯1769~1847)가 쓴 장절공신도비(壯節公神道碑)가 서 있다. 신도비에는 장절공의 묘에 봉분이 세 개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산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이 전사하자 후백제군은 왕건의 시신으로 알고 목을 베어갔다. 태조 왕건은 순금으로 장군의 머리를 만들어 시신과 함께 매장하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춘천과 구월산, 팔공산 세 곳에 똑같은 묘를 만들었으며, 춘천 묘역에는 시신 묻은 곳을 분간할 수 없도록 봉분을 세 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두 개의 봉분이 신숭겸 장군 부인들의 묘라는 설도 있으니 신도비에서도 무엇이 진실인지 그 여부를 알 수 없다고 적고 있다.
이글을 쓰면서 석상(石像)이 없는 이유의 자료를 찾아보니 풍수 지리적으로 볼 때 묘역의 주위에 석물(石物)을 세우면 명당의 기운을 훼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927년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군(甄萱軍)군과 싸우다가 포위되어 고려 태조 왕건이 위험하게 되자 신숭겸 장군은 왕건과 옷을 바꾸어 입은 후 왕건을 수풀 속에 숨게 하고 자신은 왕건의 수레를 타고 나가 싸우다가 전사함으로써 태조 왕건이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에서 벗어 날 수 있게 하였다.
“공산전투”란 고려 태조 10년(927년)에 공산(지금의 경북 달성군 팔공산)에서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과 견훤(甄萱)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벌인 전투를 가리킨다.
태조 왕건은 신숭겸 장군이 전사한 이곳에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였고 신숭겸 장군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를 원윤(元尹)으로 삼았다.
원윤(元尹)은 고려시대 종친(宗親)에게 주던 정2품의 작호(爵號)로써 정승보다 높은 위치이다.
왕건은 공산에서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하여 송악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신 장군에게 장절공(壯節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후하게 장례를 치렀다. 이를테면 신숭겸 장군은 고려의 개국공신일 뿐만이 아니라 왕건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고려 5백년 사직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태조는 팔관회(八關會)때 신숭겸(申崇謙) 장군과 같이 전사한 공신들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사람 모양의 가상(假像)을 만들어 술과 음식을 산사람처럼 대접하였다 한다.
이것이 계속 전승되어 2백 년이 지난 뒤 고려 제16대 예종(睿宗1079~1122)이 팔관회(八關會)에서 이를 보고 충절(忠節)을 기리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유명한 노래를 지었다.
도이장가(悼二將歌)란
고려 개국 공신(功臣)인 신숭겸(申崇謙)과 김낙(金樂)의 두 장수(將帥)를 추도(追悼)하여 지은 이두(吏讀)로 된 향가(鄕歌)를 말한다.
아래와 같다.
도이장가(悼二將歌)
主乙完乎白乎(주을완호백호)-임의 목숨을 온전하게 하신
心聞際天乙及昆(심문제천을급곤)-마음은 하늘가에 미치고
魂是去賜矣中(혼시거사의중)-넋은 가셨지만
三烏賜敎職麻又欲(삼오사교직마우욕)-내려주신 벼슬은 또 대단하구나!
望彌 阿里刺(망미아리자)-바라보면 알리라
及彼可二功臣良(급피가이공신량)-그 때의 두 공신이여
久乃直隱(구내직은)-오래 되었으나
跡烏隱現乎賜丁(적오은현호사정)-거룩한 자취는 나타나시도다
도이장가(悼二將歌)는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 기록되어 전한다.
신숭겸 묘역은 우리나라 8대 명당중의 하나로 이 묘역은 화학산(華鶴山)에서 뻗어 주산인 조치산에 생기를 모았고 소양강 줄기와 북한강이 합수하여 남쪽으로 사면으로 둘러쌓는 자리의 안쪽에 자리 잡아 장군봉, 봉의산 안마산 부래산들이 강과 어우러져 반용농주형(盤龍弄珠形용이 구슬을 물고 노는 형)이라 전해온다.
아쉬운 것은 필자가 모역을 찾을 때는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묘역이 바람을 많이 타는 곳이었다.
풍수지리상으로 음택(陰宅) 위치의 배면(背面)은 유정(有情)한 쪽이 면(面)이 되고 무정(無情)한쪽이 배(背)가된다. 면(面앞쪽)쪽은 잘 정돈이 되고 밝고 아름다워 잘생긴 사람의 얼굴 같으나
배(背뒤쪽)쪽은 골이 약간 파이고 깨지며 거칠어 사람이 등을 돌려 멀리 하려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신숭겸(?∼927)은 고려 태조 때의 무장으로 평산 신씨의 시조이고 원래 이름은 능산(能山)이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본래 전라북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가 평산(平山)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고려사』열전에는 그를 광해주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신숭겸의 이름이 실려 있고,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본래 곡성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되어 그의 묘도 여기에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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