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보는 드라마중 역사이야기 ㅡ
태종 이방원이 손에 형제들의 피를 묻혀가며 세운 조선의 이야기입니다.
이방원을 왕위에 올려주기위해 노력했던 왕후 민씨의 지략과 처남들 4형제 및 장인 민제의 노력으로 겨우 겨우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 장인이 돌아가신후 처남 4형제를 몽땅 죽인 일이 있었네요.
완전 사이코 같은 일 ?
농민신문에 나온 이야기를 좀 풀어봅니다.>
신병주의 역사산책 (20)조선의 왕비로 산다는 것 (7)원경왕후 민씨
고려말 명문 ‘여흥 민씨’ 가문의 딸 변방 출신 이방원 잠재력 보고 혼인
조선초 강력한 위세 떨친 정도전
왕자들의 사병·무기 무력화할 때 민씨, 몰래 병장기 갖춰 남편 후원
1·2차 왕자의 난에도 주도적 역할
왕위 오른 태종, 왕권 강화 매진 동지였던 처가 식구 잇따라 처형
후궁 9명 둔 것으로도 크게 갈등
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한 이방원은 형님인 방과를 왕으로 올리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1400년 2차 왕자의 난으로 네번째 형 방간과 박포의 난을 진압한 후 정종의 양보를 받는 형식으로 조선의 세번째 왕인 태종(재위 1400~1418년)이 됐다. 방원이 즉위하면서 왕비의 자리에 오른 원경왕후(元敬王后·1365~1420년) 민씨(閔氏)는 남편이 왕이 되는 데 적극적인 도움을 준 여인이었다.
원경왕후는 고려말에 부상한 대표적 명문가였던 여흥 민씨 민제(閔霽)의 딸이었다. 민씨는 1382년(우왕 8년)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에 2살 연하의 방원과 혼인했으며, 방원은 오랜 기간 처가살이를 했다. 방원은 변방의 시골인 함흥 출신으로, 가문도 크게 내세울 명문가가 아니었다. 다만 민씨 집안에서 방원의 가능성을 알아보았기에 둘은 혼인할 수 있었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민씨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가, 1400년(정종 2년) 2월 남편이 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돼 정빈(貞嬪)에 봉해졌다. 그해 11월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돼 정비(靜妃)의 칭호를 받게 됐다.
조선 건국 후 태조의 신임을 받은 정도전의 정치적 독주 속에 방원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절치부심하고 있던 방원은 방석의 세자 책봉이 이뤄지자, 형제들을 규합하며 정도전과 방석의 제거를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정도전 측의 반격도 만만치가 않았다. 왕자들이 보유한 사병혁파와 무기 반납을 추진하며 방원을 압박해나갔다.
정도전의 기세가 등등했을 때 방원은 사병을 폐하고 무기들을 모두 불에 태워버렸지만, 민씨는 몰래 병장기를 준비해 변고에 대응하는 당찬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훗날 1398년 8월 1차 왕자의 난 때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왕자의 난 당일에도 민씨는 태조 곁에서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자신의 복통이 심하다는 것을 핑계로 불러내서 정도전을 공격하게 했다.
그녀의 동생인 무구·무질과 함께 친정으로 빼돌렸던 무기와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과 남은을 기습하게 한 것이다. 1400년 방간과 박포가 주동이 돼 일어난 2차 왕자의 난 때도 남편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민씨는 당찬 여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종실록>에는 이런 민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單衣)를 더하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권하여 군사를 움직이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남편이 왕이 된 후 원경왕후는 정치 참여도 봉쇄되고, 태종의 후궁문제로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정도전의 신권 강화 조치에 강한 불만을 가졌던 태종은 즉위 후 왕권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외척의 발호를 원천 차단해나가야겠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즉위에 최고의 공을 세운 처남인 무구와 무질을 불충 죄인으로 몰아붙이며 유배에 처했다. 처가를 멸문시키려는 태종의 의도를 눈치챈 민씨는 친정 식구들과 은밀한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갈등의 골은 더욱 커져만 갔다.
처가에 대한 태종의 탄압은 철저했다. 무구와 무질은 자진(自盡)하도록 했으며, 이들의 형제인 무휼과 무회도 역모 혐의로 처형했다. 태종이 외척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9명이나 둔 것 역시 원경왕후와 큰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됐다.
“정비(원경왕후)가 왕이 궁인을 가까이하므로 분개하고 노하여, 가까이한 궁인을 크게 나무라니 왕이 노하여 내치었다”는 문헌기록은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원경왕후는 남편을 왕으로 만든 최고의 정치적 동지였으나, 정작 태종이 왕이 된 후에는 자신은 물론이고 친정 가문까지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다. 마음의 울화가 너무 컸던 탓일까?
원경왕후는 1420년 수강궁(壽康宮·훗날의 창경궁 자리) 별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아들 세종은 당시 경기 광주 대모산 자락에 어머니의 무덤을 조성하고, 헌릉(獻陵)이라 했다. 그리고 2년 후 역시 56세의 나이로 승하한 태종이 그의 곁으로 왔다.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은 쌍릉의 형식을 취하면서, 사후에는 태종과 원경황후가 다정한 모습으로 나란히 묻혀 있다.
첫댓글 방원이가 이 애비 속을 많이도 태웠죠
애초에 막내 방석이를 세자에 세우고 충신 정도전의 말듣고 본처소생 5째 이방원을고자로 만들었다면 조선은 새로운 나라가 되어서 정도전의 주창아래 명나라 정벌하고 저넒은 중국땅 절반이상 차지해서 현재 중국땅 절반 이상 한민족이 다스렸을수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요동정벌 그기회도 놓치고 그저 한반도 안에서만 호랑이가 되어버린걸 후회처럼 느껴지네요.
@청설모 못난 애비탓이에요
내가 다시 환생한다면 요동 정벌하겠슴매
@이성계 다시 태어난다면 현대판 이순신이.되어 친일파와 토착왜구 좀 섬멸해주세요. 또 호시탐탐 한국노리는 북한 정은이 원점타격해서 북한 주민들 해방 좀 시켜주세요
조선시대에서 제일
왕 다운 왕이지라.
정적들,형제, 실세처가 민씨들
왕권확립을 위해서라면
다 청소해 버렸죠.
그 후임 아들 세종에 태평성대는
이방원이 지분이 반이상이라
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조선 말기 고종때
이방원이 숙청한 민씨의 후손인 민비 (명성왕후)일가들에 전횡으로 나라가 개판되서 조선이 망하게 되는데 크게 일조하게 되였지라.
고종의 아비고 실세였던 흥선대원군도 처리하지 못할정도로 외척들의
힘이 쎄져버리고 왕권은 힘이 없고 마침 쪽바리들은 힘이 쎄고
딱 망하기 좋은 때였는가 봅니다.
요즘 태종 이방원 드라마를 보니
처가를 숙청하고 이방원이 세운
조선의 자업자득을 연출하는듯.
멋진 역사이야기 감사합니다
뭐할려고 같이 묻었는지?
후궁9명하고 같이 묻어주지
나쁜 태종 ㅋㅋ
이시국에 역사
문재인이 세종이나 성종의 길을 가지말고 이방원 처럼 적폐들을 쳐내야 했는데
이성계가 정도전 말듣고 이방원을 고자로 만들었다면 지금 한국의 역사도 크게 바뀌어 있었을 겁니다.
명나라가 더 커지기 전에 요동정벌을 했다면 지금쯤 중국대륙 절반이 한국땅이 되어있었을수도요.
이방원 ㄱㅆㄲ네요. 현명한 조강지처가 왕으로 만들었더니 계집질에 밤이 새고 .
자기손에 피묻혀서 세운 나라를 3남 세종에게 물려줘도 50년정도 지나서 세종 둘째아들 수양대군에게 임금인 단종이 죽는 골육상쟁을 또 다시 겪었네요.